주간동아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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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회주의와 지역공동체

이찬갑·주옥로·홍순명의 풀무학교…“학교이면서 교회이고 자급자족하는 마을”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2015-12-02 18: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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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교회주의와 지역공동체

    이찬갑과 주옥로는 1958년 충남 홍성 홍동면에서 풀무학교와 풀무공동체를 시작했다. 사진은 1958년 풀무학교 모습. 사진 제공 · 그물코 출판사

    일제강점기 한국 민족지성사에서 평안도 정주 오산학교가 가지는 명성은 무척이나 커서 재론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설립자 이승훈과 조만식, 이광수 등 이름만으로 빛나는 선생들, 졸업 동문인 시인 김소월과 백석, 화가 이중섭 등 오산학교를 거쳐 간 수없이 많은 ‘위인’은 일일이 거명조차 힘들다.
    오산학교는 후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이름을 올린 남강 이승훈이 44세 되던 1907년 설립한 학교다. 설립 계기가 됐다는 남강과 도산 안창호의 만남 ‘사건’은 매우 유명하다. 서북의 이름난 상인이던 이승훈은, 1907년 여름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연설이 끝나자 곧 연단 앞으로 나가 도산을 만난 “남강은 돌아가서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즉시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고 이해 12월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그 자신이 오산학교 출신이자 오산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함석헌은 훗날 남강의 생을 정리하는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때의 남강의 일은 거의 종교적 회심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들이 한때 남강을 미쳤다 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은 새로 태어난 것이었다.”(함석헌의 ‘남강 이승훈 선생의 생애’)

    함석헌, 오산학교에 무교회주의 신앙 전파

    무교회주의와 지역공동체

    1960년 풀무학교를 이끌던 이들. 앞줄 왼쪽부터 이찬갑과 주옥로이고 뒷줄 왼쪽이 홍순명이다. 사진 제공 · 그물코 출판사

    일제강점기 오산학교 졸업생은 대부분 해방 후 월남해 주로 교육계, 기독교계, 의료계에서 주요 인물이 됐다. 이기백(30회 동문)과 이기문(37회 동문) 형제는 국학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각각 사학계와 국어학계 거두가 된 이들 형제는 남강 집안 종손인 이찬갑의 자제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무교회주의와 남강 집안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반뿐 아니라 학계에도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오산학교에 무교회주의 신앙을 전파한 것은 함석헌인데, 함석헌의 오산 성서모임에 이찬갑이 출석했던 것이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터졌을 때 이찬갑 역시 옥고를 치렀다. 이찬갑은 ‘성서조선’에 27편이나 되는 글을 기고할 정도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남강 집안 사람들이 무교회주의 신앙을 접하게 된 것도 이찬갑으로 인해서였다.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부임한 때는 남강이 별세하기 이태쯤 전인 1928년이었다. 오산학교 재임 초기부터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성서모임은 시작됐는데, 남강은 말년에 이찬갑의 권유로 모임에 여러 차례 참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원래 남강은 1910년 오산학교에 부임한 류영모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바 있으나 중간에 신앙에 소홀한 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남강이 함석헌의 부임 이후 마음을 다잡고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전국 ‘성서조선’ 독자들을 주기적으로 심방했던 김교신은 함석헌의 오산 성서모임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1929년 김교신이 남강과 교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본래 함경도 출신으로 평안도 쪽 인사들과 면식이 거의 없던 김교신이 남강과 교유한 데는 함석헌이 매개가 됐음이 확실하다.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와 김교신이 만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930년대 후반, 오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10대 이기백도 부친 이찬갑을 따라 함석헌의 성서모임에 참석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떠난 후에도 이기백과 무교회주의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기백은 일본 유학 시절 부친 이찬갑의 소개로 우치무라 간조의 수제자인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후일 도쿄대 총장)를 개인적으로 사사했다. 야나이하라가 천황제 파시즘을 맹비판하고 일제 군국주의에 극력 저항하다 도쿄대 교수직에서 쫓겨나 있을 때였다. 이기백의 ‘연사수록(硏史隨錄)’에 나온 회고에 따르면 야나이하라와의 만남은 이기백의 삶과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치무라 이후 국가동원체제에 반대를 명확히 했던 무교회주의자에게는 공산주의도 새로운 국가통제 시스템에 불과한 것으로, 국가주의와 함께 척결돼야 했다. 그렇다면 함석헌의 표현대로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살면서” 타인의 노동가치를 착취하지 않는 모델이 어떻게 가능할까. 타인을 착취하지 않고, 또 타인으로부터 착취당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한가. 결론은 소규모의 자급자족적 협동 공동체 건설이었다. “정직한 이마의 땀으로” 노동하는 것, 자신의 노동으로 자립을 이루는 것이었다.
    해방 이전 오산에서 이미 이찬갑은,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하고 협동조합을 생활 단위로 하는 오산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의 압박과 연이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으로 실패했다. 해방과 전쟁이 이어졌으므로, 이찬갑이 구상하던 지역공동체의 시도는 전후 안정이 찾아온 1950년대 중반 이뤄졌다. 함석헌이 충남 천안에 씨알농장을 설립하던 때(1957년)와 비슷하게, 이찬갑은 짧지 않은 준비기간을 거쳐 58년 홍성 홍동면에서 주옥로와 함께 풀무학교와 풀무공동체를 시작했다.

    이찬갑의 구상과 ‘위대한 평민’

    무교회주의와 지역공동체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 초상화. 사진 제공 · 독립기념관

    이찬갑의 풀무공동체는 한국 무교회주의자의 세계관과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사례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역에 기반을 둔 학교였다.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으로, 성서에도 등장하는 용어이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풀무’로 학교 이름을 지었다. 우치무라의 ‘위대한 범인(凡人)’과 류영모-함석헌의 ‘씨알’ 개념의 영향을 받아 ‘위대한 평민’을 교훈(校訓)을 삼았다(현재 풀무학교 교훈은 ‘더불어 사는 평민’). 류달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찬갑에게도 덴마크가 중요했다. 풀무학교 모델은 덴마크 국민고등학교(Folk High School·교육학계에서는 ‘시민대학’으로 번역)였다. 이찬갑은 해방 전인 1938년 이미 덴마크식 국민고등학교의 운영 실무를 습득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풀무공동체를 설계하고 풀무학교 기반을 만든 이는 이찬갑이지만, 오늘날 홍성 풀무학교가 자리 잡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은 홍순명(1937~ )이다. 이찬갑이 풀무학교를 설립하고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져 거동을 못 하게 된 후 그 빈자리를 메운 이가 홍순명이었다.
    강원 횡성 출신인 홍순명이 김교신과 무교회주의 기독교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원주공립농업중 재학 시절 교사 정태시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정태시는 “내 일생에 있어서 단 두 분만 ‘선생님’을 고르라면 어머니와 김교신 선생”이라고 했을 정도로 김교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로, 성서조선 사건 때 역시 검속돼 일주일가량 유치장에 갇힌 경험이 있다. 정태시를 통해 김교신의 존재를 알게 된 홍순명은, 10대 나이에 김교신의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이후 홍성 풀무학교 설립을 알게 된 홍순명은 재직 중이던 학교를 그만두고 자신의 인생을 던져 지금의 풀무학교를 만들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구상하는 공동체에서 ‘조합’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성서조선 그룹 일원이면서 후일 풀무학교 후원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도움을 줬던 장기려가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것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조합주의의 발로였다. 기본적으로 무교회주의자들의 공동체 구상 근저에는 조합주의적인 공동체주의가 존재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 언제나 ‘조합’을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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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겨울 전국 무교회주의 성서조선 모임을 가진 후 풀무학교 뒷산에서 찍은 사진.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찬갑. 둘째 줄 가운데 수염 기른 이가 함석헌, 그 왼쪽이 류달영이다. 함석헌은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 무교회주의를 전파했고, 이 성서모임에 남강 집안 종손 이찬갑이 참석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사진 제공 · 그물코 출판사


    공동체의 기반, ‘조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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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갑의 두 아들 이기백(한국사)과 이기문(국어)은 오산학교 동문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국학계 거두가 됐다(왼쪽부터). 동아DB

    이찬갑의 구상을 홍순명이 구체화한 ‘풀무생활협동조합’은 전형적인 예로 내부에는 코뮌적 요소가 있다. 식량 자급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풀무학교 자체에서 쌀과 채소 농사, 양계를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노동과 학습은 분리되지 않으며 양자가 결합돼 생활을 이룬다. 홍순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교는 하나의 마을이어야 하고 생활의 공동체라야 합니다. (중략) 나는 미래에는 학교가 마을이 되고 마을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홍순명의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풀무학교 이야기’)
    요컨대 무교회주의 공동체의 이상(理想)은 “학교이면서 교회이고, 동시에 자급자족하는 마을”이다. 무교회주의의 이상을 놓고 판단했을 때 공동체 규모는 본질적으로 소형화, 소수화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풀무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도 생활협동이 가능한 정도의 소규모 지역에 기반을 두고 무교회 신앙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규모 집단에 기반을 둠에 따라 무교회주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자발적’ 정신의 각성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사실 이런 방식의 무교회주의자들의 공동체 사유는 주류 질서에 대해 어떤 급진성과 비타협성을 띤다. 물론 무교회주의자는 대개 정치적 혁명성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자기 정신의 혁명을 기초로 생활의 혁명을 이루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런 사유가 때로 예기치 않게 사회 전체의 진보를 가져오기도 했다. 농업방식의 변화가 그 예다.
    지극히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무교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야 할 영역을 인간사회뿐 아니라 자연계 일반으로까지 확대해서 보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일찍이 김교신은 성서 창세기에서 “생명은 생명으로써만 산출한다”는 원리를 끄집어 내오기도 했다. 이 원리는 무교회주의 생활경영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일종의 생명주의로 이해될 수 있는 이런 성서 해석은 구체적인 농업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오직 생명으로 생명을 키운다.’ 유기농업이었다.
    한국에서 유기농업이 사실상 처음으로 도입, 실현된 것이 무교회주의자들에 의해서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 유기농업은 일본에서 도입된 것으로, 1975년 9월 고다니 준이치 일본 ‘애농회’ 회장이 풀무학교와 경기 양주 풀무원(풀무원 창립자 원경선은 풀무학교 이사진 중 한 명이었고, 풀무학교 이름을 따서 농장 이름을 지었다)을 방문한 것으로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인 76년, 류달영도 한국유기자연농업연구회를 창립했다.
    오늘날 조합주의와 생명주의는 무교회주의자들만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평화적 공동체에 대한 꿈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특정 집단 사람들의 전유물일 리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비록 무교회주의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이들이 가졌던 전망이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가장 양심적인 일본의 지성과 닿아 있다는 사실도 꼭 언급해둘 점이다. 이들의 구상은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이 그림은 그 미래가 어떨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무교회주의와 지역공동체

    이찬갑과 그가 남긴 7권의 스크랩(오른쪽). 왼쪽은 오산학교 신축기사를 다룬 1939년 10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스크랩이다. 사진 제공 ·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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