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0

2018.05.30

안보

한미동맹 흔드는 ‘새로운 력사’ 시작됐나

‘우리 민족’ 강조할수록 트럼프-문재인 입장 차이 커져

  • 입력2018-05-29 11: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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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2일 태극기가 없는 곳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어로 답변한 것을 “전에 들었던 말이니 통역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 외교결례 논란이 일었다. [동아DB]

    5월 22일 태극기가 없는 곳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어로 답변한 것을 “전에 들었던 말이니 통역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 외교결례 논란이 일었다. [동아DB]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 도착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방명록에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적었다. 5월 22일 미국 워싱턴을 다시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와 번영을 향한 한미동맹, 세계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길!’이라고 썼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바람과는 아직 동떨어져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한미관계부터 살펴보자. 5월 22일 한미정상회담을 유심히 살펴본 독자라면 회담장에 태극기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지난해 6월과 11월 워싱턴과 서울에서 열렸던 한미정상회담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대로 세워져 있었다. 정상회담장에 양국 국기를 교차해 세워놓는 것은 외교 관례다. 

    5월 22일 한미정상이 앉은 뒤편에는 미국 육·해·공군과 해병대 깃발만 서 있었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이 실무 방문했기 때문이라는 해명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개운치 않은 광경이었다. 실무 방문이라면서 영부인을 동행한 것도 이상했다. 멜라니아 여사는 신장에 생긴 양성종양 치료를 위해 ‘색전술’을 받느라 5월 14일 입원했다 19일 퇴원했으니, 김정숙 여사를 맞이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예상대로 22일 회담장에 영부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김정숙 여사는 백악관 인근 유적 건물인 디케이터 하우스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부인을 만나 멜라니아 여사의 쾌유를 기원했다. 워싱턴에 도착해 1박을 한 문 대통령은 22일 오전 영빈관으로 찾아온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 50여 분 동안 한반도 문제 등을 놓고 대화한 후 백악관으로 갔다.

    태극기가 없는 한미회담장

    다시 만난 양 정상은 기자단을 향해 간단히 인사했는데, 그때 문 대통령의 인사말은 통역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정상회담에 들어가지 않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23개의 질문이 영어로 쏟아졌기에 그는 답변을 독점했다. 그리고 24번째로 한국 기자가 (문 대통령을 향해) 한국어로 질문하자, 트럼프는 “He’s friendly reporter. They’re friends. So let them-like you. Except he kills me. For a friendly reporter, he kills me”라고 농담을 던졌다. 

    ‘저 사람은 (문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기자다. 그들(질문을 한 한국 기자와 문 대통령)은 좋은 사이일 테지만,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내버려두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 대통령이 한국어로 답변을 끝내자 트럼프 대통령은 통역을 기다리지 않고 “And I don’t have to hear the translation because I’m sure I’ve heard it before”라고 말했다. ‘통역을 들을 필요는 없다. 옛날에 다 들었던 이야기가 분명할 테니까’라는 뜻인데, 이 말이 끝나는 순간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 기자회견은 백악관 홈페이지에 전문이 실려 있다. 



    워싱턴을 자주 방문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문 대통령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는 공군1호기에서 가진 기자단 간담회에서 “이번 회담은 이후 상황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 양 정상이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상회담은 99.9%가 사전에 조율되는데 이번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열린 한미정상회담이 20여 분 만에 끝나버렸다. 통역을 고려한다면 양 정상이 실제 대화한 시간은 10분 남짓에 불과한 것이다. 헤어진 양 정상은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협상술의 대가답게 모호한 전술을 펴는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했고, 문 대통령은 단정적으로 북·미 정상회담이 잘 열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한미정상회담은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결정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그다음 날 문 대통령과 한 시간 넘게 통화했다. 그리고 5월 4일 정 실장의 미국 방문이 있은 후 문 대통령의 22일 방미가 확정됐다. 그때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 개최는 희망적이었기에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을 만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분석이 모두 나왔다.

    10분 남짓한 단독 대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가운데)이 5월 24일 담화를 통해 “미국이 계속 무도하게 나온다면 북 · 미 정상회담을 재고하라는 뜻을 최고 지도부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뉴시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가운데)이 5월 24일 담화를 통해 “미국이 계속 무도하게 나온다면 북 · 미 정상회담을 재고하라는 뜻을 최고 지도부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뉴시스]

    긍정적인 것은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고 싱가포르로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문 대통령을 만나 북·미 정상회담 준비를 겸한 1차 자축을 하고,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누리려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미국 중간선거를 돌파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부정적인 전망은 미국이 한반도 수역에 상당한 전력을 전개해놓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 중이며, 이와 별도로 16개 전력(戰力) 공급국과 북한 출입 선박을 추적하고 있다는 등의 사실을 근거로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강하게 압박해야 굴복한다고 보기에 김 위원장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의견이 그것이었다. 

    3월 6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 실장은 ‘방북 결과 언론발표’를 통해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 전제조건으로 북한 체제 보장과 군사적 위협 해소를 내걸었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정 실장은 3월 9일 백악관을 방문해 45분간 방북 성과를 설명하며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을 바란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어 정 실장은 백악관-청와대를 잇는 전화로 문 대통령과 통화하며 2시간에 걸쳐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와 발표문을 만들었다. 이 발표문이 완성될 쯤 트럼프 대통령은 정 실장에게 “여기까지 온 김에 한국 측이 직접 발표해달라”고 제안했고, 사상 처음으로 백악관 기자실(브리핑룸)로 내려가 “잠시 후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백악관 기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중대 발표를 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정 실장 등 한국 대표단이 나와 합의된 발표문을 영어로 낭독했다. 발표문 내용은 간략했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이 ‘I(=정의용) told President Trump that, in our meeting,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said he is committed to denuclearization’이었다. 

    이 발표문(영문)을 실어놓은 청와대 홈페이지는 이 부분을 ‘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과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언급하였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번역해놓았다. 서울에서는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돼야 북측은 비핵화한다고 했다’고 발표한 정 실장이 워싱턴에서는 두 조건을 빼고 ‘김 위원장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만 밝힌 것이다. 

    부정적 견해를 갖는 이들은 정 실장이 두 가지 조건을 뺐다는 사실을 트럼프 대통령이 재빨리 파악했기에,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자 정 실장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했다고 본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입장과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5월 9일 김 위원장이 중국 다롄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난 뒤 평양으로 돌아와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만나고,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3명을 풀어주자 수그러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롄 회담이 있은 후 김 위원장이 돌변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볼턴 보좌관 역시 리비아식 모델을 제시했는데, 이에 북한이 발끈하며 싱가포르 회담 보이콧 의사를 내비쳤다. 다른 게임도 벌어졌다. 문 대통령의 안보정책을 가늠할 바로미터 역할을 해온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4월 30일 발매된 ‘포린어페어스’에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것이다. 

    그러자 5월 10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가 주한미군을 철수할 때는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내용이 추가된 2019 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대목에서 워싱턴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은 “미국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라다. 미 의회는 대통령 권력을 철저히 감시한다. 미 공화당은 대안이 없었기에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인정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공화당의 정책 틀 안에서 정치를 하도록 펜스를 부통령으로 집어넣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펜스 부통령으로 상징되는 공화당 틀 안에서 정치를 해야 재선에 도전할 수 있다. 안보 문제는 대통령의 명령일지라도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서명이 없으면 집행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핵화 노력 NO, 증거 인멸 YES!

    5월 23일 북한 풍계리로 가기 위해 공군5호기를 타고 원산 갈마공항에 도착한 한국 기자단. [뉴스1]

    5월 23일 북한 풍계리로 가기 위해 공군5호기를 타고 원산 갈마공항에 도착한 한국 기자단. [뉴스1]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한 것 이상으로 볼턴 보좌관과 미 의회, 공화당도 김 위원장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체제 보장까지는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노태우 정부 시절 북방정책을 추진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핵이 없는 북한이라면 안보 측면에서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다. 자력갱생을 하든, 개혁·개방을 하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시진핑 주석이 북·중 관계를 순치(脣齒)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미국 세력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을 더 잘 막아주는 것은 핵을 가진 북한이다. 핵이 없는 북한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핵이 없는 북한의 체제 보장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해주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간파했기에 체제 보장을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과 영국, 미국 기자들을 불러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겠다고 한 날, 미국은 WC-135 등 정찰기를 출동시켰다. 북한을 의심하는 시각을 가진 미국 실력자들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비핵화 노력이 아닌, 증거 인멸로 보고 있다. 핵과학자들이 가서 흙이라도 한 줌 들고 나오게 해줘야 북한이 과거 어떤 실험을 했는지 알 수 있어 그 후 사찰이 가능한데, 기자들만 불러놓고 휴대용 방사선 계측기조차 압수했으니 이는 증거 인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5월 22일 한미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부정적 시각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은 북·미를 엮어주려고 나섰으나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으니 한미관계는 껄끄러워질 수 있다. ‘우리 민족’을 강조하다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북한은 볼턴 보좌관에게 향하던 비난을 펜스 부통령으로 옮겼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5월 24일 “조미수뇌회담 재고를 최고지도부에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평화의집에 도착한 김 위원장이 방명록에 쓴 글 가운데 ‘평화의 시대’를 뺀 ‘새로운 력사는 이제부터’는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북미 정상 회담이 취소됐기에 남북, 한미, 한중, 한일, 북·중 관계가 모두 흔들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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