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0

2018.05.30

커버스토리

“갑질을 참아야 한다면 월급으로라도 보상해달라”

  • 입력2018-05-27 11: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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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수량이 서류랑 안 맞잖아!” 

    “아니, 밑에 여기 보시면. 이 숫자로 보셔야 합니다.” 

    “아, 이거 담당자 누구예요. 누가 문서를 이따위로 만들어?” 

    “저희는 생산라인 담당이라, 잘….” 

    “아니, 본인들이 만든 제품 재고 현황을 누가 작성하는지도 몰라요? 부장님 이러니까 그 나이 먹고도 나같이 젊은 사람들한테 욕 먹는 팔자로 살지. 머리가 나빠서 이따위 직장에서 썩어가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아침부터 성질 돋우네.” 



    대화만 보면 젊은 상사의 갑질 사례 같다. 하지만 폭언을 내뱉는 사람은 피해자와 같은 회사의 직원이 아니다. 대기업 계열사인 원청업체 소속이다.

    “하청업체인 것도 서러운데”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기념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서울광장에 갑질 사례를 소개하는 게시물을 전시했다. [동아일보]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기념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서울광장에 갑질 사례를 소개하는 게시물을 전시했다. [동아일보]

    대기업 오너 일가의 갑질 사례가 종종 보도되지만 직장인을 괴롭히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가깝게는 직장 상사나 고객, 멀게는 원청업체 직원까지 갑질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 직장인은 상사나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인사상 불이익이 두려워 고발을 망설인다. 설령 고발한다 해도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증거가 없다며 오히려 피해자를 몰아붙이는 사례도 많다. 

    대화에서 욕을 먹던 주인공은 국내 대기업 하청업체에 다니는 정모(40) 씨와 동료들이었다. 이들은 본사 직원이 회사에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주일 전부터 기분이 나쁘다. 이들은 “본사 직원의 갑질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올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댄다. 지난번에는 작업장이 깨끗하지 않다고 지나가는 막내 직원을 붙잡아 10분 이상 욕설을 늘어놓았다”고 밝혔다. 

    그나마 욕설로 끝나면 다행이다. 지난해 11월 대전 둔산동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는 원청업체 직원이 하청업체 대표를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하청업체 대표는 체납한 10억 원의 대금을 달라고 1인 시위 중이었다. 원청업체가 대금을 주지 않아 회사가 도산 위기에 놓였다는 것. 경찰 조사에 따르면 시위 현장에 간 원청업체 직원이 현수막을 떼는 등 시위 중인 하청업체 대표와 승강이를 벌이다 폭행 사건으로까지 번졌다. 원청업체 측은 “직원이 시위 현장을 지나다 벌어진 우발적 폭행”이라고 해명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2015년 하도급거래 서면실태조사’에 따르면 당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 위반 행위에 해당하는 원청업체의 갑질을 겪었다고 응답한 하청업체의 비율은 49.1%였다. 하청업체 관계자는 “하도급법 위반에 해당하는 사례만 저 정도지, 폭언이나 욕설 등 원청업체 직원의 갑질을 대다수 하청업체가 참고 산다. 욱하는 마음이 들어 문제를 제기하면 원청업체와 관계가 나빠져 우리만 손해를 본다”고 밝혔다.

    “상사가 아니라 상전”

    “참고 넘어가. 참는 것도 직장생활의 일부야. 이런 것도 못 참으면 앞으로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직장인 이모(28·여) 씨가 최근 회사 인사담당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이씨는 상사 복이 없었다. 사내에서 가장 예민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그의 상사였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업무상 실수가 없도록 조심했다. 이씨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상사는 ‘시키는 일도 못 하는 머리 나쁜 애’라는 핀잔을 늘어놓았다. 업무상 실수가 없어도 이씨의 직장생활은 평화롭지 않았다. 상사가 옷차림부터 향수 냄새까지 하나하나 지적하고 나섰기 때문. 하루는 상사가 이씨의 허벅지를 볼펜으로 찌르며 “이럴 거면 밤에 하는 일을 알아보는 게 어때”라고 폭언해 점심시간 내내 화장실에서 울기도 했다. 상사가 발언 직후 “내가 말이 좀 과했네. 미안”이라고 사과했지만, “그래도 그런 옷차림은 문제라는 거 알지?”라고 덧붙여 다시 이씨의 속을 긁었다. 

    이씨는 인사담당자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다음 인사이동 때는 부서를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인사담당자는 오히려 그를 탓했다. 해당 상사를 거친 다른 직원들은 잘 참고 넘겼는데, 이씨만 요란스레 반응한다는 지적이었다. 이씨는 “상사가 아니라 아예 출생 성분이 다른 귀족 상전을 모시는 것 같다. 계속되는 폭언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직도 고민 중이다. 하지만 또 저런 사람을 만나면 어쩌나 싶어 두렵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정도가 심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대다수 직장인은 한 번쯤 상사의 갑질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인터넷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864명을 대상으로 직장 상사 갑질 사례에 관해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8.5%가 ‘직장 상사로부터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상사의 갑질 유형에는 ‘부당한 업무 지시’(61.7%·복수응답)가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의견 묵살’(54.2%), ‘언어폭력’(41.0%), ‘업무와 관계없는 개인적 지시’(36.0%), ‘차별대우’(35.1%), ‘실적 뺏기’(19.9%)’ 등이 이었다. ‘회식 때 분위기 띄우기 강요 및 성희롱’으로 불쾌했다는 응답도 31.4%에 달했다. 

    그렇다면 직장인은 상사의 갑질에 어떻게 대응할까. 같은 조사에서 동료에게 알리거나(33.6%·복수응답), 단호하게 거절(13.7%) 및 회사에 정식 항의(6.5%)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부당한 갑질에 그냥 참았다(76.1%)고 응답했다. 참는 것을 선택한 이유로는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71.7%·복수응답), ‘더 큰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51.9%) 등이 꼽혔다. 

    문제를 제기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고용노동부(노동부) 등 국가기관에 정식으로 갑질 문제 해결을 요청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 지난해 11월 1일 노동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연대해 직장 내 갑질 제보 오픈 채팅방 ‘직장갑질119’를 만들었다. ‘직장갑질119’의 5월 발표에 따르면 제보 내용 중 22건을 골라 노동부에 근로감독을 요청했으나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직장인은 자신이 당한 불합리한 상황을 알려도 증거가 없다며 유야무야되는 일이 허다하다. 경기도 소재 중소기업에 다니던 박모(29) 씨는 술만 먹으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상사가 있어 회사 측에 정식 항의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증거가 없다”며 해당 상사를 징계하지 않았다. 박씨가 동료들에게 증언을 요청했지만 동료들은 인사담당자인 상사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주저했다. 이후 폭행은 없어졌지만 박씨는 결국 다른 회사로 쫓겨나듯 이직했다.

    “우리는 일종의 감정화장실”

    2015년 인천 한 대형백화점에서 점원 2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는 모습. 고객이 귀금속 무상수리를 요구하자 업체 측이 규정상 유상수리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뉴스1]

    2015년 인천 한 대형백화점에서 점원 2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는 모습. 고객이 귀금속 무상수리를 요구하자 업체 측이 규정상 유상수리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뉴스1]

    누군가의 갑질을 받아주는 것이 일인 사람도 있다. 애프터서비스(AS)센터, 요식업 등 고객을 직접 대하는 서비스직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웨딩홀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장모(25) 씨는 두 달 전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을 겪었다. 손님이 장씨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은 것. 이 손님은 테이블에 맥주가 다 떨어졌으니 채워달라고 다른 직원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맥주가 오지 않자 지나가던 장씨를 붙잡고 항의했다. 장씨가 금방 가져다 드리겠다고 응대했으나 손님은 “자신을 무시하느냐”며 장씨에게 맥주를 끼얹었다. 장씨는 “사실 이 정도는 사건 축에도 못 낀다. ‘맥주 싸대기’를 맞을 때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손으로 맞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고객상담센터에서 일하는 백모(27·여) 씨는 “부당한 대우를 참는 것도 일이라면, 그것까지 계산해 월급에 포함해줬으면 좋겠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 아르바이트생 11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1%가 ‘갑질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갑질을 한 대상은 ‘고객’(55.8%·복수응답)이 가장 많았다. ‘고용주’는 50.6%에 그쳤다. 이들이 고객의 갑질을 참아 넘긴 이유는 ‘관련법에 대해 잘 몰라서’(40.5%·복수응답)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상사, 원청업체, 손님의 갑질로 정신질환까지 겪는 직장인도 늘고 있었다. 안전보건공단 조사에 따르면 최근 9년간 직장 업무에 따른 정신질환으로 산업재해(산재) 인정을 받은 직장인이 5배가량 늘었다. 지난해만 해도 직장인 126명이 정신질환 산재를 인정받았다. 2008년 24건에 비해 5.3배가 늘어난 것. 산재 신청 건수도 같은 기간 69건에서 213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김인아 한양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정신질환 관련 산재 신청 사유 중 3분의 1은 갑질 문제다. 최근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커져 감정노동자가 늘었고, 감정노동으로 인한 우울증도 산재 인정을 받는 등 해당 범위가 넓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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