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27

2018.02.28

황승경의 on the stage

빨치산과 토벌대, ‘벌교 꼬막’이 던진 희망

연극 | ‘로풍찬 유랑극장’

  • 입력2018-02-27 11: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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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극단 달나라동백꽃]

    [사진 제공 · 극단 달나라동백꽃]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은 세르비아 극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재창작한 작품이다. 극단 달나라동백꽃이 2012년 초연한 ‘로풍찬 유랑극장’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에 선정돼 다시 무대에 올랐다. 극본을 쓴 김은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을 6·25전쟁 직전의 전남 보성군 벌교읍 ‘새재마을’로 옮겨 우리 역사로 채색했다. 극장(劇場)과 극단(劇團 · 연극을 전문으로 공연하는 단체)은 다르다. 김은성은 작품 제목을 유랑극단에서 공연 장소인 유랑극장으로 바꿔 새재마을과 마을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왕년 명배우들로 구성된 유랑극단의 로풍찬 단장(전석찬 분)과 단원 4명은 새재마을에 도착한다. 허나 이곳은 공비 토벌대와 빨치산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이 일상화된 마을. 하룻밤 사이 죽고 죽이고, 쫓고 쫓기는 주체가 뒤바뀌면서 처참한 상황이 반복된다. 

    마을 사람들의 인생도 하나같이 파란만장하다. 경찰인 동생은 빨치산에 의해 죽고, 아들은 빨치산에 들어가 요주의 인물이 된 조귀엽(이지현 분), 참혹하게 죽은 가족의 원수를 갚고자 죽창을 들고 빨치산과 부역자들을 찾아다니며 피에 굶주린 피창갑(조재영 분), ‘빨갱이’로 손가락질받는 아들 때문에 술독에 빠져 사는 전직 엿장수 김삼랑(김용준 분) 등은 나락으로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연극공연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웃고 울고, 또 감나무에 얽힌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면서 즐거워한다. 


    [사진 제공 · 극단 달나라동백꽃]

    [사진 제공 · 극단 달나라동백꽃]

    “전쟁 통에 무슨 연극이냐,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비난에 로풍찬 단장은 “웃고 울다 보면 가슴의 응어리가 쫙 풀린다”면서 “선생님이 학교에 있는 것처럼 배우도 배우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극단 단원들은 이념에 편승해 요리조리 ‘특혜’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전쟁이나 이념보다 각자 자기방식대로 예술에만 집중한다. 연출자 부새롬은 어떤 경우에도 대의(大義)가 사람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던진다. 



    극 중 새재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으뜸 상품인 ‘벌교 꼬막’에 무한한 자부심을 보인다. 이는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다. 벌교 꼬막에 대한 새재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애착은 현재는 철천지원수이지만 언젠가는 꼬막을 통해 뭉칠 수 있는 연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새재마을에서 로풍찬 유랑극장은 배우 한 명을 잃고, 또 다른 여배우는 억울하게 누명을 써 머리카락이 무참하게 잘리는 수모를 당한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자 유랑의 길을 떠난다. 

    2018년 우리 사회에도 벌교 꼬막이 있을까. 죽창은 많은데 꼬막은 안 보이는 듯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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