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5

2017.09.13

황승경의 on the stage

비겁한 복종에 화두를 던지다

연극 | ‘노숙(露宿)의 시’

  • 공연예술학 박사  ·  동아연극상 심사위원회 간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7-09-12 11: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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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시간을 착각해 일찍 지하철역에 다다랐다. 땅위로 올라가도 마땅히 시간을 때울 곳이 없어 개찰구 로비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뒤적였다. 낯선 이들로부터 “도(종교적 득도)를 아냐” “도(길)를 아냐” 등 여러 질문을 받았다. 비록 공공장소의 벤치라지만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갈 곳을 잃은 적도 없는 나에게 쏟아지는 그들의 개인적인 질문이 편치 않았다.

    연극은 이렇게 벤치에 앉아 있는 김씨(오동식 분)와 그에게 질문하는 무명씨(명계남 분)의 대화로 시작한다. ‘노숙의 시’는 미국 극작가 에드워드 앨비(Edward Albee·1928~)의 ‘동물원 이야기(The Zoo Story)’를 한국 현실에 맞게 재창작한 작품. ‘동물원 이야기’는 부조리극으로,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병폐를 고찰했다. 이를 한국 사회에 그대로 옮겨놓기에는 현실성이 너무 떨어졌다. 연출자 이윤택은 극적 구성은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굴곡진 현대사의 상흔이 깃든 2017년 한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50분의 원작을 90분으로 조정한 ‘노숙의 시’는 극적 구성이나 사건 충돌 없이 오롯이 배우들의 대사로만 진행된다. 원작 ‘동물원 이야기’는 광장에서 북쪽 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생기는 일이고, ‘노숙의 시’는 광장의 기억을 안고 검둥개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이야기다.

    무명씨는 빨치산 어머니와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아버지를 둔 해직 기자 출신이다. 그는 형을 마친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가 고1 때부터 생활했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 기자, 해직 후에는 다시 독일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다 우울증이 깊어져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무명씨는 실업수당을 받으며 화려하지 않지만 무탈하게 삶을 꾸려간다. 어느 날 그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가슴속 응어리를 주체하지 못해 알렉산더광장으로 나가 마구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말로 지껄이고자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무명씨는 광화문광장을 마주한다. 연극은 30년 만에 찾은 빨간 벽돌 하숙집 여주인과 그녀의 검둥개를 통해 독재적 군림과 비겁한 복종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현대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부터 영국 록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Shine On You Crazy Diamond’까지 추상적이고 강렬한 색채의 음악이 극 진행에 주도적으로 힘을 보탠다. 이윤택은 ‘연극이 세상에 말을 거는 담론이기를 바랐다. 결국 음악의 힘이 컸다’고 프로그램 맨 앞에 적어놓았다.

    공연은 쉽지 않다. 평안하게 감상하는 여가선용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사회적 성찰을 얻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진솔하지만 묵직하고 방대한 대사를 실시간으로 쫓아가야 ‘노숙의 시’가 원하는 사회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 속에 숨겨진 배우의 시 낭송은 감성적인 미학의 음미라기보다 행동을 위한 각성을 촉구하며 울부짖는 연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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