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여, 감사합니다!”
가수 안치환이 최근 11집 앨범 ‘50’을 내놓으며 소회를 담아 쓴 글 ‘에필로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65년 태어난 안치환의 나이는 올해 꼭 쉰 살. 인생 반환점을 돌며 ‘50’을 주제 삼아 만든 노래를 묶어 냈으니, 자신의 삶에 먼저 감사를 표하는 게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앨범 수록곡 제목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인사가 그런 짐작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암환자’ ‘병상에 누워’ ‘레테의 강’ 등 제목 마디마디마다 죽음과 고통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다.
천생 딴따라
안치환은 1980년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자작곡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내놓은 뒤부터 줄곧 삶과 고민을 담은 노래를 발표해왔다. 이번 앨범에도 그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난해 4월, 별생각 없이 건강검진을 했다가 직장암 선고를 받았어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죠. 처음엔 내가 놓인 상황이 낯설더니, 차츰 두려웠어요.”
그것이 11집의 출발점이 됐다. 당시 그는 두 개 앨범의 발표를 앞둔 상태였다. 하나는 자신의 음악인생을 집대성한 6장의 CD(콤팩트디스크)집, 다른 하나는 2010년 10집 발표 뒤 4년간 준비해온 신보였다. 그러나 모든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2번의 수술, 6주간의 방사선 치료, 그리고 12번의 항암주사라는 새로운 일정이 그에게 주어졌다.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체중이 13kg 줄었고, 온몸의 저항력이 떨어져 로션 하나 마음대로 바를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스럽던”,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만큼” 감정적으로도 참혹했던 시간, 그는 다시 노래를 만들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그 아픔의 와중에도 잠시 정신이 들면 자기감정에 집중하려 애쓰는 스스로에게 놀랐다고 했다. 흘러가는 순간을 잡아채 끝없이 되새기며, 그걸로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만들었다. 어쩌면 본능이었다. 정맥에 구멍을 뚫어 바로 항암제를 투여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케모포트’를 가슴에 달고 46시간 동안 내리 항암주사를 맞는 중에도 노래만큼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온몸이 처지는 걸 느끼면서도 한 소절, 한 음정을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었어요. 어디 옮겨 적을 수 없으니 기억을 하는 수밖에요. 그러면서 스스로한테 얘기했죠. ‘너 정말 천생 딴따라구나.’”
안치환의 얼굴 가득 주름이 잡혔다.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활짝 웃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노래가 있었기에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는 담담한 말이 ‘삶이여, 감사합니다!’라는 글만큼이나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멜로디가 있고 가사가 있어도 곡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주사를 다 맞고 집에 돌아오면 항암제 후유증 탓에 타들어갈 듯 예민해진 손가락 끝으로 기타 줄을 튕겼다. ‘케모포트를 심고 항암을 처음 맞던 날 눈물이 났어/ 왜 왜 내가-/ 깨닫게 됐어 당신이 손잡아 준 날 살아야 한다 (중략)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가 지금 날 지배할 순 없어/ 내 목숨 주인은 암이 아니라 널 이겨낼 나라는 걸 내가 몸으로 보여주겠어’(‘나는 암환자’ 중에서) 같은 음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직접 쓴 가사만큼이나 힘찬 목소리가 곡 전체를 지배하는 이 노래는 ‘늘 푸른 소나무’였던 안치환의 건재를 느끼게 한다.
“두 번째 수술을 끝내고 다시 항암주사를 맞기까지 한 달 정도 휴식기가 있었어요. 사람이 살아는 있어야 주사를 맞으니까요(웃음). 그때 녹음을 했죠. 좋았어요. 기쁘고, 감사하고…. 병원에서는 노래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안 하면 오히려 안 될 거 같았어요.”
빛나는 오늘
그렇게 차곡차곡 새 노래가 쌓이면서 미리 준비해뒀던 앨범 발매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 대신 아예 새로운 11집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안치환은 “투병 중 만든 노래들이 지금 내 삶에 훨씬 맞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며 “내 마음속에 늘 품고 있는 ‘노래하는 자여, 노래로 말하라’는 선언대로 이 노래들을 먼저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주저되는 부분이 있긴 했다. “음악 하는 놈이 암 얘기를 하는 게 혹시라도 동정을 사고 싶은 걸로 보일까 봐서”였다.
“난 그런 게 정말 싫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어요. 내 ‘쉰 살’ 얘기를 하는데 거기 암이 있는 것뿐이죠. 이건 내 체험이고, 그 안에 진실한 감정이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솔직해지면 되는 게 아닐까, 그걸 대중과 함께 나누는 게 바로 내 음악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삶의 골짜기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암환자에게 이 노래가 위로와 격려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고 했다.
돌아보면 안치환의 노래는 늘 그랬다. 자신이 선 자리에 발을 딛고, 그곳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통해 동세대와 호흡했다.
“앨범 제목 ‘50’도 그런 의미죠. ‘나 늙었다’(웃음) 동시에 ‘그래도 나 여기 있다. 여전히 노래 부르고,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다’. 저는 이것이 뮤지션에게 꼭 필요한 자의식이라 생각해요. 밥 딜런, 닐 영 같은 ‘록의 전설’들이 지금도 계속 새 앨범을 내잖아요. 그들 음악엔 그들의 오늘이 담겨 있고요. 저는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한 늘 나의 오늘, 그리고 나와 함께 늙어가는 우리의 오늘을 이야기할 겁니다.”
안치환의 말이다. 그가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며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건 1993년 3집 앨범 ‘Confession’을 내면서부터라고 한다. 대학시절 사회의식 짙은 노래운동 단체에 가입해 음악 활동을 시작한 안치환은 1989년 솔로 데뷔 뒤에도 한동안 100% 자기 음악을 하지 못했다. 그가 음악인생의 진정한 출발점이라 여기는 3집 앨범 첫 곡은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로 시작하는 자작곡 ‘고백’이다.
‘길을 멀은데/ 가야 할 길을 더 멀은데/ 비틀거리는 내 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중략) 허나 눈부신 새날 찾아 이 어둠을 헤치는 사람 되어/ 나로부터 자유로운 내 이 작은 노래에 꿈을 실어/ 노래여 나의 생이여/ 노래여 가난한 내 청춘의 꿈이여’라고 읊조리는 이 곡은, 당시 동구권 붕괴와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큰 변화에 직면해 있던 우리나라 청년 세대의 마음을 울리며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이 앨범에 함께 수록된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라고 노래하는 ‘자유’와 나희덕 시에 곡을 붙인 ‘귀뚜라미’ 등도 널리 사랑받으며 안치환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세상과 공명하고, 또래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고 한다. 안치환은 “이념이 갈 길을 잃고 운동권 시스템이 무너지던 그 시절,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었다. 누구는 나를 변절자라 했지만 ‘노래가 내 생이고, 노래를 통해 눈부신 새날을 찾아갈 것’이라는 고백은 진심이었다. 음악을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진짜 노래, 대중의 마음을 울리고, 그래서 나와 공감하게 하는 노래를 하고 싶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늘 내 음악의 바탕에 있다”고 했다.
노래를 통해 ‘눈부신 새날’을 찾으려는 마음도 여전하다. 이번에 그가 내놓은 11집 앨범 타이틀곡은 정호승 시인의 작품에 직접 곡을 붙인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다. 1997년 발표한 5집 수록곡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만큼이나 힘찬 목소리로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돼라’고 ‘응원’하는 노래다.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
그는 이 메시지를 자기 또래, 함께 쉰을 맞이하는 오랜 팬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이번 앨범을 만드는 동안 제일 오랜 시간 고민하고, 가사를 여러 번 다시 고쳐 썼던 ‘바람의 영혼’도 바로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다. ‘이 하루를 애써 버티는 나를/ 그럼에도 미소 짓는 나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아무도 박수쳐 주지 않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거친 바다 인생의 강물을 건너는 난/ 머물지 않는 바람의 영혼’이라는 가사는 그 자신의 이야기면서, 그 세대 많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인생의 무게가 있잖아요. 겪어온 세월이 있고…. 그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제가 한때는 음반을 내면 60만 장, 80만 장까지 팔렸어요. 그런데 이번에 1500장을 찍겠대요. 제가 거기다 대고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뭘 그렇게 많이 찍어. 1000장만 해’(웃음). 진심이었고, 그게 현실이에요.”
안치환은 “나는 알려진 자리에서 노래를 하고, 내 노래를 듣는 사람은 또 각자 자신의 삶을 살지만, 함께 느끼는 좌절과 고통, 그 안에서 찾는 희망과 다짐이 있을 거다. 그걸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는 2010년 10집 앨범 ‘오늘이 좋다’를 내면서 속지에 ‘제 노래를 통해 위로받는다는 당신께/ 제 노래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의 노래를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는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제 자신이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썼다. 이번에도 “11집을 통해 가장 많이 응원받고 위로받고 격려받은 건 바로 나 자신일 것”이라고 한다. 그 힘을 바탕으로 계속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세상에 이야기를 건네는 게 그의 꿈이다.
다행히 안치환의 몸은 다시 노래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항암치료 후유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기타를 메고 무대 위에 서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앨범 역시 처음 찍은 1500장이 모두 팔리며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가 많음을 증명했다. 그는 “이제 새로운 몸에 적응하면서 건강하게 오래 노래할 준비를 할 것”이라며 “더 건강해져 좋은 노래로 마음의 빚을 갚겠다”고 했다.
가수 안치환이 최근 11집 앨범 ‘50’을 내놓으며 소회를 담아 쓴 글 ‘에필로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65년 태어난 안치환의 나이는 올해 꼭 쉰 살. 인생 반환점을 돌며 ‘50’을 주제 삼아 만든 노래를 묶어 냈으니, 자신의 삶에 먼저 감사를 표하는 게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앨범 수록곡 제목을 찬찬히 읽다 보면 이 인사가 그런 짐작을 넘어서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암환자’ ‘병상에 누워’ ‘레테의 강’ 등 제목 마디마디마다 죽음과 고통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다.
천생 딴따라
안치환은 1980년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자작곡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내놓은 뒤부터 줄곧 삶과 고민을 담은 노래를 발표해왔다. 이번 앨범에도 그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난해 4월, 별생각 없이 건강검진을 했다가 직장암 선고를 받았어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죠. 처음엔 내가 놓인 상황이 낯설더니, 차츰 두려웠어요.”
그것이 11집의 출발점이 됐다. 당시 그는 두 개 앨범의 발표를 앞둔 상태였다. 하나는 자신의 음악인생을 집대성한 6장의 CD(콤팩트디스크)집, 다른 하나는 2010년 10집 발표 뒤 4년간 준비해온 신보였다. 그러나 모든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2번의 수술, 6주간의 방사선 치료, 그리고 12번의 항암주사라는 새로운 일정이 그에게 주어졌다. 쉽지 않았다. 순식간에 체중이 13kg 줄었고, 온몸의 저항력이 떨어져 로션 하나 마음대로 바를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고통스럽던”,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만큼” 감정적으로도 참혹했던 시간, 그는 다시 노래를 만들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그 아픔의 와중에도 잠시 정신이 들면 자기감정에 집중하려 애쓰는 스스로에게 놀랐다고 했다. 흘러가는 순간을 잡아채 끝없이 되새기며, 그걸로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만들었다. 어쩌면 본능이었다. 정맥에 구멍을 뚫어 바로 항암제를 투여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인 ‘케모포트’를 가슴에 달고 46시간 동안 내리 항암주사를 맞는 중에도 노래만큼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온몸이 처지는 걸 느끼면서도 한 소절, 한 음정을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었어요. 어디 옮겨 적을 수 없으니 기억을 하는 수밖에요. 그러면서 스스로한테 얘기했죠. ‘너 정말 천생 딴따라구나.’”
안치환의 얼굴 가득 주름이 잡혔다.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활짝 웃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노래가 있었기에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는 담담한 말이 ‘삶이여, 감사합니다!’라는 글만큼이나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멜로디가 있고 가사가 있어도 곡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주사를 다 맞고 집에 돌아오면 항암제 후유증 탓에 타들어갈 듯 예민해진 손가락 끝으로 기타 줄을 튕겼다. ‘케모포트를 심고 항암을 처음 맞던 날 눈물이 났어/ 왜 왜 내가-/ 깨닫게 됐어 당신이 손잡아 준 날 살아야 한다 (중략)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가 지금 날 지배할 순 없어/ 내 목숨 주인은 암이 아니라 널 이겨낼 나라는 걸 내가 몸으로 보여주겠어’(‘나는 암환자’ 중에서) 같은 음악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직접 쓴 가사만큼이나 힘찬 목소리가 곡 전체를 지배하는 이 노래는 ‘늘 푸른 소나무’였던 안치환의 건재를 느끼게 한다.
“두 번째 수술을 끝내고 다시 항암주사를 맞기까지 한 달 정도 휴식기가 있었어요. 사람이 살아는 있어야 주사를 맞으니까요(웃음). 그때 녹음을 했죠. 좋았어요. 기쁘고, 감사하고…. 병원에서는 노래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안 하면 오히려 안 될 거 같았어요.”
빛나는 오늘
그렇게 차곡차곡 새 노래가 쌓이면서 미리 준비해뒀던 앨범 발매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 대신 아예 새로운 11집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안치환은 “투병 중 만든 노래들이 지금 내 삶에 훨씬 맞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며 “내 마음속에 늘 품고 있는 ‘노래하는 자여, 노래로 말하라’는 선언대로 이 노래들을 먼저 발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주저되는 부분이 있긴 했다. “음악 하는 놈이 암 얘기를 하는 게 혹시라도 동정을 사고 싶은 걸로 보일까 봐서”였다.
“난 그런 게 정말 싫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어요. 내 ‘쉰 살’ 얘기를 하는데 거기 암이 있는 것뿐이죠. 이건 내 체험이고, 그 안에 진실한 감정이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솔직해지면 되는 게 아닐까, 그걸 대중과 함께 나누는 게 바로 내 음악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린 삶의 골짜기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암환자에게 이 노래가 위로와 격려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고 했다.
돌아보면 안치환의 노래는 늘 그랬다. 자신이 선 자리에 발을 딛고, 그곳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통해 동세대와 호흡했다.
“앨범 제목 ‘50’도 그런 의미죠. ‘나 늙었다’(웃음) 동시에 ‘그래도 나 여기 있다. 여전히 노래 부르고,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다’. 저는 이것이 뮤지션에게 꼭 필요한 자의식이라 생각해요. 밥 딜런, 닐 영 같은 ‘록의 전설’들이 지금도 계속 새 앨범을 내잖아요. 그들 음악엔 그들의 오늘이 담겨 있고요. 저는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한 늘 나의 오늘, 그리고 나와 함께 늙어가는 우리의 오늘을 이야기할 겁니다.”
안치환의 말이다. 그가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며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건 1993년 3집 앨범 ‘Confession’을 내면서부터라고 한다. 대학시절 사회의식 짙은 노래운동 단체에 가입해 음악 활동을 시작한 안치환은 1989년 솔로 데뷔 뒤에도 한동안 100% 자기 음악을 하지 못했다. 그가 음악인생의 진정한 출발점이라 여기는 3집 앨범 첫 곡은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로 시작하는 자작곡 ‘고백’이다.
‘길을 멀은데/ 가야 할 길을 더 멀은데/ 비틀거리는 내 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중략) 허나 눈부신 새날 찾아 이 어둠을 헤치는 사람 되어/ 나로부터 자유로운 내 이 작은 노래에 꿈을 실어/ 노래여 나의 생이여/ 노래여 가난한 내 청춘의 꿈이여’라고 읊조리는 이 곡은, 당시 동구권 붕괴와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큰 변화에 직면해 있던 우리나라 청년 세대의 마음을 울리며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이 앨범에 함께 수록된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라고 노래하는 ‘자유’와 나희덕 시에 곡을 붙인 ‘귀뚜라미’ 등도 널리 사랑받으며 안치환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세상과 공명하고, 또래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고 한다. 안치환은 “이념이 갈 길을 잃고 운동권 시스템이 무너지던 그 시절,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었다. 누구는 나를 변절자라 했지만 ‘노래가 내 생이고, 노래를 통해 눈부신 새날을 찾아갈 것’이라는 고백은 진심이었다. 음악을 수단으로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나는 진짜 노래, 대중의 마음을 울리고, 그래서 나와 공감하게 하는 노래를 하고 싶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늘 내 음악의 바탕에 있다”고 했다.
노래를 통해 ‘눈부신 새날’을 찾으려는 마음도 여전하다. 이번에 그가 내놓은 11집 앨범 타이틀곡은 정호승 시인의 작품에 직접 곡을 붙인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다. 1997년 발표한 5집 수록곡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만큼이나 힘찬 목소리로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돼라’고 ‘응원’하는 노래다.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
그는 이 메시지를 자기 또래, 함께 쉰을 맞이하는 오랜 팬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이번 앨범을 만드는 동안 제일 오랜 시간 고민하고, 가사를 여러 번 다시 고쳐 썼던 ‘바람의 영혼’도 바로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다. ‘이 하루를 애써 버티는 나를/ 그럼에도 미소 짓는 나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아무도 박수쳐 주지 않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꿀 수 있는 것만으로도/ 거친 바다 인생의 강물을 건너는 난/ 머물지 않는 바람의 영혼’이라는 가사는 그 자신의 이야기면서, 그 세대 많은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인생의 무게가 있잖아요. 겪어온 세월이 있고…. 그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제가 한때는 음반을 내면 60만 장, 80만 장까지 팔렸어요. 그런데 이번에 1500장을 찍겠대요. 제가 거기다 대고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뭘 그렇게 많이 찍어. 1000장만 해’(웃음). 진심이었고, 그게 현실이에요.”
안치환은 “나는 알려진 자리에서 노래를 하고, 내 노래를 듣는 사람은 또 각자 자신의 삶을 살지만, 함께 느끼는 좌절과 고통, 그 안에서 찾는 희망과 다짐이 있을 거다. 그걸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는 2010년 10집 앨범 ‘오늘이 좋다’를 내면서 속지에 ‘제 노래를 통해 위로받는다는 당신께/ 제 노래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의 노래를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는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제 자신이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썼다. 이번에도 “11집을 통해 가장 많이 응원받고 위로받고 격려받은 건 바로 나 자신일 것”이라고 한다. 그 힘을 바탕으로 계속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세상에 이야기를 건네는 게 그의 꿈이다.
다행히 안치환의 몸은 다시 노래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항암치료 후유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기타를 메고 무대 위에 서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앨범 역시 처음 찍은 1500장이 모두 팔리며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가 많음을 증명했다. 그는 “이제 새로운 몸에 적응하면서 건강하게 오래 노래할 준비를 할 것”이라며 “더 건강해져 좋은 노래로 마음의 빚을 갚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