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왼쪽)가 정치참여 애플리케이션(앱) 명칭 공모전을 홍보하는 동영상에 등장, 이른바 ‘로봇 연기’를 선보였다.
예를 들어 2007년 시대정신은 ‘경제’였다. ‘샐러리맨 신화’를 앞세운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에게 이 흐름이 투영됐다. 2012년에는 여야 모두 시대 흐름인 ‘복지’와 ‘경제민주화’에 주목했다. 그런데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는 야권이 공을 들이던 이 의제를 오히려 적극 흡수해 중도층 공략에 성공했다. 즉 시대정신을 빨리 읽는 것은 총선과 대선을 향한 주춧돌을 놓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은 어떨까.
여의도연구원의 ‘이데올로기 혁신’
각 정당별 상황을 살펴보면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원(여연)이 풍랑 속에서 비교적 꾸준히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여연 원장이 공석인 이유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를 영입하려다 당내 ‘친박근혜계’의 반발에 부딪쳐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다. 4월 재·보궐선거(재보선)를 앞두고 있어 김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당분간 여연 원장 인선 문제를 굳이 부각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원장 부재에도 여연이 최근 진행하는 토론회와 보고서는 주목받고 있다. 2월 여연은 웹진을 통해 ‘대통령 지지도와 국정운영’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 3년 차를 맞아 지지율이 흔들리던 시점과 맞물려 주목받았고, 소통과 변화를 강조한 쓴소리를 쏟아내 관심을 끌었다.
또 여연은 지난 연말부터 이른바 ‘이데올로기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김 대표와 김문수 보수혁신특별위원장이 주장하는 ‘보수혁신’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김 대표가 강조하는 보수혁신은 ‘보수가 앞장서서 정치권의 잘못된 관행을 타파한다’는 의미다. 즉 정치혁신이나 새로운 문화 조성에 진보가 아닌, 보수세력이 앞장서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4일 ‘여연브리프’에서는 보수정당이 기존 가치를 고집하지 않는 ‘이념적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 보수당이 진보정당의 가치까지 일부 받아들이고, ‘모두를 위한 정당’ ‘국가 이익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형성한 사례를 참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여연의 이런 내용은 새누리당 소속 차기 대선주자들이 이른바 ‘보수세력’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리한 ‘강보수 전략’을 구축하면 안 된다는 일각의 비판과 유사한 내용이다.
여연은 최근 ‘발랄한 히트작품’도 만들었다. 정치참여 애플리케이션(앱) 명칭 공모전을 홍보하는 50초 분량 동영상이 야당에서도 호평할 정도로 인기를 끈 것. 이 동영상에는 김 대표가 직접 등장해 이른바 ‘로봇 연기’를 선보인다. 트렌치코트를 바람에 날리며 등장한 김 대표가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라는 어색한 말투로 묻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이런 시도는 4·29 재보선을 앞두고 젊은 층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한편 김 대표는 전당대회 이전 ‘통일경제교실’을 통해 정책 네트워크 결성을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지도부 입성 후에는 이 모임에서 한발 물러났다. 하지만 만약 4월 총선 이후 김 대표의 위상이 높아지고 대선에 대한 관심도 커진다면, 당 차원은 물론 본인 정치를 위한 싱크탱크도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역대 새누리당 대선주자들은 당 차원에서 여연의 지원을 받고, 개인적으로도 싱크탱크를 구축해 주요 공약과 선거 전략을 준비했다. 박 대통령은 국가미래연구원,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제정책연구원을 통해 각 분야 전문가를 영입하고 시대정신과 맞물린 공약을 마련했다.
새정연 민주정책연구원의 ‘중원장악론’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이 3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미래연구소’ 창립식 및 창립기념 토론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민연은 최근 ‘중원장악 보고서’를 통해 이념적 중도, 중산층, 지리적 중원(수도권 및 충청권), (전통적) 중년 등 네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른바 ‘진보’만 강조할 게 아니라, 이념을 떠나 중간 지대를 공략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이 보고서에서는 새정연이 경제에서는 포용적 성장, 복지에서는 유연한 전략을 펼쳐야 하고, 특히 연령대별로 2030세대보다 40~60대를 잡는 데 더 집중할 것을 제안했다.
민연은 또 기존 야당의 금기를 깼다. 이른바 ‘저쪽 사람’의 논리도 들어보는 강연을 진행하는 것. 이명박 정부의 핵심 인사였던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의 초청 강연을 진행한 데 이어 조만간 삼성경제연구소, 현대경제연구원 소속 전문가도 부를 것으로 알려졌다.
민연의 이런 시도는 새정연 문재인 대표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 대표는 최근 ‘새벽 경제공부’를 진행하고, 실물경제 분야 각 인사와의 만남도 대폭 확대했다. 더불어 외부에서 영입한 우석훈 민연 부원장도 주목받고 있다. ‘88만원 세대’ 저자인 우 부원장은 최근 야당에서 이념 논쟁뿐 아니라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밖에도 야권 대선후보군을 보면 문 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싱크탱크격인 ‘담쟁이포럼’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문 대표는 현재 당 지도부이므로 별도의 개인 조직을 공식 가동하지 않고 있다. 당분간은 민연의 지원을 받을 전망이다.
안철수 전 새정연 대표의 경우 대선에서 구축된 싱크탱크인 정책 네트워크 ‘내일’ 활동에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그는 최근 장하성 고려대 교수와 ‘한국경제 해법 찾기’ 시리즈 좌담회를 시작했고, 서울에 이어 부산을 방문하는 등 전국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새정연 초·재선 의원 20여 명이 모인 ‘더 좋은 미래’가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로 확대됐다. 이 연구소는 조직을 확대하면서 전문가 그룹을 대폭 영입했는데, 이사장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출신 최병모 변호사, 이사에는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이름을 올렸다. 운영위원에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도 참여했다.
일각에서는 정당의 싱크탱크가 특정 대선주자 또는 지도부 입맛에 따라 운영될 것을 우려한다. 새누리당에서 여연 원장으로 박세일 교수를 영입하려 하자 서청원 최고위원 등이 김 대표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새정연도 민연의 ‘중도론’에 대해 모두가 동의한 분위기는 아니다. 일부 의원은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자칫하면 싱크탱크 활동이 계파 싸움과 노선 투쟁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싱크탱크가 대한민국 시대정신 연구와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강력한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 ‘준비되지 않은 대선주자’가 대통령이 되거나, ‘선심성 부실 공약’이 추진되면 결국 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