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하는 1930년대 경성 모던보이 이상의 소설 ‘날개’는 ‘날개야 돋아라’로 끝난다. 당시 가장 신식 건물이던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 올라간 주인공은 한때 있었던 날개가 다시 돋아나는 간지러움을 느끼며 날아오른다. 여기 21세기 브로드웨이의 ‘날개’가 있다. 2015년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상 주요 부문 4개를 석권한 문제작, ‘버드맨’이다.
‘버드맨’은 영화광이 아닌 일반 관객에겐 좀 어리둥절할 만한 영화다. 전문가에겐 신선한 충격을, 대중에겐 낯선 감각을 선사한다. 촬영법이 우선 그렇다. 이야기 전체가 한 번의 컷도 없이 촬영된 듯 보이는 ‘롱테이크’ 기법이 눈에 띈다. 물론 한 번도 컷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만 관객이 보기에 카메라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카메라로 이어달리기를 하는 형국이다.
그 카메라가 누비는 무대는 바로 브로드웨이 연극판이다. 얌전히 연극무대를 비추는 게 아니다. 카메라는 무대 안팎과 대기실, 심지어 무대 위에 놓인 조명 부스까지 훑고 다닌다. 그 과정에서 배우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까지 모두 까발린다. 주연배우는 대기실에서 팬티만 입은 채 앉아 있고, 의상실 구석에서 일부 배우는 성기까지 노출한다. 그들의 몸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제작자의 불안, 평생 연극판에 있었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연기파 배우의 고민, 데뷔작 무대를 앞두고 신경쇠약 직전인 여배우 내면까지 속속들이 공개한다. 말하자면 영화 ‘버드맨’은 메타 영화, 즉 영화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주인공 버드맨이 과거 슈퍼히어로 ‘버드맨’역을 맡았던 유명 액션히어로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작품 주연을 맡은 배우 마이클 키턴(리암 역)은 영화 ‘배트맨’ 시리즈 주인공으로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주름 잡았다. 그런데 그는 어느새 자기 말마따나 ‘백혈병에 걸린 칠면조’ 꼴로 늙어버렸다. 이미 할리우드 영화판은 그 같은 ‘올드보이’들을 뒤로한 채 새로운 영웅들과 신나게 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버드맨’은 연극을 통해 제2의 연기 인생을 살아보고자 한다. 제작, 연출, 주연까지 맡은 이 작품은 그가 기획한 인생의 반환점이자 반등 지점인 셈이다. 하지만 목표 달성이 쉽지는 않다. 브로드웨이 연극판은 한때 유명했던 배우가 무대를 기웃거리는 데 인색하다. 유명 연극평론가는 “당신이 어떤 연극을 하든 악평을 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다. 주연배우도 말썽이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유명 배우는 예술성과 미친 짓을 혼동하듯 무대를 흔들어놓는다. 게다가 스태프로 참여한 딸은 마약에 빠져 있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이 불안과 동요는 ‘버드맨’이라는 또 다른 자아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낮게 깔린 음성으로 등장하는 이 존재는 리암을 비난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며, 때로는 괴롭힌다.
영화는 첫 공연을 올리기 전 닷새 동안 이어지는 프리뷰 무대를 숨 가쁘게 보여준다. 극도의 긴장감이 가득 찬 공간은 새처럼 자유롭게 부유하는 카메라 워킹과 함께 리드미컬한 선율을 선사한다.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등장했다 눈앞에 나타나는 드럼 연주 장면도 일품이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연주자는 실제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인물의 환각인지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꿈과 현실의 뒤섞임이 마술적 사실주의 축제를 만들어낸다. 결국 그는 날아올랐을까, 추락했을까.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삶의 한 단면, 영화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작품 ‘버드맨’이다.
‘버드맨’은 영화광이 아닌 일반 관객에겐 좀 어리둥절할 만한 영화다. 전문가에겐 신선한 충격을, 대중에겐 낯선 감각을 선사한다. 촬영법이 우선 그렇다. 이야기 전체가 한 번의 컷도 없이 촬영된 듯 보이는 ‘롱테이크’ 기법이 눈에 띈다. 물론 한 번도 컷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만 관객이 보기에 카메라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카메라로 이어달리기를 하는 형국이다.
그 카메라가 누비는 무대는 바로 브로드웨이 연극판이다. 얌전히 연극무대를 비추는 게 아니다. 카메라는 무대 안팎과 대기실, 심지어 무대 위에 놓인 조명 부스까지 훑고 다닌다. 그 과정에서 배우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까지 모두 까발린다. 주연배우는 대기실에서 팬티만 입은 채 앉아 있고, 의상실 구석에서 일부 배우는 성기까지 노출한다. 그들의 몸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제작자의 불안, 평생 연극판에 있었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연기파 배우의 고민, 데뷔작 무대를 앞두고 신경쇠약 직전인 여배우 내면까지 속속들이 공개한다. 말하자면 영화 ‘버드맨’은 메타 영화, 즉 영화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주인공 버드맨이 과거 슈퍼히어로 ‘버드맨’역을 맡았던 유명 액션히어로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작품 주연을 맡은 배우 마이클 키턴(리암 역)은 영화 ‘배트맨’ 시리즈 주인공으로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주름 잡았다. 그런데 그는 어느새 자기 말마따나 ‘백혈병에 걸린 칠면조’ 꼴로 늙어버렸다. 이미 할리우드 영화판은 그 같은 ‘올드보이’들을 뒤로한 채 새로운 영웅들과 신나게 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버드맨’은 연극을 통해 제2의 연기 인생을 살아보고자 한다. 제작, 연출, 주연까지 맡은 이 작품은 그가 기획한 인생의 반환점이자 반등 지점인 셈이다. 하지만 목표 달성이 쉽지는 않다. 브로드웨이 연극판은 한때 유명했던 배우가 무대를 기웃거리는 데 인색하다. 유명 연극평론가는 “당신이 어떤 연극을 하든 악평을 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다. 주연배우도 말썽이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유명 배우는 예술성과 미친 짓을 혼동하듯 무대를 흔들어놓는다. 게다가 스태프로 참여한 딸은 마약에 빠져 있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이 불안과 동요는 ‘버드맨’이라는 또 다른 자아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낮게 깔린 음성으로 등장하는 이 존재는 리암을 비난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며, 때로는 괴롭힌다.
영화는 첫 공연을 올리기 전 닷새 동안 이어지는 프리뷰 무대를 숨 가쁘게 보여준다. 극도의 긴장감이 가득 찬 공간은 새처럼 자유롭게 부유하는 카메라 워킹과 함께 리드미컬한 선율을 선사한다.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등장했다 눈앞에 나타나는 드럼 연주 장면도 일품이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연주자는 실제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인물의 환각인지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꿈과 현실의 뒤섞임이 마술적 사실주의 축제를 만들어낸다. 결국 그는 날아올랐을까, 추락했을까.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삶의 한 단면, 영화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작품 ‘버드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