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극장가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님아’) 열풍이 불고 있다. 98세 조병만 할아버지와 89세 강계열 할머니 부부의 삶과 사랑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11월 27일 개봉 당시만 해도 이 작품의 흥행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입소문을 타고 관객 수가 점점 늘면서 ‘님아’는 12월 11일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인터스텔라’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 정면승부를 벌인 결과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12월 17일 현재 누적 관객 수는 149만 3583명. 머지않아 ‘워낭소리’(누적 관객 수 296만여 명) 기록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노부부의 자극적이지 않은 사랑 이야기에 많은 이가 공명하는 건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수록 가족에게서 안락함을 찾으려 한다. 정치는 불안하고, 경기는 얼어붙고, 직장인은 구조조정에 내몰리고, 청년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분노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어디에 의지하겠나. 한평생 해로한 노부부의 모습이 그들에게 안정감과 위로를 주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곽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불안과 분노, 가족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욕망’의 기저에는 세월호 사고의 충격이 놓여 있다고도 분석했다.
배병삼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도 “세월호 사고는 대한민국을 집단우울증에 빠뜨렸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남아 있다”고 했다. “2014년을 설명할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그것은 세월호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집단우울증 그리고 희망 발견
2014년은 그렇게 잔인했다.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은 더는 전과 같을 수 없어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따른 어린 학생이었고, 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은 평일 대낮 TV 화면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사고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정부와 사회의 무능, 무책임도 뼈아팠다.
그럼에도 바로 그 사건을 통해 희망을 본 이가 있다. 세월호 관련 기록 수집과 정리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다. 김 교수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이 모여 사는 경기 안산시 고잔동(예술대학로 4길)에 ‘4·16 기억저장소’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관련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꾸준히 유가족과 소통해온 그는 “‘세월호 유족’(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을 지칭하는 김 교수의 표현)은 우리 국민의 평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집단이다. 각기 지지정당이 다르고, 경제적 상황도 다르다. 그런 이들이 사고 수습 과정에서 공동의 지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관철하려고 힘을 모으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고 밝혔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세월호 유족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다른 국내 대형 참사의 유족들과 다르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보상이나 지원, 특혜도 바라지 않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관련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거부 의사를 밝혔다.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사고 원인 규명과 그 결과에 기반을 둔 재발방지 대책 마련, 두 가지뿐이다.
김 교수는 “세월호 유족 상당수는 현재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 지향을 유지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이타적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사회는 세월호 유족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사회적 기억은 △슬픔과 분노에서 △위안과 문제 인식 단계를 거쳐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기억의 다음 단계는 △상징과 실천 혹은 △망각과 개인화로 나뉠 수 있는데, 지금 세월호 유족이 바로 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 위안과 기쁨
2014년 절망의 구렁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례는 또 있다. 육군 28사단 의무병이던 윤모 일병이 선임들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가혹행위를 당하다 숨진 이른바 ‘윤 일병 사건’이다. 군은 4월 7일 윤 일병 사망 후 진상조사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야기한 참혹한 학대 실상을 파악하고도 이를 은폐했다. 군검찰은 가해자들에게 상해치사 혐의를 적용했고, 유족에게는 윤 일병이 단순폭행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렸다.
그러나 7월 말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사건 전말을 폭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여론이 들끓었고, 군 안팎에서 관련 제보가 잇따랐다. 결국 재조사가 시작돼 10월 말 1심 법원은 가해자 4명에게 징역 25∼45년을 선고한 상태다. 병영문화 개선을 위한 사회 전반의 노력도 시작돼,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는 최근 옴부즈맨 제도 도입과 군 사법제도 개혁 등을 포함하는 병영문화혁신안을 내놓았다.
임 소장은 “우리 청년들이 여전히 군대 내에서 비인권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알려진 뒤 많은 국민이 공분하는 모습을 보며 사회 변화를 실감했다. 예전에는 군인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군인에게도 인권이 있으며,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안보도 강화된다는 데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한계도 남아 있다. 임 소장은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군 수뇌부는 변화의 필요성을 알지만 말단 조직은 여전히 복지부동 상태임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 노력하면 분명히 군도 달라질 것이고,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 건 큰 성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윤 일병 사망이 선임병들의 폭행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이 내용을 상부에 보고해 사건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김재량 병장의 존재도 희망의 근거가 된다. 자신이 입을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실을 알린 이 청년은 최근 ‘참여연대 의인상’을 받았다.
2014년 한 해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건 분명하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안전사고가 빈발하고 사회 지도층의 성추문과 ‘갑질’ 논란이 끊이지 않아 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고 평했다. 곽금주 교수도 “최근의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비롯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던 1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희망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위안과 기쁨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유교 고전 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배병삼 영산대 교수는 “맹자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기희(幾希)’라고 했다. 매우 적다는 뜻”이라며 “많이 봐야 1~2%에 불과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를 어떻게 더욱 계발할 것인가, 나아가 그것을 통해 어떻게 사회 평화와 질서를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이 유학자들의 오랜 고민이었다”고 소개했다. 어쩌면 구성원 다수가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는 지금, 우리 사회도 1~2%에 불과한 희망의 싹을 어떻게 키우고 성숙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주간동아’는 송년호를 맞아 2014년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이들이 있어, 그리고 더 많은 희망의 증거가 있어 우리는 상처와 아픔에도 새해를 향해 다시 한 번 성큼성큼 걸어갈 용기를 낸다. 이제 책장을 넘겨, 올 한 해 우리를 웃게 한 얼굴들을 만나보자.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노부부의 자극적이지 않은 사랑 이야기에 많은 이가 공명하는 건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수록 가족에게서 안락함을 찾으려 한다. 정치는 불안하고, 경기는 얼어붙고, 직장인은 구조조정에 내몰리고, 청년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분노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어디에 의지하겠나. 한평생 해로한 노부부의 모습이 그들에게 안정감과 위로를 주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곽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한 ‘불안과 분노, 가족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욕망’의 기저에는 세월호 사고의 충격이 놓여 있다고도 분석했다.
배병삼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도 “세월호 사고는 대한민국을 집단우울증에 빠뜨렸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남아 있다”고 했다. “2014년을 설명할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그것은 세월호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한 장면.
2014년은 그렇게 잔인했다.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은 더는 전과 같을 수 없어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따른 어린 학생이었고, 이들이 수장되는 모습은 평일 대낮 TV 화면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사고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정부와 사회의 무능, 무책임도 뼈아팠다.
그럼에도 바로 그 사건을 통해 희망을 본 이가 있다. 세월호 관련 기록 수집과 정리 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다. 김 교수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이 모여 사는 경기 안산시 고잔동(예술대학로 4길)에 ‘4·16 기억저장소’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관련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꾸준히 유가족과 소통해온 그는 “‘세월호 유족’(단원고 희생자 유가족을 지칭하는 김 교수의 표현)은 우리 국민의 평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집단이다. 각기 지지정당이 다르고, 경제적 상황도 다르다. 그런 이들이 사고 수습 과정에서 공동의 지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관철하려고 힘을 모으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고 밝혔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세월호 유족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다른 국내 대형 참사의 유족들과 다르다. 이들은 어떤 종류의 보상이나 지원, 특혜도 바라지 않고, 정치권을 중심으로 관련 논의가 이뤄질 때마다 거부 의사를 밝혔다.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사고 원인 규명과 그 결과에 기반을 둔 재발방지 대책 마련, 두 가지뿐이다.
김 교수는 “세월호 유족 상당수는 현재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 지향을 유지하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이타적 삶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 사회는 세월호 유족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사회적 기억은 △슬픔과 분노에서 △위안과 문제 인식 단계를 거쳐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기억의 다음 단계는 △상징과 실천 혹은 △망각과 개인화로 나뉠 수 있는데, 지금 세월호 유족이 바로 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 위안과 기쁨
‘윤 일병 사건’ 내용을 상부에 보고해 ‘참여연대 의인상’을 받은 김재량 병장.
그러나 7월 말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사건 전말을 폭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여론이 들끓었고, 군 안팎에서 관련 제보가 잇따랐다. 결국 재조사가 시작돼 10월 말 1심 법원은 가해자 4명에게 징역 25∼45년을 선고한 상태다. 병영문화 개선을 위한 사회 전반의 노력도 시작돼,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는 최근 옴부즈맨 제도 도입과 군 사법제도 개혁 등을 포함하는 병영문화혁신안을 내놓았다.
임 소장은 “우리 청년들이 여전히 군대 내에서 비인권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알려진 뒤 많은 국민이 공분하는 모습을 보며 사회 변화를 실감했다. 예전에는 군인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군인에게도 인권이 있으며,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안보도 강화된다는 데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한계도 남아 있다. 임 소장은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군 수뇌부는 변화의 필요성을 알지만 말단 조직은 여전히 복지부동 상태임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 노력하면 분명히 군도 달라질 것이고,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 건 큰 성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윤 일병 사망이 선임병들의 폭행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이 내용을 상부에 보고해 사건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김재량 병장의 존재도 희망의 근거가 된다. 자신이 입을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실을 알린 이 청년은 최근 ‘참여연대 의인상’을 받았다.
2014년 한 해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건 분명하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안전사고가 빈발하고 사회 지도층의 성추문과 ‘갑질’ 논란이 끊이지 않아 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었다”고 평했다. 곽금주 교수도 “최근의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비롯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이 끊이지 않았던 1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희망이 있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위안과 기쁨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유교 고전 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배병삼 영산대 교수는 “맹자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기희(幾希)’라고 했다. 매우 적다는 뜻”이라며 “많이 봐야 1~2%에 불과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를 어떻게 더욱 계발할 것인가, 나아가 그것을 통해 어떻게 사회 평화와 질서를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이 유학자들의 오랜 고민이었다”고 소개했다. 어쩌면 구성원 다수가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는 지금, 우리 사회도 1~2%에 불과한 희망의 싹을 어떻게 키우고 성숙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주간동아’는 송년호를 맞아 2014년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이들이 있어, 그리고 더 많은 희망의 증거가 있어 우리는 상처와 아픔에도 새해를 향해 다시 한 번 성큼성큼 걸어갈 용기를 낸다. 이제 책장을 넘겨, 올 한 해 우리를 웃게 한 얼굴들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