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중국 우시 생산법인 공장의 D램 생산라인 전경.
그때까지만 해도 SK하이닉스의 고전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SK하이닉스는 개인용 컴퓨터(PC)용 D램 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등장으로 PC용 D램 수요가 감소해 가격이 개당 1달러 이하까지 뚝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모바일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로의 빠른 전환이 필요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설비·장비 투자가 필요했다. 2011년 말 SK그룹으로 인수되기 전 채권단 관리체제하에서 신규 투자가 거의 없었고, 매각 후에도 인수 대금 때문에 투자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업계 전문가는 이렇게 앞날을 장담했다. 실제로 같은 해 4분기 들어 SK하이닉스는 흑자로 전환했다.
예상치 훨씬 웃도는 실적
당시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는 미세 공정을 빨리 개발해 대규모 양산 투자를 하면 12인치 웨이퍼(반도체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 당 생산할 수 있는 칩 개수가 늘어나 생산원가가 줄어든다. 이를 기반으로 생산단가를 낮춘 선발 업체가 같은 용량의 칩을 다른 업체보다 먼저 싸게 공급하면, 아직 생산단가를 낮추지 못한 경쟁사는 적자를 내게 된다. 이렇게 끝없이 기술 및 가격 경쟁을 하면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다 보니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치킨게임 양상을 보였다. 삼성전자가 20여 년간 메모리 업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세 공정 기술 개발 속도가 빨라 업계에서 가장 먼저 메모리 반도체 가격을 낮춰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년간 치킨게임이 이어지면서 2009년 독일 인피니언테크놀로지스에이지 계열 D램 메모리 업체 키몬다가 파산했다. 2012년부터는 일본 엘피다 메모리, 대만 프로모스와 파워칩 등이 줄줄이 파산 신청을 하거나 공장을 매각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마이크론이 엘피다 메모리 메모리를 인수하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3강 체제가 굳어졌다. 대만 난야 테크놀로지와 윈본드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로 시장이 정리됐다.
업계 구조조정이 끝나면서 메모리 업계에는 서로 눈치를 보며 수익성을 조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2012년 말 전동수 당시 삼성전자 DS총괄 메모리사업부 사장은 “(경쟁사가 줄어) 시장 예측력이 올라가고 ‘자율적 보정 능력’이 커지면서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 현상은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치킨게임 종료를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치킨게임이 종료됐지만 메모리 업계는 호황을 누렸다. 특히 지난해 PC용 D램(DDR3 2기가비트 256Mx8 1333MHz 기준) 가격이 1월 0.92달러에서 12월 최고 2.03달러까지 치솟았다. 업계에서 자발적으로 공급을 조절하면서 가격 상승을 유인한 측면도 있지만, 호황은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다. 가장 큰 요인은 예측치보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2년 전 태블릿PC 시장이 성장하면서 PC 출고량이 2013년 10.6%, 올해 15.3%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3분기 조사 결과 PC 시장은 지난해와 비교해 0.5% 감소하는 데 그쳐 예측이 크게 빗나갔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는 매년 수요를 계산해 연간 ‘비트그로스(Bit Growth)’ 전망치를 내놓는다. 메모리 반도체는 칩 하나당 용량이 달라 단순히 칩 생산량만 집계하면 실제 전 세계적인 저장용량 수요와 차이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메모리 저장단위인 비트(bit)를 기준으로 전자업계가 필요로 하는 저장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생산 계획을 짠다. 삼성전자는 PC시장 수요가 빠르게 줄어들 것으로 보고 지난해 초 PC 제조사들에 PC용 D램 생산 계획 축소 방침을 통보했다. 이 때문에 PC 업계에서 D램 확보 전쟁이 벌어졌고 PC용 D램 가격은 고공행진을 지속했다. 이 덕에 적자를 이어가던 대만 난야 테크놀로지와 이노테라가 순식간에 기사회생해 지난해 1월 흑자 전환한 뒤 지금까지 7분기 연속 이익을 내고 있다.
기술력 바탕으로 수익성 극대화
SK하이닉스가 개발한 6GB 모바일 메모리 반도체 ‘LP DDR (더블데이터레이트)3’(왼쪽)와 삼성전자가 내놓은 64GB DDR4 서버용 D램 모듈 제품.
호황은 투자를 부른다. 선발 업체들은 고사한 줄 알았던 경쟁사가 다시 시장에 등장하면서 또다시 양산 경쟁을 벌일 동기가 생겼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투자를 재개한 경기 화성 17라인 공장에 메모리라인을 구축한다. 이곳을 시스템 반도체 공장(팹) 전용으로 쓴다는 계획을 바꿔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하이브리드로 사용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경기 이천에 건설 중인 M14 신규 D램 공장을 내년부터 가동한다. 엘피다 메모리를 인수한 마이크론은 히로시마팹에 1000억 엔(약 9479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투자가 완료되면 모바일용 D램 생산 능력이 20% 올라간다. 대만 이노테라도 투자를 재개하며 내년 PC용 D램 투자액을 올해보다 2배 늘린 500억 대만달러(약 1조7545억 원)로 높였다. 웨이퍼 생산량은 10만 장에서 8만~9만 장으로 줄어들지만, 미세 공정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동일 면적당 칩 생산 개수가 많아져 생산성은 높아진다.
그렇다면 양사의 이 같은 투자 붐이 제2 치킨게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1990년대 20여 개에 달하던 반도체 회사가 5~6개로 정리돼 굳이 출혈 경쟁을 할 필요성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메모리 수요를 이끄는 세트 업계 시황도 괜찮다.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는 낸드플래시 등장으로 퇴출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데이터 트래픽 증가로 오히려 수혜를 보고 있다. HDD 1위 업체 씨게이트는 지난해보다 스토리지 판매 용량이 23% 증가하며 3분기 매출액 37억9000만 달러(약 3조9791억 원)를 거둬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는 올해 PC, 모바일, 서버를 합한 D램 시장 규모를 1GB 기준으로 환산해 전 세계 수요를 예측했을 때 올 하반기 263억4900만 개, 공급은 249억2400만 개로 추산했다. 공급보다 수요가 넘치는 상황이다. 낸드플래시도 공급량에 비해 수요 증가율이 높다. 하반기 낸드플래시 수요는 299만8500만 개, 공급은 294억5800만 개로 예상된다. 역시 수급이 달린다.
내년 비트그로스 성장률도 업계 생산 능력 증가량보다 상회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준호 SK하이닉스 코퍼레이트센터장(사장)은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내년 D램 비트그로스는 20% 중반, 낸드플래시는 40%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측은 비트그로스의 실적이 더 높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메모리시장 호황과 더불어 삼성전자는 3D 낸드플래시 ‘V낸드’와 20나노 8GB DDR4 D램을 세계 최초로 양산하고, SK하이닉스는 25나노 4GB DDR4 D램 기반 16GB 메모리 모듈을 세계 최초로 공급하는 등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익성 극대화를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