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3

..

그녀의 굴곡진 운명을 예견한 듯

피카소가 그린 도라 마르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4-11-17 10: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그녀의 굴곡진 운명을 예견한 듯

    ‘울고 있는 여인’, 파블로 피카소, 1937년, 60×49cm,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그림이 모델의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면, 피카소가 그린 ‘울고 있는 여인’의 모델 도라 마르야말로 이 그림에 의해 운명이 규정된 경우일 것이다. 1936년 겨울 피카소는 늘 가던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데 프레의 카페 ‘되 마고’에서 새로운 얼굴을 만났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던 사진작가 겸 화가 도라 마르였다. 54세의 대화가는 28세의 아름답고 패기만만한 여성 도라에게 금방 시선을 빼앗겼다. 당시 도라는 패션 및 광고 사진을 찍으면서 틈틈이 작업한 초현실주의 느낌의 파리 거리 사진들로 젊은 예술가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던 인물이다. 도라가 프랑스어 못지않게 스페인어에 능통하다는 점도 스페인 출신인 피카소에게는 매혹적이었다. 당시 피카소는 얼마 전 자신의 딸을 낳은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라에게 빠져든 피카소의 눈에는 애인도 딸도 들어오지 않았다.

    피카소는 1937년 높이 3.5m, 길이 7.8m에 달하는 대작 벽화 ‘게르니카’를 그리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을 기록할 사진작가로 도라를 지목했다. 도라는 몇 달간 피카소의 아틀리에에서 매일 12시간 이상 피카소가 벽화를 그리는 장면을 단계별로 촬영했다. 이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현재 ‘게르니카’와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 레이나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도라는 ‘게르니카’에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죽은 아이를 안은 채 울고 있는 여인이 도라를 모델로 한 것이다.

    ‘게르니카’를 흑백으로 그린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벽화 작업을 마친 피카소는 화려한 원색을 사용해 ‘게르니카’의 울고 있는 여인을 캔버스에 옮겼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도라였다. 피카소는 “도라는 내게 ‘울고 있는 여인’이다. 나는 늘 도라를 괴로워하는 표정이나 울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것은 그녀를 괴롭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도라 본인이 언제나 그처럼 슬픈 모습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카소와 도라의 관계는 9년이나 지속됐다. 그러나 이 관계를 거치면서 재능 있는 사진작가, 화가, 시인이던 도라의 삶은 철저히 망가졌다. 도라는 피카소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줄곧 사랑했지만, 1943년 피카소가 새로운 애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자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도라에게 자신의 그림 몇 점과 메네르브에 있는 별장을 주고 새로운 애인 프랑수아즈를 집에 들였다. 9년 전, 도라를 만났을 때 옛 애인 마리 테레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피카소가 그린 ‘울고 있는 여인’의 주인공은 온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흰 눈물을 캔버스 가득 흘리고 있다. 결국 이 초상화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여자로서 도라의 굴곡진 운명을 예언한 작품이 돼버렸다. 도라는 오랫동안 조현병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1990년과 95년에는 파리와 바르셀로나에서 성황리에 그림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팔순에 가까운 나이였다. 너무도 긴 세월을 어두운 늪 속에서 헤매야 했던 그는 피카소를 만나기 전의 전도유망한 사진작가의 위치로는 결코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마치 태양에 매혹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날개를 잃어버린 이카로스처럼, 피카소에 의해 희생돼버렸던 것이다. 그는 1997년 타계할 때까지 피카소에게 받았던 그림과 별장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피카소가 그린 ‘고양이와 함께 있는 도라의 초상’은 2006년 소더비 경매에서 익명의 러시아 수집가에게 9500만 달러에 팔려 소더비 역사상 두 번째로 비싸게 낙찰된 그림으로 기록됐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