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계는 사람이나 장비, 자재를 올려 작업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하는 가시설물이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정부로부터 비계 등 가설기자재의 안전 감사와 인증 업무 권한을 위임받은 사단법인이 직접 신형 국산 비계의 설계를 맡고 제작까지 주도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이 법인은 최근 안전인증 소홀로 영업정지까지 받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실제 신형 비계 제작을 맡은 회사와 다툼을 벌인 후 2차 제작업체도 자신들이 선정했다. 또 2차 제작업체는 5월까지 인증을 받지 않은 가설기자재를 만들어 팔다 당국에 적발됐지만 당국의 처분조차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작업자 생명과 직결되는 가시설물
비계는 사람이나 장비, 자재 등을 올려 작업할 수 있게 임시로 설치하는 가시설물로, 여기에는 추락 및 낙하 방지망과 계단, 난간 등 안전시설이 포함된다. 시스템비계는 주로 화력발전소에서 쓰는데, 대형 보일러 벽체의 상태 점검과 손상 보수를 할 때 기술자들을 보일러 벽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신형 국산 시스템비계 개발은 잇따른 발전소 내 비계 붕괴사고로 현장 인부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친 후 고용노동부(노동부) 지시로 이뤄진 것이다. 노동부는 2012년 3월과 4월 충남 보령화력발전소와 태안화력발전소 내 시스템비계 붕괴로 모두 3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자, 직접 조사에 나서 아일랜드산 시스템비계(2011년 3월 24일 이후 제작, 수입)가 산업안전보건법에서 규정한 안전인증을 받지 않은 제품임을 밝혀냈다.
이에 5개 발전사(한국남동발전, 한국중부발전, 한국서부발전, 한국남부발전, 한국동서발전)는 국내 안전인증 규정에도 적합하고 안전성이 우수한 보일러용 국산 시스템비계를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2013년 2월 15일 국산 시스템비계 개발 연구사업을 공동 발주했다. 비계에 문제가 생기면 이는 곧 작업자 생명과 직결되는 까닭에 제작 및 점검 과정에서 검수와 인증이 그만큼 중요하다.
문제는 5개 발전사가 국산 비계 개발을 담당할 수행기관으로 ㈔한국가설협회(가설협회·회장 백일천)를 선정(시스템비계 국산화 협력연구개발 협약)하면서 불거졌다. 가설협회는 노동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공사 가설재의 검사와 인증을 모두 담당하는 곳으로, 만약 가설재의 개발에 참여한다면 자신이 만든 제품의 성능과 안전성을 직접 검증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시스템비계 개발을 위해 5개 발전사가 가설협회 측에 지불하기로 한 연구개발비는 15억7000만 원.
2012년 11월 5개 발전사의 협력연구개발 업체 공모 당시 참가 업체 조건을 보면 ‘시스템비계 제작 시설 및 연구기관 보유 기업’으로, ‘단 자격요건 구비를 위한 컨소시엄 참여는 가능하다’고 규정해놓았다. 또한 ‘연구개발 범위’를 보면 ‘시스템비계를 개발하고, 실증 비계제작과 인증은 공통 보일러 모델을 선정해 시스템비계 1세트를 제작하고 시험하여, 안전성 등 검증을 시행한다’는 문구도 있다.
그런데 ‘기업’이 아닌 비영리 사단법인인 가설협회가, 그것도 검사와 인증을 담당하는 정부 위임기관이 신형 국산 시스템비계의 설계를 맡고 컨소시엄에 참가할 비계 제작업체까지 선정하면서, 업계 관계자 사이에선 “차라리 5개 발전사와 노동부가 직접 개발하는 게 낫다”는 푸념까지 흘러나왔다. 가설협회는 제작업체에 개발비를 지급하는 일까지 담당하고 있다. 시스템비계 개발을 대형 건물 공사에 빗대보면 공사 발주는 5개 발전사가 하고 설계, 시행은 가설협회, 실제 시공은 알루미늄 업체가 맡는 구조인 셈이다. 자칫하면 건물 시공을 감독, 감시해야 할 감리업체가 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짓는 일이 신형 시스템비계 제작에서 벌어질 뻔한 셈이다.
가설협회 측은 “안전 검사와 인증을 담당하는 기관이 설계하고 제작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공모 참가 기업의 항의가 있자 그때서야 “우리가 개발한 시스템비계는 다른 인증기관(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안전성 검증을 받겠다”고 밝혔다. 실제 첫 번째 비계 제작을 맡은 중소알루미늄 제조회사 A사는 완성된 시제품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3월 초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안전공단)에 의뢰했다.
5개 발전소 중 한 곳인 한국중부발전 관계자는 “이번 국산 비계 연구개발 사업에는 가설협회와 비계 제작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가하고 있다. 설계는 한국가설협회에서 맡고 제작은 비계 전문업체가 담당한다. 시제품에 대한 성능 시험과 안전진단 검사는 안전공단에서 담당한다”고 밝혔다.
취재 결과, 가설협회가 ‘다른 인증기관’이라고 말하는 안전공단도 협회와 전혀 무관한 곳은 아니었다. 안전공단 소속인 C씨가 올해 초부터 가설협회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 C씨는 안전공단에서 인증센터 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가설협회 측은 “C 전문위원은 공단 정년퇴임을 앞두고 공로연수기간이라 월급은 받지 않고 전문위원 수당만 받으며 가설협회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노동부 퇴직자들 ‘관피아’ 논란
A사가 (사)한국가설협회 측에 미지급된 제작비를 추가 지급해 달라고 보낸 내용증명 서류.
가설협회 측은 “이공계 출신이 아닌 심사원이 인증 업무를 맡은 점이 문제가 됐고, 안전인증 기준에 대한 해석에서 노동부와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지만 노동부 관계자는 “인력 자격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이 안전인증 업무를 수행한 점과 안전인증 기준의 해석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있어 시정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가설협회 내부적으로도 프로세스가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재발 방지를 위해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말했다.
가설협회의 신형 시스템비계 개발 참여와 관련해 ‘관피아’(관료+마피아) 논란도 벌어지고 있다. 가설협회 백일천 회장은 행정고시 출신으로 노동부에서 공보관, 대전지방노동청장, 서울지방노동청장을 역임한 후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 밖에도 노동부 퇴직자, 안전공단 퇴직자 등이 가설협회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설협회 회원사 관계자는 “가설협회가 무소불위 권력기관이 됐다. 회장이 노동부 1급 출신이라 그런지 사무관들이 꼼짝을 못 한다. 많은 노동부 퇴직자가 협회에서 일하고 있다. 안전인증 심사원의 전문성도 떨어지는데, 이런 기관에 시스템비계 설계와 제작을 맡긴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라고 말했다.
회원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가설협회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인증이 취소될까 봐 꼼짝도 못 한다. 안전인증을 받을 곳은 가설협회와 안전공단밖에 없는데 안전공단 측에 인증을 받겠다고 하면 가설협회로 가서 인증을 받으라고 한다. 실질적으로는 안전인증 업무 대부분을 가설협회가 하고 있다”고 전했다.
업체들과도 다툼 벌여
윗옷을 벗은 채 별다른 안전장구도 갖추지 않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파이프비계의 상층부에 올라선 인부들이 위태로워 보인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A사는 “우리는 1차 시제품에 대한 개발비 전체를 지급하고 추가 비용을 주면 재제작하겠다고 했는데 가설협회가 일방적으로 우리를 제작에서 배제했다. 당시까지 가설협회로부터 받은 개발비는 2억2000만 원뿐이었다. 이후 3억8000만 원을 받은 것도 총개발비가 6억 원이라는 지급명세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그 돈마저 주지 않겠다고 해서다. ‘추가 제작비를 지급하라’는 요지의 내용증명을 가설협회에 보낸 상태”라고 밝혔다.
가설협회 측은 “우리는 시제품 개발비가 6억 원이라고 파악했다. A사 측에 재제작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현재 다른 업체(B사)와 비계 개발을 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까지 시제품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5개 발전사가 책정한 국산 시스템비계 총 연구개발비는 15억7000만 원이고, 이 중 성공불 30%를 제외한 연구비의 70%(11억 원)가 가설협회에 지급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국산 시스템비계 제작을 맡은 대기업 B사는 A사에게 지급된 6억 원을 제외한 5억 원만으로 완성도 높은 비계를 개발할 수 있을까.
한국중부발전 측은 “가설협회의 요청으로 연구개발 기간을 연장했지만 추가 비용을 지급하지는 않았다. 어떤 절차로 B사가 채택됐는지 알 수 없다. 대기업이라고 들었다. 추가로 돈이 들어가지 않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주간동아’ 확인 결과, 비계 제작의 선두 기업이자 대기업이라는 2차 시제품 제작업체 B사는 1999년부터 올해 5월 22일까지 안전인증을 받지 않은 가설기자재(알루미늄 파이프 서포트)를 제조, 유통해오다 노동부에 적발됐다. 파이프 서포트는 건설현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제품 중 하나로, 콘크리트 구조물을 일정 형태로 만들기 위해 콘크리트를 부어 원하는 강도에 도달할 때까지 지지하는 가설 구조물이다. 만약 안전인증을 받지 않고 이를 제조, 수입, 양도, 대여하면 수거하거나 파기할 것을 노동부가 명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B사 담당인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평택지청 관계자는 “당시 B사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은 맞지만, 사후 안전인증 절차를 거쳐 안전성이 확인됐다”고 답했다. 실제 노동부는 ‘사후 안전인증 절차를 거쳐 안전성 등이 확인됐다면 수거, 파기 명령 조치를 할 필요는 없다’는 유권해석을 평택지청에 내려보냈다.
B사가 알루미늄 파이프 서포트 제품에 대해 사후 안전인증을 가설협회로부터 받은 시점은 5월 23일, 1차 시제품 제작 회사인 A사가 연구개발에서 배제된 시점은 4월, 5개 발전사가 가설협회로부터 시제품 제작사가 B사로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은 시점은 6월이다. 다시 말해 가설협회는 B사가 미인증 가설기자재를 10여 년 넘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한 사후인증을 내준 다음 시스템비계 2차 시제품 제작을 맡겼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설협회 관계자는 “B사가 시스템비계 제작에 관심이 많았고, 알루미늄 압출기를 직접 생산하는 업체라 채택하게 됐다. 자금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 규모 있는 업체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B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가 비계 개발을 하려다 최근 손을 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중부발전 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하자 “변동 상황이 있을 경우 가설협회로부터 보고를 받는데, 아직 업체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고 밝혔다.
국산 시스템비계의 개발이 늦춰지면서 5개 발전소는 보일러 정비를 할 때 노동부로부터 문제가 있다고 판정받은 비계를 보완해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1일 경북 구미시 금오공과대 기숙사 신축 공사 현장에서 또 다시 비계가 무너져 외벽 공사를 하던 인부 3명이 추락, 그중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