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많이 사라진 전통 이발소 풍경.
하여간 남자의 머리카락을 좀 더 효율적이고 빨리 자르는 데 이런 이발기계가 필요했던 셈인데, 이젠 구시대 유물이 되고 말았다. 요즘 20대 남자 중엔 기계식 바리캉을 구경도 못 해본 이가 꽤 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발소에 마지막으로 갔던 것도 군대에 있을 때니 20년은 족히 됐다.
과거엔 남자는 이발소, 이발관 혹은 이용원이라 부르는 곳에서 머리를 손질했다. 하지만 이젠 남자도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에 가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우린 이발소를 기억 속에 묻고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발소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바버숍(Barber Shop)’이란 다른 이름을 달고 말이다. 오늘의 작은 사치는 남자들만을 위한 사치다. 바로 이발소이자 바버숍에 대한 얘기다.
바버숍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 신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최초의 바버숍으로 알려진 영국의 ‘트루핏 앤드 힐(Truefitt · Hill)’이 1805년 문을 열었으니 무려 209년 전 일이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도 남자들이 미용실로 발길을 돌렸던 시절이 있다. 흥미로운 건 몇 년 전부터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 바버숍이 다시 트렌디한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기억 현대적으로 재해석
옛날 바버숍이 그대로 다시 주목받는 게 아니라 과거 기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남자만의 공간으로 재조명한 곳들이 화제다. 요즘 바버숍 트렌드를 이끄는 것도 영국이다. 영국발(發) 바버숍 열풍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도 바버숍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서울 한남동의 헤아(HERR), 홍대 앞의 낫띵엔낫띵(NOTHING N NOTHING)과 밤므(BOMBMME), 압구정의 블레스(BLESS) 등이 유명하다. 부산을 비롯한 지방 대도시에도 바버숍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나에게 이발소에 대한 기억 중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따스하게 데운 면도거품이다. 어릴 때라 이발소에서 정식으로 면도를 해보진 않았지만, 이발사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난 뒤 구레나룻이나 뒷머리 끝을 면도해준 기억은 있다. 면도솔에 거품을 잔뜩 묻히고, 큰 면도칼을 두툼한 가죽 끈에 슥슥 문지른 뒤 슥삭 하면서 잔털을 밀어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실 어릴 땐 그런 상황이 그리 즐겁거나 편하지 않았다. 큰 면도칼이 주는 두려움 때문인지 늘 경직되곤 했다. 중고교생 때까지의 기억이다. 나중엔 이발소에서도 머리 손질을 마친 후 전기면도기 같은 걸로 후처리를 해줬지, 따듯하게 데운 거품을 면도솔로 발라주는 서비스는 하지 않았다. 요즘 등장한 바버숍은 이런 어릴 적 기억을 좀 더 세련되게 되살려준다.
물론 지금도 찾아보면 과거의 낡은 이발소가 존재한다. 서울 만리동고개에는 87년간 3대째 이어온 낡은 이발소가 하나 있다. ‘성우이용원’이다. 재개발로 얼마나 더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오래된 낡은 세면대에서 비누로 머리를 감기고, 조그만 물조리개로 행궈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에 수도 없이 많던 동네 이발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이발소가 몰락하고 남자들이 대거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면서, 우리에게 이발소라는 단어는 ‘퇴폐이발소’라는 인상으로 더 강하게 자리 잡게 됐다. 그렇게 우린 남자만의 공간 하나를 잃어버렸다.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는 것이 더는 낯설지 않고, 청담동에서 나름 괜찮은 미용실을 단골로 다니지만, 그래도 미용실이란 공간이 주는 낯설고 미묘한 불편함은 여전하다. 특히 여자 손님이 가득할 때 머리를 하러 가면 더욱 그렇다. 복잡한 주말을 피해 좀 덜 붐비는 평일 낮 시간에 가면 한가한 백수처럼 보이는 게 신경 쓰인다. 남자 틈바구니에 홀로 있는 여자는 당당할 수 있지만, 여자 틈바구니에선 쭈뼛하는 남자가 의외로 많다. 그런 점에선 현대적으로 멋지게 되살아난 바버숍의 수요는 꽤 될 것이다.
남자, 아니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헤어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그깟 헤어스타일 바꾸는 게 뭐라고, 그냥 하면 되는 걸 엄두조차 못 내고 포기하며 지나쳤던 이도 많을 것이다. 그냥 과감히 한 번 바꿔보면 어떨까.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건 기분 전환용으로 비용 대비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때 포마드로 머리카락을 멋지게 뒤로 넘기는, 이른바 ‘올백’ 스타일이 선망의 대상이던 적이 있다. 흐트러짐 없이 매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정교하게 비율을 맞춘 가르마는 흑백 영화 속 남자주인공 같은 느낌을 풍긴다. 1970~80년대 멋 좀 부린다는 남자치고 이런 헤어스타일을 안 해본 이가 없었을 정도고, 지금도 멋쟁이 신사의 전형적인 이미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대부’나 ‘스카페이스’ 같은 마피아 영화 주인공도 멋진 슈트와 포마드를 발라 잘 빗어 넘긴 머리 스타일로 자주 등장한다. 내겐 영화 ‘아비정전’의 ‘장궈룽(장국영) 헤어스타일’로 더 기억에 남는데, 학창 시절 이걸 따라 하는 친구가 여럿 있었다.
위스키 마시고 액세서리 구매도
요즘 남자들은 파마에도 관대하다. 헤어스타일링을 위해선 파마가 아주 중요한데, 미용실에서 머리를 둘둘 말고 두어 시간 앉아 있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자 틈바구니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파마가 잘된 머리는 멋지지만, 파마하는 과정은 그리 멋지지 않다.
바버숍에서도 파마를 한다. 과정이 다를 리 없지만, 적어도 그 모습을 낯선 여자에게 안 보여줘도 되는 것이다. 남자로서의 품위이자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바버숍은 트렌드에 민감한 남자는 물론이고, 비즈니스하는 남자에게 좋은 사교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부 바버숍은 고급을 지향하며 가격도 좀 비싸다. 하지만 청담동의 비싼 미용실과 비교해보면 그리 비싼 편도 아니다. 물론 과거 이발소를 생각하는 사람은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테지만 세상 모든 가격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좀 더 좋은 것을 좀 더 안락하게 누리는 데 따른 대가라는 뜻이다.
요즘 바버숍은 머리만 자르고 마는 공간이 아니다. 고급 바버숍에서는 시가도 피울 수 있고, 위스키도 마실 수 있다. 넥타이나 커프링크스 같은 액세서리를 구매할 수도 있다. 이발소가 바버숍으로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남자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바버숍에 가든, 이발소에 가든, 미용실에 가든 그건 각자의 선택이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자신의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는,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사치만큼은 누려보자. 이왕이면 좀 더 멋진 곳에서, 한 달에 한 번 나를 멋지게 변신해보는 사치쯤은 누려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