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이 2005년부터 자신이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 앞에 섰다.
20여 년간 배우 김보성(48)은 홀로 ‘으리’(의리)를 외쳤고 이제는 메아리가 울린다.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의리의 형평성’을 들어 간곡히 거절했다. 오래 알고 지낸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줄 수 없었다고 한다. 몇 차례 연락이 오간 뒤 그가 2005년부터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 측에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일 만에 답이 왔다.
“이 시대 최고의 의리가 나눔의리입니다. 제가 인터뷰 주인공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진지하게 의리만 다뤄주십시오.”
5월 23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길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에서 마침내 그를 만났다.
“물질만능 시대가 날 불러내”
▼ 당신만 보면 사람들이 ‘의리’를 외친다.
“기적 같은 일이다. ‘김보성 대세’보다 의리의 대세가 됐으면 좋겠다. 인기를 누릴 때가 아니라 더 겸허하게 고개 숙이고 의리의 진정성을 계몽할 때다.”
▼ 비락식혜 광고는 대놓고 웃기려고 찍은 건가.
“전혀 아니다. 고속촬영기법(슬로모션)으로 촬영하기에 ‘오, 멋있는 건가’ 하면서 진지하게 주먹을 날리고 남자답게 식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광고를 보니 블랙코미디였다. 나를 희화화하고 망가뜨려도 의리가 부각된다면 고무적이다. 당신 마음에 의리만 품는다면 아낌없이 나를 재료로 쓰라고 말하고 싶다.”
▼ 직접 찍은 광고 외에도 여러 곳에서 당신의 얼굴과 의리를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의리를 마구 가져다 쓰면 가슴이 아프다. 지금도 물밀듯이 광고 제의가 들어오지만 의리의 상업화를 경계하기에 사나이 기상을 담은 광고만 찍을 거다. 내가 존경하는 의리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 지금까지 찍은 광고도 뜨기 전 찍은 거라 큰돈을 번 것도 아니다.”
▼ 왜 의리 열풍이 불까.
“시대가 의리를 불러낸 것 같다. 약육강식,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상처받고 지쳐가다 의리를 외치면서 조금 위로받는 것 아닐까.”
▼ 시대가 불러냈으니 어깨가 무겁겠다.
“공인 중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 커졌다. 일상의 자유는 조금 줄어들겠지만 그것은 의리의 사나이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다. 오히려 기쁘다. 의리의 사나이는 억울한 일이 생기고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인터뷰 도중 김보성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의리로 힘내시고, (입금했으니) 확인해보시라”고 끊었다. 김보성이 떴다고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돈 빌려달라,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 의리의 길은 험난해 보였다.
▼ 의리가 결국 ‘내 편 챙기기’란 비판도 있다.
“의리엔 3단계가 있다. 1단계가 친구와의 의리다. 2단계는 공익과의 의리, 3단계는 나눔의 의리다. 우정도 중요하지만 내가 외치는 의리는 공익과 나눔이다. 아! 의리의 시대가 온다고 생각하면 벅차서 눈물이 난다.”
김보성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가끔 혼자 있을 때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의리가 우리 가슴에 자리 잡으면 기적이 올 것이라 가슴으로 믿고 있었다. 4월 22일 세월호 희생자 유족에게 써달라며 사랑의 열매에 1000만 원을 기부하고 세월호 경기 안산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것도 가슴이 움직여서다.
▼ 정말 빚을 냈나.
“나도 아들 둘을 키우는 아버지인데 그분들을 생각하면 몸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잠수사 자격증이 없는 것이 원망스럽고, 영화처럼 배를 뚫고 들어가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고. 그래서 적은 금액을 마련했다. 의리의 사나이인데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 원망스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 빚까지 내는 데 가족은 동의했나.
“결혼 전 아내에게 의리가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래서인지 아내도 남을 돕는 데는 뜻이 통한다. 인생 성공의 기준은 물질과 명예가 아니다. 주변에서 ‘가오 빠진다’(체면이 안 선다)고 외제차로 바꾸라고 해도 국산 자동차를 6년째 타고 있다. 휴대전화도 오래된 피처폰을 쓰고 번호도 여전히 011로 시작한다.”
▼ 의리만 외치는 모습이 여성에게 비호감으로 꼽히기도 한다.
“솔직히 남자에게 인기가 더 좋다. 하지만 나는 남자이기 전에 사람이다. 선량한 사람에게 한없이 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방송에서 편집된 모습만 보면 허세 부리고 강한 척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뭐 상관없다. 각오했다(웃음).”
“월드컵 계기로 화합했으면…”
김보성이 직접 제공한 미공개 사진. 그는 이 사진 속 자신의 얼굴에 ‘의리의 사나이’의 고독과 슬픔, 정의와 분노가 담겼다고 했다.
“김홍신 작가의 소설 ‘인간시장’을 감명 깊게 읽었다. 정의와 의리를 위해 죽고 사는 주인공 장총찬에 매료됐다. 지금 선글라스를 낀 이유는 고교 때 친구들을 괴롭히던 ‘야생마’란 조직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입어 왼쪽 눈이 뿌옇게 보이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 후 몽둥이를 든 남자 3명에게 괴롭힘 당하던 남녀를 구해준 적이 있는데 경찰서에 가니 쌍방폭력이 되더라. 영화 속에서 영웅이 돼 정의와 의리를 실현하고자 연기자가 됐다.”
▼ 무명 시절이 길었다.
“다찌마와리(액션배우) 형님들 따라다니면서 액션을 배우고 엑스트라도 했다. 영화 연출부도 하고, 영화에서 안 풀리니까 연극 극단에 가서 허드렛일도 했다. 고생해도 내 안에서 계속 자신감을 키웠다. 고교 때 ‘야생마’랑 싸우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후 이보다 나빠질 수 없다는 생각을 평생 하고 산다.”
▼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로 데뷔했다. 당신에게 최고 영화와 최악 영화를 뽑는다면.
“나를 스타덤에 올려준 ‘투캅스 2’(1996)가 최고다. 최악은 ‘최후의 만찬’(2003)이다. 괜히 의사 역을 맡았다가 제목처럼 최후가 됐다. 그 후 주인공을 못 했다. 이제 캐릭터 변신은 포기했다.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오로지 액션배우만 하고 싶다. 가슴으로 생각하는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 흠, 액션배우로 활약하기엔 과거보다 몸이 무거워 보인다.
“왜 한국에선 술과 의리를 결부하는지 모르겠다. 술자리에서 절대 과시하지 않는데 ‘의리의 사나이인데 마시라’며 억지로 권하는 사람이 많다. 아, 이제 슬슬 몸 만들어야지.”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세월호 참사로 전 국민이 슬퍼했다. 곧 월드컵이 다가오는데 국민이 의리로 화합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김보성은 1시간 3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의리’를 45번이나 입에 올렸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헤어지고 나서 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의리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큰절을 올리며 머리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보다 더 큰 고마움의 단어가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