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으로 굳이 말한다면 패션 세계에서 여성복은 프랑스, 남성복은 이탈리아가 막강 파워를 쥐고 있다. 두 문화 강국이 속한 유럽은 패션뿐 아니라 와인, 미술, 건축 등 여러 예술의 근원이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유럽식 문화는 미국과 일본이라는 거대 시장에서 주로 소비된다.
세계가 고달프게 관통해온 지난 경험, 즉 미국 시장의 침체가 세계경제에 미친 거대한 영향을 보면 미국의 여전한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 그 힘이 서서히 변해가는 사인도 보인다. 문화 소비의 또 다른 축이던 일본은 오랫동안 아시아 한 국가가 아니라 아시아 그 자체였으며, 특히 패션 마켓 규모와 고급스러움은 유럽도 존중할 정도였다. 20여 년 이상 불황과 버블 붕괴가 지속됐는데도 이 정도의 경제력과 문화를 보유하는 건 일본 저력을 보여주는 증거지만,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 시장에도 미국 못지않은 열패감이 번져가고 있다.
역사란 결국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변하는 것일까. 패션세계에서도 미국과 일본이 지나간 맹주 자리에 어느새 중국과 러시아라는 압도적 크기의 신흥 제국이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남성복은 지금 진화 중이다.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저씨 패션’에서 ‘남성 복장’으로, 브랜드와 로고 중심에서 품질과 취향으로,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과시’에서 스스로를 위한 ‘배려’로 그렇게 서서히, 하지만 긍정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패션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주제
물론 패션은 여전히 남성에게 어렵고 부담스러운 주제다. 백화점에서 모르는 사람끼리 금세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여성에 비해 남성은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고, 새로운 슈트나 사람보다 익숙하고 넉넉한 것을 편안해한다. 여성에겐 “새 옷을 사러 가자”는 말이 기분 전환이나 ‘힐링’이 되지만, 남성은 마치 신입사원이 두려운 마음으로 회사에 첫 출근하는 것 같은 큰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나 장소, 혹은 처음 접하는 개념이나 물건은 우리에게 뭔가에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삶의 비밀을 가르쳐준다. 특히 대화보다 스마트폰, 철학보다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고, 비즈니스로 하루하루가 너무 바쁜 남성이 자기 복장, 그중에서도 슈트에 관심을 갖고 그 활용에 차츰 익숙해지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시간과 돈도 투자해야 하고, 정보 부족이나 타인 시선도 꽤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술을 늦게까지 마실 수 있는 장소나 폭탄주를 제조하는 비법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남성에게는 슈트에 대한 경험이나 추억담은 그리 많지 않다. 학교나 직장에서 누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잡지나 온라인 같은 미디어에서 얻은 정보도 개인 수준에 맞게 적용하기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라도 옷장을 열면 슈트나 재킷, 셔츠, 타이의 상대적인 양에 비해, 중요한 자리에서 입고 싶을 만큼 손이 가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을 터다. 그건 개인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지언정 슈트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반증이다.
돌이켜보면 대부분 경제권을 가진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 세일을 해서, 혹은 선물로 상품권을 받아 분별없이 슈트 한 벌을 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매장에서는 극진한 환대와 친절한 서비스를 곁들여 “이 옷이 무조건 당신을 위해 태어났노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슈트가 어울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판매원은 남성이 좀 더 키가 커 보이고 싶고, 나이 들면서 나오기 시작하는 배를 살짝 가리고 싶으며, 무엇보다 젊어 보이고 싶은 속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저 방금 출시된 이 슈트가 얼마나 유명한 브랜드 제품인지, 그리고 지금 구매하면 정상가에 비해 얼마나 좋은 혜택으로 살 수 있는지만 강조한다.
그 슈트를 집에 가져온 다음에도 뭔가 아쉬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복장에 덜 민감한 남성이라 해도 그가 원하는 슈트는 무조건 짙은 색상, 로봇처럼 각지고 항공모함처럼 넓은 어깨의 아저씨 복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당당히 밝혀야
물론 패션에는 정답이 없다. 특히 여성을 위한 패션은 세계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매달 주기적으로 탐구된다. 늘 새로운 것을 접하는 맛은 있지만, 정보가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우리나라 남성에겐 패션과 관련해 잡은 고기를 먹는 지침이 아니라, 스스로 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자기 삶과 사회적 가치에 대해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군대 문화가 여전히 옷이든 사고든 행동이든 삶의 곳곳에 만연하고, ‘언제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튀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가치가 남성 사이에 공유되고 있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은 늘 평균을 따라가는 여론보다 용기를 내 소리친 소수의 목소리였다. 중세 이후 근대 역사를 발전시킨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당시에는 거의 이단이고 신성모독이지 않았던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우리나라 남성에게 필요한 아름다움은 지금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유행하는 눈부시게 화려한 재킷이나 붉은색 악어가죽 구두, 번쩍이는 보석 시계와 캐시미어 니트웨어가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당당하게 말하는 자세다. 별로 신뢰 가지 않는 브랜드가 내놓는 그들만의 신상품을 습관적으로 입는 현실에서 탈피해,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색상, 그다지 차별성 없는 브랜드와 실루엣의 옷을 입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용기 내 말하는 것이다.
껍데기를 벗는 첫걸음이 어려울 뿐 아직 남성이 모르는, 그러나 아름다울 것이 분명한 복장의 세계는 놀랍도록 넓다. 그 첫걸음을 누군가는 블랙 구두를 벗고 브라운 슈즈를 신는 것에서부터, 또 다른 누군가는 특징 없는 기성복 대신 잘 맞는 맞춤복을 입는 것에서부터, 혹은 어둡고 탁한 색상의 재킷 대신 개성적인 체크 재킷을 구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 입는 것이 남성 복장이다. 슈트나 셔츠의 손바느질이 모든 순간,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남에게 굳이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자기 패션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신독(愼獨) 정서에 가장 가까이 닿은 패션 철학이 아닐까.
세계가 고달프게 관통해온 지난 경험, 즉 미국 시장의 침체가 세계경제에 미친 거대한 영향을 보면 미국의 여전한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 그 힘이 서서히 변해가는 사인도 보인다. 문화 소비의 또 다른 축이던 일본은 오랫동안 아시아 한 국가가 아니라 아시아 그 자체였으며, 특히 패션 마켓 규모와 고급스러움은 유럽도 존중할 정도였다. 20여 년 이상 불황과 버블 붕괴가 지속됐는데도 이 정도의 경제력과 문화를 보유하는 건 일본 저력을 보여주는 증거지만,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 시장에도 미국 못지않은 열패감이 번져가고 있다.
역사란 결국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변하는 것일까. 패션세계에서도 미국과 일본이 지나간 맹주 자리에 어느새 중국과 러시아라는 압도적 크기의 신흥 제국이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남성복은 지금 진화 중이다.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저씨 패션’에서 ‘남성 복장’으로, 브랜드와 로고 중심에서 품질과 취향으로,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과시’에서 스스로를 위한 ‘배려’로 그렇게 서서히, 하지만 긍정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패션은 어렵고 부담스러운 주제
물론 패션은 여전히 남성에게 어렵고 부담스러운 주제다. 백화점에서 모르는 사람끼리 금세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여성에 비해 남성은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리고, 새로운 슈트나 사람보다 익숙하고 넉넉한 것을 편안해한다. 여성에겐 “새 옷을 사러 가자”는 말이 기분 전환이나 ‘힐링’이 되지만, 남성은 마치 신입사원이 두려운 마음으로 회사에 첫 출근하는 것 같은 큰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나 장소, 혹은 처음 접하는 개념이나 물건은 우리에게 뭔가에 능숙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삶의 비밀을 가르쳐준다. 특히 대화보다 스마트폰, 철학보다 이미지가 현실을 지배하고, 비즈니스로 하루하루가 너무 바쁜 남성이 자기 복장, 그중에서도 슈트에 관심을 갖고 그 활용에 차츰 익숙해지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시간과 돈도 투자해야 하고, 정보 부족이나 타인 시선도 꽤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술을 늦게까지 마실 수 있는 장소나 폭탄주를 제조하는 비법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남성에게는 슈트에 대한 경험이나 추억담은 그리 많지 않다. 학교나 직장에서 누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잡지나 온라인 같은 미디어에서 얻은 정보도 개인 수준에 맞게 적용하기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구라도 옷장을 열면 슈트나 재킷, 셔츠, 타이의 상대적인 양에 비해, 중요한 자리에서 입고 싶을 만큼 손이 가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을 터다. 그건 개인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지언정 슈트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반증이다.
돌이켜보면 대부분 경제권을 가진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 세일을 해서, 혹은 선물로 상품권을 받아 분별없이 슈트 한 벌을 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매장에서는 극진한 환대와 친절한 서비스를 곁들여 “이 옷이 무조건 당신을 위해 태어났노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슈트가 어울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판매원은 남성이 좀 더 키가 커 보이고 싶고, 나이 들면서 나오기 시작하는 배를 살짝 가리고 싶으며, 무엇보다 젊어 보이고 싶은 속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저 방금 출시된 이 슈트가 얼마나 유명한 브랜드 제품인지, 그리고 지금 구매하면 정상가에 비해 얼마나 좋은 혜택으로 살 수 있는지만 강조한다.
그 슈트를 집에 가져온 다음에도 뭔가 아쉬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복장에 덜 민감한 남성이라 해도 그가 원하는 슈트는 무조건 짙은 색상, 로봇처럼 각지고 항공모함처럼 넓은 어깨의 아저씨 복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당당히 밝혀야
물론 패션에는 정답이 없다. 특히 여성을 위한 패션은 세계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매달 주기적으로 탐구된다. 늘 새로운 것을 접하는 맛은 있지만, 정보가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우리나라 남성에겐 패션과 관련해 잡은 고기를 먹는 지침이 아니라, 스스로 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자기 삶과 사회적 가치에 대해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군대 문화가 여전히 옷이든 사고든 행동이든 삶의 곳곳에 만연하고, ‘언제 어디서든 조금이라도 튀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가치가 남성 사이에 공유되고 있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은 늘 평균을 따라가는 여론보다 용기를 내 소리친 소수의 목소리였다. 중세 이후 근대 역사를 발전시킨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당시에는 거의 이단이고 신성모독이지 않았던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우리나라 남성에게 필요한 아름다움은 지금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유행하는 눈부시게 화려한 재킷이나 붉은색 악어가죽 구두, 번쩍이는 보석 시계와 캐시미어 니트웨어가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당당하게 말하는 자세다. 별로 신뢰 가지 않는 브랜드가 내놓는 그들만의 신상품을 습관적으로 입는 현실에서 탈피해,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색상, 그다지 차별성 없는 브랜드와 실루엣의 옷을 입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용기 내 말하는 것이다.
껍데기를 벗는 첫걸음이 어려울 뿐 아직 남성이 모르는, 그러나 아름다울 것이 분명한 복장의 세계는 놀랍도록 넓다. 그 첫걸음을 누군가는 블랙 구두를 벗고 브라운 슈즈를 신는 것에서부터, 또 다른 누군가는 특징 없는 기성복 대신 잘 맞는 맞춤복을 입는 것에서부터, 혹은 어둡고 탁한 색상의 재킷 대신 개성적인 체크 재킷을 구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 입는 것이 남성 복장이다. 슈트나 셔츠의 손바느질이 모든 순간,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남에게 굳이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자기 패션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신독(愼獨) 정서에 가장 가까이 닿은 패션 철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