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생각에 잠긴 김한길 민주당 대표.
민주당이 ‘김용판(전 서울경찰청장) 특검 딜레마’에 빠졌다. 6·4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지만, 과거 대여(對與) 투쟁에 비해 사안이 복잡하고, 새정치신당(가칭)과 ‘민생 경쟁’을 펼쳐야 할 시점에 올인(다 걸기)하기도 부담스럽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다.
표면상으로 보면 ‘국가정보원(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 축소·은폐 지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야당 지지층의 분노를 결집한 사안이긴 하다. 민주당 의원들은 펄펄 뛰며 특별검사(특검) 도입을 주장한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 해임안도 국회에 제출했고, 2월 12일 본회의 표결까지 시도했다. 그만큼 ‘김용판 특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야권 공조 위한 정치 ‘상품성’
여론조사를 보면 불리하지는 않다. ‘특검 찬성’ ‘김용판 유죄’라는 응답 비율이 높다. 종합편성채널 JTBC가 2월 7일 여론조사기관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성인 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RDD 전화면접조사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7%p) ‘특검 찬성’ 의견은 51.1%였다. ‘특검 필요 없다’는 응답은 20.4%, ‘잘 모르겠다’는 28.5%였다. 2월 7, 8일 리서치뷰와 팩트TV 여론조사에서도 55.3%가 ‘유죄’라고 응답했다. ‘무죄’는 25.0%, ‘무응답’은 19.7%였다(성인 휴대전화 가입자 1000명 대상 전화면접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김용판 특검’은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신당 측과 야권 공조를 위한 ‘고리’로도 상품성은 있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도 “이번 판결은 특검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것”이라며 특검 필요성에 공감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민주당에게 기회가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민주당의 ‘정치적 승리’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 ‘김용판 특검’은 민주당에게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이기보다 ‘뜨거운 감자’가 될 공산이 크다.
먼저 황교안 법무부 장관 해임안은 2월 12일 본회의 표결 시도에도 의결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고, 이는 여대야소 상황에서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민주당이 여론전을 의식해 표결을 시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날 표결에서는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 대기령’을 내렸지만 당 소속 의원 126명 중 15명이 불참했다. ‘민생투어’로 피로가 겹친 김한길 대표는 목도리를 동여매고 본회의장에 나왔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바닥 민심도 여론조사에 드러난 수치에 비해 복잡하다. 전문가 분석을 종합해보면, ‘김용판 특검’에 대한 민심은 △분노 △피곤(정치적 갈등에 대한 피로감) △무슨 말인지 모름(사안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국정원 댓글사건’에 비해 떨어짐) 등 여러 갈래다. 국정원 대통령선거(대선) 개입 의혹사건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덕을 봤든 안 봤든 국정원이 그러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이번 사안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
검찰 수사와 김 전 청장 간 기소 및 법원 판결 전 진실공방이 길었고, 검찰 판단이 아닌 사법부 판결인 점도 민주당으로선 부담이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 등 대형 민생 사건이 터지면서 이슈가 분산된 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2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본청 앞 계단에서 특검 촉구 및 김용판 부실수사 규탄대회를 갖고 있다.
야권연대 고리 구실도 의문이다. 민주당은 ‘김용판 특검’을 야권연대 고리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읽히지만, 안 의원 측은 선을 긋는 모양새다. 안 의원은 특검 필요성에는 공감했으나, 2월 10일 야당과 시민사회가 모인 연석회의에는 불참했다. 창당을 앞두고 정책연대와 선거연대를 연계하지 않겠다는 관측이 나온다. 민주당은 4년 전 지방선거 파트너였던 통합진보당(당시 민주노동당)과는 이미 절교를 선언한 상태. 무상급식과 4대강 사업 반대, 이명박 정권 심판론으로 똘똘 뭉쳤던 2010년 지방선거에 비해 힘겹다.
새누리당 “대선불복 정쟁 2막”
지도부를 향한 당내 견제도 시작됐다. 민주당 우상호, 이인영 의원 등 개혁 성향 초·재선 의원 22명은 2월 11일 정치행동그룹 ‘더 좋은 미래’를 발족해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김한길 지도부의 중도노선 강화와 달리 ‘제3세대 미래형 정당’ ‘진보적 국민정당’을 표방하고 있어 지도부와 충돌할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야권 지지층에서는 김 전 청장 무죄 판결에 대한 분노 여론이 자칫 민주당에 대한 회의론으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안철수 측과의 경쟁을 위한 기득권 내려놓기, 새 정치 의제 제시, 민생 공약 제시만으로도 현재 민주당은 벅차다”며 “‘김용판 특검’은 올인하기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고 말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민주당의 특검 주장을 “일사부재리 원칙에도 위배되고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라며 야권 요구를 일축한다. “검찰이 김 전 청장을 기소할 때는 소신을 가지고 노력한다더니 무죄 판결이 나오자 몰상식한 태도를 보인다”(유기준 최고위원), “한명숙, 박지원, 김어준의 무죄 판결에는 ‘최고’라고 하다가 입맛에 맞지 않자 정치 판결이라고 한다”(박대출 의원)며 공격한다. 이와 동시에 최근 폭설 피해가 터지자 당청 긴급 협의회를 열고 특별교부세 지원을 결정하는 등 은근히 민생 정당을 강조할 기회로 삼는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가 민주당의 특검 도입 주장을 ‘대선불복 정쟁 2막’으로 규정했다. 야당의 정권심판론에 맞서 ‘6·4 지방선거=2012년 대선 완결판’ 전략이 읽히는 대목.
새누리당 한 당직자는 “‘김용판 재판’에는 17명가량의 참고인 진술과 관련 영상, 서류들이 증거로 제출됐는데, 이들이 입을 맞춰 허위진술을 할 가능성이 있겠는가”라며 “민주당이 특검을 야권 지지층 결집용으로 활용한다면, 우리는 특검 주장을 대선불복 연장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