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국 17개 시도지사 협의체인 전국시도지사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김 도지사는 “20년 가까이 기초·광역자치단체장으로 일하면서 우리나라 지방자치제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두루 봤다. 현장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어떤 문제든 답을 찾는 데 익숙해졌다”고 했다.
요즘 그는 8월 31일부터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준비에 힘을 쏟고 있다. 경상북도와 경주시, 터키 이스탄불 시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다. 경주와 이스탄불, 육로로 1만8000km 가까이 떨어진 두 도시가 어떻게 함께 엑스포를 열게 된 걸까. 이 질문에 김 도지사는 “경주와 이스탄불은 동서양 문명 교차로 ‘실크로드’의 동서쪽 기점이라는 인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실크로드 동서쪽 기점 인연
실크로드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경주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건 새로운 주장이다. 그동안 세계 주류 학계는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당나라 시안으로 봤다. 이 길이 중국 국경을 넘어 한반도까지 뻗어 있었다는 게 확인되면 경주, 나아가 우리나라는 세계 문명사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김 도지사는 “학술적, 문화적으로 근거 있는 이야기”라고 자신했다.
“8세기 신라 승려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선조들은 중앙아시아, 인도까지 거침없이 오갔습니다. 당시 ‘서역’이라 불리던 지역과 문물 교류도 활발했죠. 경주에서는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많이 발굴됩니다.”
김 도지사는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은 이 사실을 세계에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경주를 세계 문화 중심 도시로 키우는 게 그의 목표다.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성과 경북 전체에 흐르는 우리 문화의 깊이를 생각할 때 결코 무리한 욕심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김 지사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경북에는 3개 문화권이 공존합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문화권과 안동·영주·예천 등의 유교문화권, 그리고 고령과 낙동강 유역의 가야문화권이죠. 우리나라 문화재의 20%, 고택의 40%가 경북에 있어요. 그 안에 우리 민족의 혼이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김 도지사는 문화유산과 더불어 빼어난 자연환경도 자랑했다. “동해 1000리 바닷길과 백두대간, 낙동강 등이 있는 경북은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될 요소를 두루 갖춘 곳”이라는 것이다. 경북 경주는 1998년부터 이러한 경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리는 세계문화엑스포를 꾸준히 열어왔다. 2006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연 적도 있다. 김 도지사는 “당시 현지를 찾은 세계 여러 나라 관광객이 경주와 우리 문화에 대해 알게 됐다. 그때의 성과를 발판으로 올해는 터키 이스탄불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스탄불은 연간 3500만 명이 찾는 관광도시인 만큼 기대가 더 크다”고 덧붙였다.
‘경주-이스탄불 세계문화엑스포 2013’ 개최가 쉬웠던 건 아니다. 김 도지사는 “2010년 처음 이스탄불 쪽에 공동개최 의사를 타진했다가 사실상 문전박대당했다”고 회고했다.
“이스탄불 쪽 담당자들이 ‘격이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 겁니다. 이스탄불은 비잔틴제국의 수도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구가 1300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고요. 그에 비해 경주는 세계 무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죠. 한국의 지방 도시, 인구 23만 명, 게다가 목조 문화유산은 상당수 소실된 상태…. 그쪽에서는 이 두 도시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겁니다.”
1월 18일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공동조직위원회 창립총회에서 김관용 경북도지사(오른쪽)와 카디르 톱바쉬 이스탄불 시장이 공동조직위원장에 임명된 후 위촉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 도지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별명이 ‘들이대’라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들이대니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고 웃어 보였다. 무턱대고 ‘들이댄’ 건 아니다. 먼저 화랑도 등을 통해 드러나는 신라 정신문화의 우수성을 부각했다. 그 혼(魂)이 케이팝(K-pop)과 영화, 공연 등 한류문화 콘텐츠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최첨단 한국 정보기술(IT)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등을 설명했다.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교류가 시안을 넘어 경주까지 이어졌다는 점, 그래서 경주가 사실상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문화적 잠재력을 알게 된 이스탄불이 결국 ‘경주가 유형문화유산 수는 상대적으로 적을지 몰라도, 무형문화자산으로는 결코 이스탄불에 뒤지지 않는 도시’라는 걸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도 힘을 보탰다. 지난해 2월 터키에서 열린 한·터키 정상회담에서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개최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 이날 양국 정상이 엑스포 개최에 합의하면서 행사 추진은 급물살을 탔다. 지난 5월 1일 한·터키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뒤 엑스포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김 도지사는 “이번 엑스포를 통해 이스탄불과 경주 사이에 새로운 실크로드가 열릴 것”이라며 “첫 교역품은 양국의 문화 콘텐츠가 될 테고, 뒤이어 경제·산업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전까지 터키는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죠. 터키에서 우리나라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터키군이 참전했던 6·25전쟁 당시의 기억과 최근의 경제발전상, 한류 콘텐츠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요.”
김 도지사는 이번 엑스포를 통해 현지에 우리의 오랜 역사와 문화 전통이 알려지면 양국의 정서적 공감대가 더욱 두터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9월 22일까지 이어지는 엑스포 기간 내내 이스탄불 교통중심지 에미뇌뉘 광장에서 운영하는 ‘한국문화관’은 이를 위한 ‘한국 홍보’의 중심지다. 문화관의 기본 테마는 연(緣), 멋(美), 기(氣), 흥(興), 정(情). ‘연’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어진 한국과 터키의 인연, ‘멋’은 황금신라와 한국 문화의 다채로운 아름다움, ‘기’는 고유 정신이 만들어가는 한국의 발전상, ‘흥’은 한국 전통문화의 흥겨움과 IT의 만남, ‘정’은 한국과 터키 양국의 우정을 각각 상징한다.
이외에도 이스탄불의 랜드마크 아야소피아 성당 앞 광장에서 열리는 개·폐막식을 비롯해 엑스포가 열리는 3주 동안 이스탄불 곳곳에서는 전시, 체험, 심포지엄 등 다채로운 행사가 계속된다. 건축가 승효상, 사진작가 구본창과 김중만, 화가 박대성, 한복디자이너 이영희 등 국내 정상급 예술가들이 힘을 보탰다. 무흐신 에르투룰 극장에서 매일 공연되는 판타지 극 ‘플라잉’도 눈길을 끈다. ‘플라잉’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도깨비와 화랑 이야기에 비보잉, 리듬체조, 서커스 등 다채로운 볼거리를 버무린 비언어 공연으로, ‘난타’ 연출자 최철기 씨가 총감독을 맡았다. 2011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당시 주제공연으로 이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한편 행사 기간 베야지트 광장에는 삼성, 포스코, 현대 등 한국 기업 홍보관도 마련된다.
이번 엑스포의 캐치프레이즈는 ‘길, 만남, 그리고 동행’. 실크로드 위에서 만난 양국이 미래를 향해 함께 걸어가자는 뜻이다. 김 도지사는 이에 대해 “이 행사가 결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은 수천년 전 우리 선조의 교류를 되살려 새로운 문화·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신라 마케팅과 새 한류 가능성
5월 26일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양해각서(MOU) 체결 기념 한복패션쇼에 참석한 김관용 경북도지사(가운데 한복 입은 남자)와 이영희 한복디자이너(회색 한복 입은 여자).
이를 위해 경주에서 이스탄불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걷는 ‘대한민국 실크로드 탐험대’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를 팀장으로 한 1차 탐험대가 3월 보름 동안 경주에서 시안까지 걸었고, 7월 17일 시안에서 이스탄불까지 걷는 2차 탐험대가 경북을 떠났다. 이번 탐험대는 45일 동안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스탄불에 이르는 1만3000km 구간을 걷는다. 그 동안 주요 권역별로 문명교류사의 흔적과 신라역사를 발굴, 기록하고 재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도 할 예정이다.
가수 이장희, 소설가 김연수, 화가 서옥순 등이 참여한 이번 탐험은 8월 31일 실크로드 서쪽 종착지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이스탄불-경주 세계문화엑스포 2013’ 개막식장에서 막을 내린다. 경북도는 내년엔 해양 실크로드를 탐험하는 등 계속 이 프로젝트를 이어갈 계획이다.
다양한 학술행사도 연다. 김 도지사는 “7월 5일 경주에서 열린 ‘실크로드 국제 학술회의’에서 중국 둔황연구원 연구원이 ‘둔황 석굴군(群)에서 고구려·백제·신라·고려인이 그려진 그림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둔황은 실크로드에서도 동서교역과 문화교류의 거점 도시로 유명한 곳 아닙니까. 그곳에 있는 둔황연구원은 실크로드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곳이에요.”
김 도지사의 말이다. 경북도는 7월 22일 중국 란저우시에서도 ‘둔황, 실크로드와 한국의 문화교류 및 둔황학의 국제화와 해외 둔황학’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그는 “이런 자리를 계속 마련해 실크로드를 통한 한반도의 문화교류 흔적을 발굴하고, 세계에 널리 알려가겠다”고 밝혔다.
“일단 이번 엑스포를 통해 경주를 이스탄불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문화 도시로 자리매김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실크로드와 신라의 혼, 나아가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와 역사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질 거예요.”
김 도지사는 이를 위해 이번 엑스포에서 우리나라와 터키 양국 정상이 세계를 향해 문화선언을 하는 것을 제안했다. “동양과 서양, 이슬람과 기독교가 어우러지는 문화의 용광로 이스탄불에서 두 나라 대통령이 ‘문화독트린’을 내놓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고대사와 문화의 힘을 바탕으로 미래를 모색하는 그의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