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를 오랜 기간 다룬 전직 고위당국자의 말이다. 핵 문제라는 본질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충분히 ‘비명을 질러놓지 않으면’ 주변국은 물론 북한도 남측을 핵 관련 논의에서 소외시키려 할 개연성이 높다는 우려다. 자신의 뜻에 맞는 타협안을 만들면 한국은 어찌됐건 군소리 없이 쫓아오리라는 인식을 깨야 하는데, 남북 당국회담 준비 과정에서 본질 문제를 제대로 언급조차 못 한 것은 실책이라는 평가다.
6월 23일 6자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인 조태용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미국, 일본, 중국 측과 연쇄 회동을 한 후 귀국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 베이징을 찾았던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도 평양으로 돌아갔다. 조 본부장은 각국 6자회담 수석대표를 두루 만났고, 김 부상은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왕이 외교부장을 만났다. 바야흐로 협상국면의 막이 오르는 순간. 당사국들의 행보가 급물살을 타면서 이제 6자회담 개최는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와 당국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큰판’을 앞두고 각자가 어떤 그림을 갖고 있는지 속내를 타진 중이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평양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서울과 워싱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이 엉키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은 과연 무엇인가. 이를 계산해내는 데 각국 정책결정자들이 머릿속에 담고 있는 한 가지 가늠자가 있다. 바로 지난해 북한과 미국이 체결한 2·29합의다.
#1 평양의 계산
2011년 7월 시작된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도출된 2·29합의는 미국의 영양(식량) 지원을 대가로 북한이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핵·미사일 실험 유예(모라토리엄),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 입북 허용 등을 이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억해둬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이 합의는 북한이 추가로 핵·미사일 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취지일 뿐 이미 완성해둔 핵 능력을 되돌리거나 근본적인 비핵화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평양은 2·29합의 틀 자체를 복원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 강도 높은 ‘말 폭탄’으로 이전보다 향상된 핵 능력을 한껏 과시한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합의 당시보다 월등해진 핵 능력을 현재 상태 그대로 인정받고, 추가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반대급부를 챙긴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계산은 3월 31일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가 밝힌 이른바 ‘핵무력·경제 건설 병진 노선’을 감안하면 더욱 힘을 얻는다. 지금 평양이 손에 쥔 핵무기 11기 남짓과 미사일 기술을 유지하면서 경제특구사업을 통해 낙후한 북한 경제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나 보장을 얻는 것이야말로 당면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3월 말 대표적인 경제통인 박봉주를 총리로 임명한 이래, 경제개발을 위한 평양의 행보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있다. 6월 5일에는 경제특구를 지정해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기회와 혜택을 보장하는 ‘경제개발구법’을 채택했다. 유럽 기업 대표단이 대북 투자 기회를 가늠하려고 9월 하순 방북할 것이라는 소식도 이어졌다. 대북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네덜란드계 자문회사는 서구권 주요국을 무대로 이미 활발히 활동 중이다. 북한이 싱가포르 비정부기구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료들에게 경제·경영 분야 연수를 진행한다는 사실도 속속 확인된다.
이러한 투자 논의에 관여했던 한 외국인사는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처럼 단순히 인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형태가 아니라, 자본투자를 유치해 북한 경제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게 기본적인 구상”이라고 말했다.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국내법적 준비는 정비를 마쳤지만, 문제는 한반도 상황이 고강도 긴장을 유지하는 채로는 외국기업들이 선뜻 나서기 어렵다는 것. 6자회담 논의를 통해 미국 등 주요국의 경제·금융제재가 종료되고 관련한 투자보장협정이 마련되는 것만으로도 평양으로서는 상당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장 금융제재가 풀려 외환 금융결제가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개선일 수 있다.
2·29합의는 지난해 4월 북한의 은하3호 로켓 발사로 붕괴된 바 있다. 당시 미국은 ‘미사일 발사실험 중단’이라는 합의내용 위반이라고 주장했지만, 북측은 로켓 발사는 주권사항이며 미사일 발사가 아니라고 맞섰다. 그러나 앞으로의 협상국면에서는 로켓 발사를 중단 대상에 포함하거나 영양 지원 등 단기적 반대급부를 포기하는 등의 부차적 쟁점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으리라는 게 정부 주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반면 이미 완공단계에 접어든 영변 핵 단지의 100MWe 경수로는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를 공산이 크다. 미국은 이를 통한 핵물질 추가 추출을 우려하지만 북측은 민수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 워싱턴이 경수로 가동 중단을 요구할 경우 평양은 그에 상응하는 중유 등 에너지 지원을 요구하고 나설 것으로 보인다.
2012년 5월 21일 한미일 3국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회담을 갖고 있다.
반면 2·29합의를 복원하는 것에 대한 워싱턴의 태도는 한층 강경하다. 북한의 로켓 발사로 합의가 깨진 만큼 그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다. 당시 합의됐던 영양 지원이 제외되는 것은 물론, 북한이 은폐해둔 비밀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선행돼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핵화와 대화에 대한 의지를 입증해보이라는 요구다. 이 또한 이미 영변 우라늄농축시설을 자청해 공개한 바 있는 평양으로서는 ‘절대로 고려할 수 없는 전제조건’은 아닐 것이라고 당국자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입구일 뿐, 실제로 6자회담이 열린다면 국면은 다시 한 번 바뀔 수 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워싱턴으로서도 ‘추가 생산능력 동결’이라는 2·29합의의 기본 틀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핵무기 11기 남짓만으로도 미국에 대한 억제력을 완성했다고 주장하는 평양과 달리, 미국식 억제전략은 이 정도 수준은 자신에게 ‘근본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오히려 추가생산능력을 내버려둬 북측 핵무기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 미 본토를 포함한 자신들에 대한 위험도 한층 커질 공산이 크다.
5월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옆 외교부 브리핑룸에서 열린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내외신 첫 합동기자회견. 이날 윤 장관은 북한의 6자회담 참여 등 다양한 주제로 회견했다.
북한의 현존 핵 능력을 적절히 묵인하는 이러한 합의가 기본 틀이 된다 해도, 미국으로선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논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맞교환하는 과제를 6자회담이나 여기서 파생된 다른 협의체를 통해 추후 논의해 나간다는 합의도 함께 이뤄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추가 생산능력을 동결하고, 핵 능력을 되돌리는 일은 장기적으로 논의한다는 이른바 ‘투트랙(Two Track)’ 전략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평양이 영변의 100MWe 경수로와 우라늄농축시설 가동 중단을 대가로 에너지 지원 등을 요구할 경우다. 워싱턴은 이러한 단기적 반대급부 제공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고, 이러한 부담은 한국 측이 떠안기를 바라는 속내가 강하다는 게 미국 측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최근 오바마 행정부가 ‘북핵 문제에서 한국의 주도적 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 때문 아니겠느냐는 시각이 힘을 얻는 이유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일단 북한 핵 능력이 강화되는 것만 틀어막고 비핵화·평화체제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뒤로 돌리는 이러한 그림은 1994년 제네바 합의나 2007년 2·13합의 등에서 이미 등장했던 구도다. 그러나 이러한 틀은 대부분 워싱턴에서 정권이 교체되거나 평양이 추가도발을 감행하면서 모두 깨지고 말았다. 쉽게 말해 이미 붕괴한 틀을 되살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꾸로 평양도 미국에서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 말짱 도루묵이 될 공산이 적지 않다고 보는 평화협정 등 ‘말로 된 약속’에 집착하지 않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북한과 미국이 이러한 틀에 합의한다고 해도, 속으로는 그 유효기간을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가 유지되는 3~4년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사이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하고 나면 2017년 이후에 다시 한 번 위기국면을 조성해 다음 단계의 반대급부를 얻으려 할 수 있다. 위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핵실험과 농축으로 핵 능력을 강화하고, 협상국면에 접어들면 다시 이를 잠정적으로 인정받는 대신 경제적·제도적 반대급부를 챙기는 사이클을 반복한다는 복안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이클은 1, 2차 북핵 위기와 지난해 이후 상황을 통해 계속 이어져왔다. 평양으로서는 그들 나름대로 ‘검증된 전략’이라는 뜻이다. 2~4월 초강경국면이 핵 능력을 과시하는 단계였다면 이제 시작되는 협상국면은 대가를 챙기는 ‘수확철’이라는 의미다.
#3 서울의 처지
마지막 변수가 있다. 이러한 타협이 현실화되면 북핵의 유일한 볼모로 남게 되는 한국의 처지다. 핵무기 11기 남짓만으로도 서울은 충분히 위협을 느끼고, 따라서 이들 핵무기를 줄이거나 폐기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오히려 당면과제일 수밖에 없다. 미국 처지에서는 동결이 급할지 모르지만 서울은 근본적인 비핵화가 훨씬 핵심적인 이슈다.
한국 처지에서 가장 큰 딜레마는 이를 압박할 카드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6자회담 테이블을 통해 경제지원이나 평화체제 등을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던진다 해도, 평양이 이미 완성해둔 핵무기를 버리고 ‘말로 된 약속’을 믿을 개연성은 높지 않다. 결국 ‘단기적으로 핵 능력 동결 + 근본적 비핵화는 장기적으로 논의’라는 이전 사이클에 휘말릴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를 한국만이 독자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북한의 핵 능력 강화를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데다, 핵무기 수가 일정 수위를 넘어서면 아예 북한이 인도, 파키스탄처럼 잠정적 핵보유국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미국이나 중국이 이러한 틀로 논의를 이끌어가는 것을 막아서는 ‘외교적 노력’뿐이다. 서두에서 인용한 전직 고위당국자의 말에는 바로 이러한 맥락이 깔려 있다. 이제 막이 오르는 협상국면에서 한국이 핵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지금까지 본 것처럼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를 강요받을 수 있는 까닭이다. 어떻게든 ‘비명을 질러대는’ 일의 중요성이다. 지금 따져야 하는 것은 남북관계의 원칙론이나 ‘형식’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내용’ 문제라는 의미다.
정부 당국자들이 최근 남북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주 드는 비유 가운데 하나가 ‘갑을 관계’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매달려왔다면 앞으로는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는 취지다. 평양이 경제개발에 목을 매는 현재로서는 남측이 갑일 수 있다는 말도 이어진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협상국면이 붕괴할 경우 북측은 반대급부를 얻을 수 없지만, 한반도 상황도 훨씬 악화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여전히 시간은 평양 편이고,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지극히 적다. 유효기간이 고작 3년에 불과해 보이는 합의라도 마다하기 어려운 한국의 처지다. 긴장과 협상의 반복 사이클을 깰 능력이 없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