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출석해 법정으로 들어가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최재원 수석부회장.
두 사람은 SK그룹 계열사가 출자한 펀드 자금을 주고받은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이다.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의 자금거래가 최 회장 주도하에 이뤄졌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실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두 사람 간 자금거래일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과연 누구 말이 진실일까.
김준홍 “나는 깃털, 몸통은 그들”
김 전 고문이 법원의 증인 채택에도 응하지 않은 채 외국에 도피 중인 상황에서 항소심 재판부는 수감 중인 김 전 대표에 대한 집중 신문을 통해 사건 실체에 접근해가고 있다. 김 전 대표의 입에 최 회장 형제의 운명이 걸린 셈이다.
김 전 대표가 2008년 SK그룹 계열사가 출자한 펀드 자금 451억 원을 김 전 고문에게 송금한 게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SK그룹 계열사 자금 횡령사건의 실체다. 이 자금거래를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이 최 회장인지가 사건의 핵심 쟁점이다.
1심 재판부는 SK그룹 차원에서 펀드를 조성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은 최 회장밖에 없다며 여러 간접 정황과 추론을 근거로 최 회장을 주범으로 판단했다. 최 회장에게 펀드 조성을 제안하고 해외에 있던 김 전 고문에게 펀드 인출금(횡령액)을 보낸 실행자인 김 전 대표를 공범으로 보고 유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최 회장 동생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은 펀드 조성을 지휘할 만한 영향력이 없는 인물로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전 대표는 1심 재판에서 SK그룹 계열사가 출자한 펀드 조성과 인출에 자신이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선 진술을 180도 바꿨다.
‘양심 고백’ 모드로 항소심에 임하는 그는 펀드 조성 및 인출 과정에서 자신은 ‘주역’ ‘실무자’가 아니라, ‘단순한 심부름꾼’이었다고 주장했다. 중국에 체류 중인 김 전 고문이 시키는 대로 2008년 10월 말 최 회장을 만났고, 최 회장이 만들어준 SK그룹 계열사의 펀드 출자금 451억 원을 김 전 고문에게 송금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최 수석부회장이 펀드를 통한 자금 조성 과정을 챙겼다는것. 요약하면, 자신은 ‘깃털’일 뿐 ‘몸통’은 ‘그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검찰 수사와 1심, 항소심을 거치면서 자주 뒤바뀐 그의 진술을 항소심 재판부가 어디까지 믿을까 하는 점이다. 김 전 대표는 2011년 검찰 수사 초기엔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진술했다가 중간에 최 회장 형제의 개입을 주장하더니 1심에선 다시 단독범행이라고 진술을 바꿨다.
오락가락하는 진술은 항소심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펀드 자금 인출 및 송금에 최 회장이 당연히 개입한 것처럼 진술했던 그는 6월 21일 항소심 9차 공판에선 “최 회장이 몰랐던 것 같다”고 상반된 진술을 했다. 2011년 SK그룹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펀드 자금 유출이 드러났고, 이를 최 회장에게 보고했을 때 “펀드 하는 사람이 자금을 이렇게 관리하면 어떡하느냐고 타박과 야단을 맞았으며 이후 관계가 서먹해졌다”면서 “최 회장의 이런 반응을 볼 때 최 회장은 펀드 인출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김 전 대표와 그의 변호인은 진술이 자주 바뀐 이유가 최 회장 형제를 보호하려는 1심 최 회장 형제 변호인단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변호인단의 재판전략에 따라 허위 진술을 했지만, 이젠 고해성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으며, 항소심 법정에서 하는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 회장 변호인단은 강하게 반발한다. 최 회장에게 총애를 받으며 자금관리를 해오던 김 전 대표가 김 전 고문과 공모해 SK그룹 계열사 자금으로 사적 거래를 한 것이 이번 사건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두 사람의 자금거래 명세를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김 전 대표가 2008년 10월 말 김 전 고문에게 보낸 1차 송금액은 201억 원. 김 전 대표는 이전에 김 전 고문으로부터 받은 투자수익금 201억 원을 차입금 형식으로 변제하는 형식을 갖추려고 그렇게 액수를 정했다고 설명한다. 만약 그 돈이 최 회장의 투자금이 맞다면 단순한 심부름꾼 구실을 하면서 자신의 세무적 이익을 도모했다는 얘기다.
최 회장 측 “김준홍-김원홍 개인 거래”
6월 24일 항소심 10차 공판에서 최 회장 변호인은 “김준홍은 문제의 451억 원을 송금할 당시 한 달 내에 돌려받는다는 계약서를 김원홍과 작성했다. 최 회장이 김원홍에게 투자금을 보낼 때 한 달 내에 돌려받기로 하고 송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사실만 봐도 이번 사건은 최 회장 형제를 이용한 김준홍과 김원홍 두 사람의 개인 거래”라고 주장했다.
최 수석부회장과 관련한 진술에서도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김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451억 원이 세 차례로 쪼개져 송금됐는데, 1차 송금은 자신이 알아서 했지만 2, 3차 송금 때는 최 수석부회장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펀드가 공식 출범하기 전에 SK E·S로부터 펀드 자금을 선지급받을 때도 최 수석부회장의 도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와 1심 재판에선 하지 않았던 새로운 진술이다.
최 수석부회장 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펄쩍 뛴다. 변호인단은 “김준홍이 자기 보호본능에 따라 거짓말을 한다. 펀드 조성에도 관여하지 않은 최 수석부회장이 송금 과정에 개입했다는 것은 난센스다. 최 수석부회장을 끌어들이지 마라”고 반박한다.
항소심 과정에서 드러난 재판부(서울고등법원 형사4부·재판장 문용선 부장판사)의 인식은 김 전 대표의 증언이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재판 관전자들은 그의 진술이 자주 뒤바뀌는 것에 대해 재판부가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어 결과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재판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김 전 고문을 제외하면 신문은 거의 끝나간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차지하는 김 전 고문의 구실을 중시해 그를 증인으로 채택했지만, 검찰 조사는 물론 1심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그가 구속을 무릅쓰고 증인으로 나설 개연성은 거의 없다. 1심부터 1년 반을 끌어온 이번 사건 피고인들의 말은 엇갈린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재판부가 어떻게 풀어갈지, 이제 SK그룹 사건은 사실상 피고인 신문과 검찰 구형만 남겨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