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자원화전’ 중 난시준. 2 가짜 ‘계상정거도’.
순식간에 그린 절강추도도
비 내리고 천둥 치던 1719년 어느 밤, 이하곤(1677~1724)은 정선이 자신 앞에서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치는 그림 ‘풍우취지(風雨驟至)’ 를 그리는 것을 봤다. 그는 한때 정선의 산수화가 윤두서(1668~1715)의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정선의 그림이 고루하고 천박한 우리 그림의 병을 바로잡고 화가의 오묘한 비결을 얻었으며, 그림을 바삐 그렸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법도와 형태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또한 정선이 농묵으로 거듭된 산과 봉우리, 큰 나무숲과 늙은 나무를 잘 그렸다고도 했다.
1738년 어느 겨울 저녁, 흥에 겨운 정선은 막내아들 정만수(1710~1795)를 데리고 가까이 살던 조영석(1686~1761)의 집에 쳐들어가 붓과 벼루를 찾았다. 그러고는 밀린 숙제를 벼락치기하듯 순식간에 조영석 집의 문짝 세 칸에 파도가 넘실대는 ‘절강추도도(浙江秋濤圖)’를 그렸다. 그의 나이 63세 때 일로 그림 필세(筆勢)가 웅장했다. 그는 80세가 돼서도 안경을 쓰고 밤중에 그림을 그렸으며, 82세 때 부채 그림에 쓴 작은 글씨는 정교함이 실낱같다. 80세가 넘어 그린 산수화 소품은 여전히 그 기세가 웅장하고 굳셌다.
시서화에 능한 문인화가 조영석은 말년에 정선과 가까이 살면서 30년을 아침저녁으로 마주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정선 산수화의 빠른 붓놀림과 웅혼하고 역동적인 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자신의 정교한 그림엔 정선이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정선의 새로운 스타일이 조선 300년 역사에서 산수화의 신세계를 열었다고 봤고,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정선 말년 그림의 특징을 짚었다.
“정선은 일찍이 백악산 아래에 살았는데 흥이 나면 산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렸다. 산을 그리는 준법( 法)과 먹을 씀에 마음속에서 스스로 깨침이 있었다. 금강산 안팎을 드나들고 영남(嶺南)을 두루 다녔으며, 여러 명승을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모두 얻었다. (중략)그러나 내가 정선이 금강산을 그린 여러 화첩을 보니 모두 붓 두 개의 끝을 뾰족하게 세워 비로 쓸 듯 난시준(亂柴 )으로 그렸는데, 이 두루마리 그림 또한 그렇다. 어찌 영동(嶺東)과 영남의 산 모양이 같아 똑같이 그렸겠는가. 정선이 그림 그리기가 권태로워 일부러 이처럼 편하고 빠른 방법을 취한 것이다.”
조영석은 정선이 난시준(그림1)으로 모든 산을 다 똑같이 그린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는 이를 정선이 중년부터 노년까지 많은 그림 요구에 대응한 ‘권태로운 붓놀림(倦筆)’이라고 폄하했다. 심지어 강세황(1713~1791)은 정선이 평생 익힌 필법으로 돌 모양이나 산 형태를 막론하고 똑같은 화법(열마준·裂麻 )으로 마음대로 그렸기에 그가 진경을 그렸다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림1’은 1679년 간행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산을 그리는 준법 가운데 난시준이다. 난시준은 산수화 준법에서도 일상적이지 않아 많은 화가가 우연히 썼다. 한중일 삼국에서 유일하게 정선이 이를 발전시켜 자신만의 준법으로 만든 것이다. 그가 새롭게 창조한 진경산수화는 바로 난시준으로 만들었다. 미친 듯이 빠르게 그리는 난시준은 그의 그림 감정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다.
정선이 1747년 그린,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문암’ ‘총석정’ ‘만폭동’에는 아래로 긋든 옆으로 긋든, 그리고 길이가 길든 짧든 필획의 삐침과 필획 사이를 잇는 연결선이 그대로 나타난다. 정선 그림에서 위조자가 가장 흉내 내기 힘든 것이 바로 필획과 필획을 이어주는 난잡한 듯 보이는 가는 필선이다. 이러한 붓놀림은 그가 붓글씨를 쓰듯 빠르게 붓의 탄력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증거다. ‘문암’ ‘총석정’ ‘만폭동’에 사용한 난시준은 옆으로 긋거나 아래로 그은 필획의 끝을 붓글씨의 ‘ ’처럼 삐쳤다.
3 난시준 비교. 4 물결 묘사 비교. 5 나무 묘사 비교.
6 이병연 글씨 비교. 7 임헌회 글씨 비교.
정선이 1747년 그린 ‘문암’ ‘총석정’ ‘만폭동’과 1년 전인 1746년에 그린, 1000원권 뒷면의 그림 ‘계상정거도’(그림2)를 비교하면, ‘계상정거도’는 난시준을 모르는 위조자가 만든 가짜다(그림3). ‘계상정거도’가 있는 ‘퇴우이선생진적’(보물 제585호)에는 동일한 위조자가 그린 ‘무봉산중도’ ‘풍계유택도’ ‘인곡정사도’가 있다.
물결 묘사는 예부터 화가 필력을 가늠하는 척도다. 정선이 1747년 그린 ‘화적연’과 ‘삼부연’은 붓끝이 획 중간에 위치한 중봉(中鋒)으로 거침없이 빠르고 경쾌하게 이어지듯 그려졌다. 가짜 ‘계상정거도’의 물결은 붓끝이 바깥쪽으로 치우친 측봉(側鋒)으로 힘없이 느리듯 끊어지게 그려졌다(그림4).
정선이 1742년 그린 ‘웅연계람’과 1747년 그린 ‘해산정’의 나무는 먹 농담을 정교하게 조절했을 뿐 아니라, 농묵으로 한 번에 자신 있고 분명한 필획을 리듬감 있게 구사했다. 가짜 ‘계상정거도’의 나무는 먹 농담이 전체적으로 옅고, 담묵으로 그린 위로 다시 담묵이나 농묵으로 지저분하게 덧칠했다. 나무 사이사이 또한 대충 그려서 간격도 제멋대로이며 리듬감도 없다(그림5).
‘퇴우이선생진적’은 4폭 정선 그림 외에도, 이병연과 임헌회(1811~1876)의 글씨가 가짜다. 만약 이병연이 ‘퇴우이선생진적’에 글씨를 썼다면 반드시 정만수가 글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만수는 이병연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병연의 가짜 글씨를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이병연의 ‘시’와 비교하면, 가짜는 글자를 이어서 쓴 데 반해 진짜는 한 자씩 힘을 들여 썼음을 알 수 있다. 글자나 글자 변을 세심하게 비교하면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분명해진다(그림6).
임헌회의 가짜 글씨를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근묵’ 속 임헌회의 ‘서찰’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가짜는 필획이 가볍고 글자 줄을 삐뚤게 쓴 데 반해, 진짜는 필획이 무겁고 글자 줄이 서로 이어지고 반듯하다. 구체적으로 몇 글자만 비교해도 진위가 바로 보인다(그림7).
이천보(1698~1761)는 “정선을 배우는 사람들은 정선의 필력 없이 헛되이 그 화법을 훔치려 한다”고 했다. 이는 가짜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정선은 강한 필력으로 미친 듯이 빠르고 정확히 그렸기에, 작품 크기에 상관없이 그 기세가 역동적이고 웅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