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나이 지긋한 신사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국내 대기업 전무였으며 얼마 전까지 중견기업 부사장으로 재직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갈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필자가 추천하려면 이력서가 필요하니 한 부 작성해 보내달라고 요청하니, “어느 기업 임원이었고, 부사장이었다고 말씀드렸으면 제 경력에 대해 충분히 아실 만한데, 이력서까지 써야 합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런 분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때마다 ‘제발 어깨 힘을 좀 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깨 힘을 뺀다’는 말의 구체적 의미는 현실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자기 포지션이 이른바 잘나가는 임원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는 구직자로 변했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갈 만한 새로운 직장은 어디인지, 그 회사는 어떤 임원을 원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어떤 성과를 냈고, 또 자신의 리더십은 어떠하며, 새로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은 무엇인지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 이력서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줘야 할 뿐 아니라, 면접에서도 자신을 적극 알려야 한다. 많은 임원이 면접관(interviewer)으로서는 익숙하지만, 면접자(interviewee)가 되는 데는 익숙지 않다. 그래서 이제 자신이 면접자가 됐음을 인지하고, 자기 능력을 어떻게 어필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깨 힘을 빼는 첫걸음이다.
간혹 “중견기업에서는 대기업 임원을 서로 모셔가려고 하는데 굳이 어깨 힘을 빼야 하느냐”고 묻는 분이 있다. 물론 중견기업에서 대기업 임원 출신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기업 임원 출신이 어디 한두 명인가. 매년 인사철이면 수많은 임원이 퇴직한다. 작년 말 S그룹 계열사 한 곳에서만 20명 가까운 임원이 퇴직했다. S그룹 전체, 30대 그룹 계열사, 유명 외국계 기업 등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면 퇴직 임원 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반면 임원급을 채용하는 기업은 몇 곳이나 될까. 더욱이 임원급 채용은 매우 신중하게 진행된다. 경쟁은 이렇게 치열한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알아봐달라’고 하는 것은 경쟁에서 낙오하는 길을 선택하는 셈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상무였던 A씨는 퇴직 후 중견기업 상무로 이직했다. 그의 이직을 두고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이직할 때는 직급을 올려서 가거나, 직급이 같다면 다른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A씨는 직급도 같고, 연봉도 비슷한 조건을 선택했다. 더 따지고 들면, 새로 이직한 회사는 업계 순위가 과거 회사보다 많이 낮고, 회장님 성정도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함께 퇴직한 동료 가운데 자신보다 훨씬 안 좋은 조건에서 일하거나, 재취업 기회조차 잡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퇴직을 앞뒀거나 이미 퇴직한 상태라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일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것이다. 실상 은퇴하기엔 당신은 아직 젊다. 다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그 변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A씨처럼 하루빨리 어깨 힘을 빼야 한다. 자신은 이제 구직자라는 점, 젊은 시절처럼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변해야 한다. 어깨 힘을 빼고 유연한 자세로 문을 두드리면, 새로운 기회 문이 열릴 것이다. 10여 년 동안 헤드헌팅을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분이 어깨 힘을 빼지 못해 실패하는 사례를 지켜봤다. 당신은 이런 우를 범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