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쨌든 불편한 영화
김기덕 감독 영화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불편하다’는 서술어 속에는 김 감독 영화가 가진 여러 특징이 함축돼 있다. 첫째, 보기에 불편하다. 워낙 잔인하고 잔혹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잔인함에도 여러 차원이 있다. 가령 이창동 감독 작품 ‘밀양’처럼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별 다른 동요 없이 들여다보는 것도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 감독이 표현하는 잔인함은 문자 그대로, 축자적 잔인함이다. 그러니까 날카로운 칼이 눈을 파고, 반쯤 회가 떠진 물고기가 연못을 헤엄치거나 엄마 가슴에 새겨진 문신을 칼로 파낸다. 공포영화 속에 등장하는 칼처럼 김 감독 영화에서 칼은 그렇게 흉기로 사용된다.
두 번째 불편함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누추한 욕망을 굳이 들춰낸다는 점이다. ‘나쁜 남자’에서 벌레처럼 사회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창가 포주는 깨끗하고 무구한 여대생을 납치해 창녀로 만든다. 이런 식이다. 그녀가 나와 상대가 안 될 만큼 순진하고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면 그녀를 같은 처지로 끌어내리는 식 말이다. 도덕이나 질서 개념에서 보자면 그것은 파렴치고 불법이다.
하지만 욕망 차원에서 보면 어떨까. 가난하다고, 학벌이 부족하다고, 키가 작다고 ‘나’를 무시했던 여성에게 한 번쯤 가져봄직한 나쁜 욕망이 아닐까. 김 감독은 그렇게 마음속 깊은 응달에 숨겨 놓은 나쁜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뜨끔한 죄책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세 번째 불편함은 그의 영화가 주로 이미지를 통해 연쇄된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래도 대중에게 꽤 친절한 영화로 기억되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눈, 코, 입을 모두 ‘폐(閉)’ 자로 막은 여자가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나, 소년이 개구리를 죽이고 성인이 된 남자가 허리에 큰 돌을 묶고 걸어가는 장면은 서사적이라기보다 이미지에 의존한다. 마치 시처럼 상징적이기에 강렬하지만 이야기로 풀어내기엔 어렵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에 대해 불친절하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실 지옥과도 같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는 데 있다. ‘사마리아’에서처럼 우리는 10대 소녀의 육체를 매매하는 세상에서 살고, ‘피에타’처럼 빚 300만 원이 3000만 원으로 되돌아오는 비논리적 세계에서 산다. 김 감독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미친 사람이거나 짐승처럼 잔혹하지만, 빚을 갚으려고 자기 신체 일부를 포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상인처럼 지낸다. 과연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아니, 빚 300만 원이 한 달 만에 3000만 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과연 논리적 계산법으로 설명 가능할까. 김 감독은 바로 그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 원초적 폭력성 탐구에 주목
김기덕 감독 영화는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환대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예술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다곤 하지만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그래도 꽤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에 비해서는 이채롭다. 게다가 김 감독은 많은 여성 평론가와 영화 전문가에게 폭력적 마초라는 비난도 종종 받는다. 여성 신체를 훼손하기 일쑤고, 여성을 창녀에 비유하는 직설법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영화는 늘 폭력적이다. 일부러 칠판을 긁어대는 아이처럼 그는 영화 속에서 불편한 자상의 이미지를 계속 기입해왔다. 눈을 연필로 찌르는 장면이나 바늘을 점액질의 신체에 집어넣는 행위는 과연 표현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폭력성이 선정성을 띤 포르노그래피적 선택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포르노그래피적 선정성이나 폭력이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선사한다면 김 감독의 영화는 폭력과 그 잔혹함에 대한 거부 반응을 길어낸다. 그는 욕망 깊은 곳에 원초적 폭력성이 자리한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세계 영화계가 김 감독 영화에 보이는 관심은 그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놓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시작해 여성에 대한 소유욕,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질문 등 그는 삶이 포함하는 여러 심리적 국면을 매우 원초적 방식으로 재현한다. 박찬욱, 이창동 감독이 문명화하고 세련된 질문 방식을 선택하는 데 비해, 김 감독의 방식은 덜 세련되고 덜 문명화돼 날것 그대로에 가깝다. 그런데 이 원초적 질문의 방식은 뭔가 세련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핵심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해외 영화제가 발견한 김 감독도 마찬가지다. 날것이면서 거칠고 조악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에는 어딘가 사람의 관심을 끄는 근본적 질문이 있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초기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한국 로컬리티, 즉 지역성을 잘 보여주는 것에 한정됐다. 에드워드 사이드 식으로 표현하자면, 머나먼 동방 국가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으로 한국 영화를 바라본 것이다. ‘취화선’ ‘춘향전’ 등 한국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작품이 시선을 끌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이후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임상수 감독은 한국적 특성을 이야기, 즉 서사로 재현해냈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머나먼 동양국가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삶의 아이러니를 포함한 보편적 이야기이기도 했다. ‘밀양’은 용서에 대한 문제에 천착했고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이 영화들에 대해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막상 세계 영화제의 주요 프로그래머나 집행위원장은 이 작품들에서 한국 영화의 개성을 읽어낸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한국 영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폭력성’이다. 가령 ‘올드보이’에서 장도리로 이를 뽑는 장면 말이다. 그들은 장면의 잔혹함 자체가 아니라 그런 폭력성을 그다지 큰 장애 없이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에 더 놀라워한다. 생각보다 우리는 영화의 외설성에는 엄격하지만 폭력성에는 관대한 편이다. 조폭영화로 잘 알려진 대중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김 감독 영화에서 추구하는 욕망의 원초적 폭력성과 삶의 잔혹함은 사실 그의 일관된 주제의식이기도 하지만, 최근 유럽 영화가 주목하는 동시대적 문제이기도 하다. 게다가 김 감독은 ‘피에타’에서 자신의 일관된 주제 의식에 동시대적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도 보탰다. 늘 개인의 욕망 문제를 탐색하던 김 감독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자 베니스는 열광했다. 개인적 문제와 사회적 질문의 결합, 사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주제이니 말이다.
‘피에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았다면 기존 김 감독의 영화와 다를 바 없다. 1996년 첫 작품에서부터 거듭 지옥 같은 세상을 그려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피에타’에서 김 감독은 ‘이 지옥 같은 삶을 어떻게 관통해나가야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빚진 돈을 받아내려고 피도 눈물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강도’는 돈의 노예가 됐지만, 그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 우리를 상징한다.
# ‘피에타’, 우리 사는 지옥 조명
김 감독은 결국 이 지독한 삶은 반성과 회개, 사죄를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강도’ 같은 인물이 먼저 반성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지옥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문제적인 것은 김 감독이 늘 경멸하고 적대시했던 무엇, 즉 모성이 바로 구원의 열쇠로 제시된다는 사실이다. 조민수가 열연한 ‘어머니’는 지옥 같은 세상을 그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자비의 원천이다. 차가운 금속성을 띠는 청계천 공장지대를 그녀는 두텁고 따뜻한 니트를 입은 채 걸어간다.
김 감독이 그린 모성은 복수에서 시작했지만 자비를 베푸는 어머니다. 그 어머니의 자비를 통해 강도는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사죄한다. 강도의 사죄는 강제적이거나 복수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지은 모든 잘못을 반성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는 행동과도 같다.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결연한 순교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많은 유럽계 지성은 무너진 경제 속에서 자본의 엄혹함을 발견해낸다. 국가 부도 사태,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화려한 관광지이자 문화유적 뒤의 응달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의 허상과 동유럽의 경제난, 그리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지금 유럽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다.
이는 비단 유럽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속 강도가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본 청계천 공장지대의 삶, 소규모 자영업자의 죽음 위에 놓인 고층 빌딩의 향연은 자본이 곧 주인인 세상 풍경이 유럽이나 이곳이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자본과 돈으로만 움직이는 세상, 그것이 바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는 지옥이며 이 지옥을 탈출할 열쇠는 우리 모두가 태어난 유일한 안식처, 자궁, 어머니다. 이 당연한 질문과 보편적 대답이 베니스를 움직인 셈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그렇듯 대개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김기덕 감독 영화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불편하다는 것이다. ‘불편하다’는 서술어 속에는 김 감독 영화가 가진 여러 특징이 함축돼 있다. 첫째, 보기에 불편하다. 워낙 잔인하고 잔혹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잔인함에도 여러 차원이 있다. 가령 이창동 감독 작품 ‘밀양’처럼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을 별 다른 동요 없이 들여다보는 것도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 감독이 표현하는 잔인함은 문자 그대로, 축자적 잔인함이다. 그러니까 날카로운 칼이 눈을 파고, 반쯤 회가 떠진 물고기가 연못을 헤엄치거나 엄마 가슴에 새겨진 문신을 칼로 파낸다. 공포영화 속에 등장하는 칼처럼 김 감독 영화에서 칼은 그렇게 흉기로 사용된다.
두 번째 불편함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누추한 욕망을 굳이 들춰낸다는 점이다. ‘나쁜 남자’에서 벌레처럼 사회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창가 포주는 깨끗하고 무구한 여대생을 납치해 창녀로 만든다. 이런 식이다. 그녀가 나와 상대가 안 될 만큼 순진하고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면 그녀를 같은 처지로 끌어내리는 식 말이다. 도덕이나 질서 개념에서 보자면 그것은 파렴치고 불법이다.
하지만 욕망 차원에서 보면 어떨까. 가난하다고, 학벌이 부족하다고, 키가 작다고 ‘나’를 무시했던 여성에게 한 번쯤 가져봄직한 나쁜 욕망이 아닐까. 김 감독은 그렇게 마음속 깊은 응달에 숨겨 놓은 나쁜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뜨끔한 죄책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세 번째 불편함은 그의 영화가 주로 이미지를 통해 연쇄된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래도 대중에게 꽤 친절한 영화로 기억되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서 눈, 코, 입을 모두 ‘폐(閉)’ 자로 막은 여자가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나, 소년이 개구리를 죽이고 성인이 된 남자가 허리에 큰 돌을 묶고 걸어가는 장면은 서사적이라기보다 이미지에 의존한다. 마치 시처럼 상징적이기에 강렬하지만 이야기로 풀어내기엔 어렵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에 대해 불친절하다.
마지막으로 김 감독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실 지옥과도 같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는 데 있다. ‘사마리아’에서처럼 우리는 10대 소녀의 육체를 매매하는 세상에서 살고, ‘피에타’처럼 빚 300만 원이 3000만 원으로 되돌아오는 비논리적 세계에서 산다. 김 감독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미친 사람이거나 짐승처럼 잔혹하지만, 빚을 갚으려고 자기 신체 일부를 포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상인처럼 지낸다. 과연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아니, 빚 300만 원이 한 달 만에 3000만 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과연 논리적 계산법으로 설명 가능할까. 김 감독은 바로 그런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 원초적 폭력성 탐구에 주목
김기덕 감독 영화는 국내에서 대중적으로 환대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예술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다곤 하지만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그래도 꽤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에 비해서는 이채롭다. 게다가 김 감독은 많은 여성 평론가와 영화 전문가에게 폭력적 마초라는 비난도 종종 받는다. 여성 신체를 훼손하기 일쑤고, 여성을 창녀에 비유하는 직설법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영화는 늘 폭력적이다. 일부러 칠판을 긁어대는 아이처럼 그는 영화 속에서 불편한 자상의 이미지를 계속 기입해왔다. 눈을 연필로 찌르는 장면이나 바늘을 점액질의 신체에 집어넣는 행위는 과연 표현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폭력성이 선정성을 띤 포르노그래피적 선택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포르노그래피적 선정성이나 폭력이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선사한다면 김 감독의 영화는 폭력과 그 잔혹함에 대한 거부 반응을 길어낸다. 그는 욕망 깊은 곳에 원초적 폭력성이 자리한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세계 영화계가 김 감독 영화에 보이는 관심은 그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놓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시작해 여성에 대한 소유욕,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질문 등 그는 삶이 포함하는 여러 심리적 국면을 매우 원초적 방식으로 재현한다. 박찬욱, 이창동 감독이 문명화하고 세련된 질문 방식을 선택하는 데 비해, 김 감독의 방식은 덜 세련되고 덜 문명화돼 날것 그대로에 가깝다. 그런데 이 원초적 질문의 방식은 뭔가 세련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핵심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해외 영화제가 발견한 김 감독도 마찬가지다. 날것이면서 거칠고 조악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에는 어딘가 사람의 관심을 끄는 근본적 질문이 있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초기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주로 한국 로컬리티, 즉 지역성을 잘 보여주는 것에 한정됐다. 에드워드 사이드 식으로 표현하자면, 머나먼 동방 국가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으로 한국 영화를 바라본 것이다. ‘취화선’ ‘춘향전’ 등 한국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작품이 시선을 끌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이후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임상수 감독은 한국적 특성을 이야기, 즉 서사로 재현해냈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머나먼 동양국가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삶의 아이러니를 포함한 보편적 이야기이기도 했다. ‘밀양’은 용서에 대한 문제에 천착했고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이 영화들에 대해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막상 세계 영화제의 주요 프로그래머나 집행위원장은 이 작품들에서 한국 영화의 개성을 읽어낸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한국 영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폭력성’이다. 가령 ‘올드보이’에서 장도리로 이를 뽑는 장면 말이다. 그들은 장면의 잔혹함 자체가 아니라 그런 폭력성을 그다지 큰 장애 없이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에 더 놀라워한다. 생각보다 우리는 영화의 외설성에는 엄격하지만 폭력성에는 관대한 편이다. 조폭영화로 잘 알려진 대중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 걸렸던 ‘나쁜남자’ 포스터(왼쪽). 2012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피에타’.
‘피에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았다면 기존 김 감독의 영화와 다를 바 없다. 1996년 첫 작품에서부터 거듭 지옥 같은 세상을 그려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피에타’에서 김 감독은 ‘이 지옥 같은 삶을 어떻게 관통해나가야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빚진 돈을 받아내려고 피도 눈물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강도’는 돈의 노예가 됐지만, 그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 우리를 상징한다.
# ‘피에타’, 우리 사는 지옥 조명
김 감독은 결국 이 지독한 삶은 반성과 회개, 사죄를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강도’ 같은 인물이 먼저 반성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지옥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문제적인 것은 김 감독이 늘 경멸하고 적대시했던 무엇, 즉 모성이 바로 구원의 열쇠로 제시된다는 사실이다. 조민수가 열연한 ‘어머니’는 지옥 같은 세상을 그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자비의 원천이다. 차가운 금속성을 띠는 청계천 공장지대를 그녀는 두텁고 따뜻한 니트를 입은 채 걸어간다.
김 감독이 그린 모성은 복수에서 시작했지만 자비를 베푸는 어머니다. 그 어머니의 자비를 통해 강도는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사죄한다. 강도의 사죄는 강제적이거나 복수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지은 모든 잘못을 반성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는 행동과도 같다.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결연한 순교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많은 유럽계 지성은 무너진 경제 속에서 자본의 엄혹함을 발견해낸다. 국가 부도 사태,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 화려한 관광지이자 문화유적 뒤의 응달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의 허상과 동유럽의 경제난, 그리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지금 유럽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다.
이는 비단 유럽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 속 강도가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본 청계천 공장지대의 삶, 소규모 자영업자의 죽음 위에 놓인 고층 빌딩의 향연은 자본이 곧 주인인 세상 풍경이 유럽이나 이곳이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자본과 돈으로만 움직이는 세상, 그것이 바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는 지옥이며 이 지옥을 탈출할 열쇠는 우리 모두가 태어난 유일한 안식처, 자궁, 어머니다. 이 당연한 질문과 보편적 대답이 베니스를 움직인 셈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그렇듯 대개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