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북한 인권 침해 사례집’(이하 사례집)을 발간해 화제다. 인권위가 지난해 3월부터 탈북자 800명에게 신고를 받고 그중 60여 명을 면접해 내놓은 사례집에는 요덕, 개천, 북창, 회령 등 정치범수용소 4곳과 증산, 전거리 등 교화소(교도소) 2곳에서 벌어진 참상은 물론 수감자 278명의 나이, 직업, 수감 연도, 수감 이유, 수감 생활 등을 기록해놓았다. 국가기관이 북한 수용소에 갇힌 것으로 확인된 ‘수감자 명단’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례집에 실린 수감자의 70%에 해당하는 187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탈북자인 정광일(49)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모임 사무총장이다. 그가 이 일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사례집을 발간한 이튿날인 5월 7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그의 집을 찾았다. 거실에 금강산 사진이 걸린 아담한 아파트는 기자가 있는 동안에도 아픈 몸을 누이고 쉬다 가는 탈북자, 얘기를 하려고 왔다가 손님을 보고 발길을 돌리는 탈북자가 연달아 찾아올 정도로 개방된 공간이었다. 내내 현관문을 열어둔다는 그가 속내를 열어 보였다.
그는 “정치범수용소에 가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선평양무역회사 청진지사장으로 1997년 외화 70만 달러를 벌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표창까지 받았을 정도로 북한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중국 옌볜에서 북한 명태 1t을 중국 사람에게 300달러에 팔면 그 중국인이 바로 남한 사람에게 1800달러로 되팔아 ‘생 이윤’ 1500달러를 챙기는 모습을 본 뒤 남한 사람과 직거래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1년 동안 남모르게 재산을 챙기긴 했지만 그만큼 정부에 많은 돈을 바쳤다”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국가안전보위부(북한의 비밀경찰기구)에 체포돼 유치장에 갔어요. ‘비둘기 고문’(양팔과 다리를 뒤로 꺾어 오랫동안 매달아놓으면 중력으로 가슴뼈가 아래쪽으로 쏠려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고문)을 받으면서 10개월 만에 몸무게가 75kg에서 36kg이 됐죠. 결국 취조를 견디다 못해 거짓으로 간첩죄, 제도 비난죄, 비밀누설죄를 인정했어요. 이후 2000년 4월부터 함경북도 15호 수용소(요덕수용소)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루에 풀 1.2t을 벴어요. 이후 3인조장, 분조장을 거쳐 수감자를 총괄 감독하는 반장으로서 모범적으로 생활한 덕에 2003년 4월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2003년 탈북해 다음해 한국에 도착한 뒤 정씨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자신이 경험했던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수령님 때는 잘 먹었는데 지금은 왜 이런가’라고 푸념했던 사람, 신문에 김정일 사진이 있는 줄 모르고 찢어서 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 하찮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와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입국한 날부터 가구사업을 하고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5년 동안 자신이 머물던 요덕수용소 서림천 구역의 수감자 명단을 작성했다. 개인적인 수기를 쓸 수도 있었지만 “명단을 만들어야 현재 수감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거시적 차원에서 정치범수용소 상황을 정리한 것은 반장을 지낸 영향인 듯했다. 그곳에는 늘 200여 명이 있는데 매년 100여 명이 죽고 충원되기 때문에 3년간 그가 만난 사람은 500명이 넘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기억해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 그는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만나 재차 확인하면서 명부를 채워갔다.
명단 만들어 대내외에 관심 고취
이번에 인권위의 제안으로 사례집을 만드는 일은 그가 이미 작성해놓은 명단이라는 뼈대에 ‘수감자 생사 확인 작업’이라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렇기에 품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2008년 영국에 있는 북한대사관과 2011년 스위스 주재 북한대표부에 찾아가 명단에 수록된 수감자들의 생사 확인을 요청하며 북한 측과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끝내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오기가 났다”고 한다.
“사례집을 내면 북한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열심히 뛰었어요. 유엔에서 이 자료를 활용해 정치범수용소 사찰단을 파견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국제 사회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문제제기는 하지 않지만,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예요. 이곳이 없어지면 북한 주민이 체제 변화를 시도하면서 민주화를 이뤄내고 더 나아가 북핵 문제도 해결할 거예요. 물론 이 자료를 바탕으로 통일 후에는 정치범수용소의 가해자에게는 처벌을 내리고 피해자는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어요.”
그는 “생사 확인 작업을 하면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악몽을 꿨다”고 말한다. 요덕수용소는 한국의 1개 군만큼이나 큰 지역으로, 탈출을 방지하려고 3중 철조망을 쳤고, 철조망 사이에 8m 깊이의 구덩이를 파 죽창을 꽂아놓았다. 그곳에선 새벽 4시부터 아침 7시까지 산에 있는 돌을 싣고 와 나르고 다음 날 그 돌을 제자리에 갖다놓는 ‘조기작업’을 하고, 옥수수를 물에 불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묵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운다. 아침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157㎡(350평) 땅의 김을 매거나 풀 800kg을 베고, 겨울이면 도끼 한 자루로 한 아름 되는 나무를 7그루씩 찍어 넘어뜨린다. 일을 마치지 못하면 배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일한다. 이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그가 묻은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사례집 만들며 기억이 고통으로
하지만 사례집을 만들면서 그 안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무엇보다 힘들었다. 단 한 명이라도 대열에서 이탈하면 전부 굶어야 하는 집단처벌을 받는 까닭에 반장이던 그는 혼란을 막으려고 악역을 자처해야 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그에게 “나오지 말고 누워 있으라”는 명을 받아 영양실조로 죽었고, 대열을 이탈한 사람은 그의 신고로 결국 국가안전보위원에게 총살당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세 사람이 한 조가 돼 화장실까지 함께 가면서 서로를 감시하던 그곳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많이도 일어났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안쓰러운 생각에 한 수감자에게 ‘힘들면 반장인 내가 좀 도와주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수감자가 국가안전보위원에게 그 말을 ‘갈고리치는’(일러바치는) 바람에 제가 죽을 뻔했죠. 몽둥이로 얼굴을 두들겨 맞아 인사불성이 됐어요. 수용소에는 ‘동정은 함정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면 도리어 원수로 되갚는 사람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곳에 멸시할 만한 위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수감자가 그를 해코지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반장에서 다른 반의 일개 수감자로 전락해 6개월 동안 고생했지만, 그때 ‘사람다운 사람’도 만났다.
“다시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려니 힘들었어요. 제가 잘못한 것으로 알려져 다들 저를 피했고, 평소 경쟁관계에 있던 상대편 반장은 제 상관이 된 뒤부터 저를 죽이려 안달이었죠. 반장이라면 배라도 채울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으니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소를 관리하던 김일현이라는 친구가 남모르게 밥을 가져다줬어요. 걸리면 자기도 죽고 나도 죽거든요. 그는 힘든 일을 하는 만큼 남보다 밥을 좀 더 많이 받았는데, 그것을 안 먹고 소금 발라서 싸가지고 오더라고요. 기운 없어 누워 있을 때 얼굴이 뜨끈해서 보면 그 친구가 밥을 제 볼에 대곤 ‘먹어야 산다’고 하는데 거참….”
잠시 목이 멘 그는 “앞으로도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갔거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례를 조사하면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의 존재를 알릴 것”이라고 되뇌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대인기피증을 앓아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정광일 씨.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그를 보니 배신의 상처보다 사랑의 힘이 더 크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친다. 역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다.
사례집에 실린 수감자의 70%에 해당하는 187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탈북자인 정광일(49) 북한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모임 사무총장이다. 그가 이 일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사례집을 발간한 이튿날인 5월 7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그의 집을 찾았다. 거실에 금강산 사진이 걸린 아담한 아파트는 기자가 있는 동안에도 아픈 몸을 누이고 쉬다 가는 탈북자, 얘기를 하려고 왔다가 손님을 보고 발길을 돌리는 탈북자가 연달아 찾아올 정도로 개방된 공간이었다. 내내 현관문을 열어둔다는 그가 속내를 열어 보였다.
그는 “정치범수용소에 가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선평양무역회사 청진지사장으로 1997년 외화 70만 달러를 벌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표창까지 받았을 정도로 북한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중국 옌볜에서 북한 명태 1t을 중국 사람에게 300달러에 팔면 그 중국인이 바로 남한 사람에게 1800달러로 되팔아 ‘생 이윤’ 1500달러를 챙기는 모습을 본 뒤 남한 사람과 직거래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1년 동안 남모르게 재산을 챙기긴 했지만 그만큼 정부에 많은 돈을 바쳤다”고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국가안전보위부(북한의 비밀경찰기구)에 체포돼 유치장에 갔어요. ‘비둘기 고문’(양팔과 다리를 뒤로 꺾어 오랫동안 매달아놓으면 중력으로 가슴뼈가 아래쪽으로 쏠려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고문)을 받으면서 10개월 만에 몸무게가 75kg에서 36kg이 됐죠. 결국 취조를 견디다 못해 거짓으로 간첩죄, 제도 비난죄, 비밀누설죄를 인정했어요. 이후 2000년 4월부터 함경북도 15호 수용소(요덕수용소)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루에 풀 1.2t을 벴어요. 이후 3인조장, 분조장을 거쳐 수감자를 총괄 감독하는 반장으로서 모범적으로 생활한 덕에 2003년 4월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2003년 탈북해 다음해 한국에 도착한 뒤 정씨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자신이 경험했던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김일성 수령님 때는 잘 먹었는데 지금은 왜 이런가’라고 푸념했던 사람, 신문에 김정일 사진이 있는 줄 모르고 찢어서 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 하찮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와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입국한 날부터 가구사업을 하고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5년 동안 자신이 머물던 요덕수용소 서림천 구역의 수감자 명단을 작성했다. 개인적인 수기를 쓸 수도 있었지만 “명단을 만들어야 현재 수감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거시적 차원에서 정치범수용소 상황을 정리한 것은 반장을 지낸 영향인 듯했다. 그곳에는 늘 200여 명이 있는데 매년 100여 명이 죽고 충원되기 때문에 3년간 그가 만난 사람은 500명이 넘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기억해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 그는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만나 재차 확인하면서 명부를 채워갔다.
명단 만들어 대내외에 관심 고취
이번에 인권위의 제안으로 사례집을 만드는 일은 그가 이미 작성해놓은 명단이라는 뼈대에 ‘수감자 생사 확인 작업’이라는 살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렇기에 품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2008년 영국에 있는 북한대사관과 2011년 스위스 주재 북한대표부에 찾아가 명단에 수록된 수감자들의 생사 확인을 요청하며 북한 측과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끝내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오기가 났다”고 한다.
“사례집을 내면 북한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열심히 뛰었어요. 유엔에서 이 자료를 활용해 정치범수용소 사찰단을 파견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국제 사회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문제제기는 하지 않지만,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예요. 이곳이 없어지면 북한 주민이 체제 변화를 시도하면서 민주화를 이뤄내고 더 나아가 북핵 문제도 해결할 거예요. 물론 이 자료를 바탕으로 통일 후에는 정치범수용소의 가해자에게는 처벌을 내리고 피해자는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했어요.”
그는 “생사 확인 작업을 하면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악몽을 꿨다”고 말한다. 요덕수용소는 한국의 1개 군만큼이나 큰 지역으로, 탈출을 방지하려고 3중 철조망을 쳤고, 철조망 사이에 8m 깊이의 구덩이를 파 죽창을 꽂아놓았다. 그곳에선 새벽 4시부터 아침 7시까지 산에 있는 돌을 싣고 와 나르고 다음 날 그 돌을 제자리에 갖다놓는 ‘조기작업’을 하고, 옥수수를 물에 불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묵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운다. 아침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157㎡(350평) 땅의 김을 매거나 풀 800kg을 베고, 겨울이면 도끼 한 자루로 한 아름 되는 나무를 7그루씩 찍어 넘어뜨린다. 일을 마치지 못하면 배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일한다. 이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그가 묻은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사례집 만들며 기억이 고통으로
국가기관이 북한 수용소 수감자 명단을 처음으로 공개한 자료(위). 5년 동안 정광일 씨가 정리해온 수감자 명단.
“안쓰러운 생각에 한 수감자에게 ‘힘들면 반장인 내가 좀 도와주겠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수감자가 국가안전보위원에게 그 말을 ‘갈고리치는’(일러바치는) 바람에 제가 죽을 뻔했죠. 몽둥이로 얼굴을 두들겨 맞아 인사불성이 됐어요. 수용소에는 ‘동정은 함정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면 도리어 원수로 되갚는 사람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곳에 멸시할 만한 위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수감자가 그를 해코지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반장에서 다른 반의 일개 수감자로 전락해 6개월 동안 고생했지만, 그때 ‘사람다운 사람’도 만났다.
“다시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려니 힘들었어요. 제가 잘못한 것으로 알려져 다들 저를 피했고, 평소 경쟁관계에 있던 상대편 반장은 제 상관이 된 뒤부터 저를 죽이려 안달이었죠. 반장이라면 배라도 채울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으니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소를 관리하던 김일현이라는 친구가 남모르게 밥을 가져다줬어요. 걸리면 자기도 죽고 나도 죽거든요. 그는 힘든 일을 하는 만큼 남보다 밥을 좀 더 많이 받았는데, 그것을 안 먹고 소금 발라서 싸가지고 오더라고요. 기운 없어 누워 있을 때 얼굴이 뜨끈해서 보면 그 친구가 밥을 제 볼에 대곤 ‘먹어야 산다’고 하는데 거참….”
잠시 목이 멘 그는 “앞으로도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갔거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례를 조사하면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의 존재를 알릴 것”이라고 되뇌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대인기피증을 앓아 쉽게 잠들지 못한다는 정광일 씨.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그를 보니 배신의 상처보다 사랑의 힘이 더 크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친다. 역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