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채를 잡자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입가에 웃음기가 배어난다. 손놀림이 빨라지면서 어깨도 들썩인다. 나는 스마트폰에 저장한 곡 가운데 ‘블루잉크’(동아일보 사내 밴드) 공연곡인 라디오헤드(Radiohead)의 ‘Creep’과 마그마의 ‘해야’를 골라 앰프에 연결했다. 그녀는 “알고는 있지만 처음 연주해보는 곡”이라며 약간 긴장하는 듯했지만 금방 리듬을 따라잡았다. 갸름한 얼굴과 긴 목에 흰 티셔츠까지 입어서인지 학이 춤추는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난 후 추가 촬영을 위해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지하 3층에 있는 밴드 연습실을 찾은 이지은(34) 경감은 고기가 물을 만난 양 즐거워했다. 검찰청(대구지검 서부지청) 앞에서 선글라스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1인 피켓시위를 벌여 전국 경찰을 뒤집어놓았던 이 시대의 문제적 여경이 언론사 건물 지하에서 드럼을 두들길 줄이야.
세상에 억울한 사람 정말 많아
시위사건 이후 언론에 몇 번 소개됐다고, 또는 ‘튀는 신세대 여경’쯤으로 대수롭잖게 여겨 그녀를 인터뷰하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했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그토록 뚜렷이 대비되면서 예속과 자유의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사람은 그 근원을 가늠하기 힘든 독특하고도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게 마련이다.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눠보니 어떻게 제복 직업에 매여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술적 끼가 넘쳐흐르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녔다.
이를테면 그녀의 삶에서 남자나 결혼 따위는 안줏거리도 안 될 정도로 시시한 소재다. 그녀가 꿈꾸는 세상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면서도 성취하고 싶은 일이 널렸다. 97학번인 그녀는 경찰대 17기다. 서울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석사학위를 딴 엘리트 여성 경찰간부가 아침마다 재즈댄스로 땀을 흘리고 헤비메탈을 즐기면서 ‘플롯이 탄탄한’ 포르노소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뭘까.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올 법한 그녀의 흥미진진한 라이프 스토리는 잠시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공적인 얘기부터 하자. 드럼 치는 걸 자랑하려고 인터뷰에 응한 건 아닐 테니.
인터뷰는 5월 8일 오전 경찰청 1층 로비에 마련된 그림 전시장에서 진행했다. 그녀가 소속된 부서(경찰청 수사국 수사구조개혁단)에서는 사복을 입는다. 주황색이 곁들여진 살굿빛 상의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쇼트커트 때문인지 미소년 같다. 귀에 매달린 구슬 모양의 상앗빛 귀고리가 앙증맞다.
“그 일(1인 시위) 이후 정말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시민들로부터 ‘검사가 사건을 말아먹었다’는 내용의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그들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다. 직접 찾아온 사람들도 있다. 적절한 선에서 법률적 조언을 해준다. 오늘 오후에도 민원인을 만나는 약속이 잡혀 있다.”
독점은 부패와 권력 남용 불러
이 경감의 1인 시위는 이른바 밀양고소사건에 연루된 박모 검사가 경찰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는 데 대한 일종의 항의 표시였다. 박 검사는 지난해 9월 밀양경찰서 정모 경위로부터 수사 축소 지시와 인격적 모욕을 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에 대한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박 검사가 조사를 거부하는 데다 유력한 증거인 조사실 CCTV마저 관할 검찰청의 거부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위를 두고 경찰 안팎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시선이 엇갈렸다. 격려하는 쪽에선 “사람들에게 검찰의 부당한 행위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우려하는 쪽에선 “일단 복장부터 맘에 안 든다”고 수군거렸다. “집회와 시위를 관리하는 경찰관이 시위하는 게 바람직한가”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학교(경찰대) 다닐 때도 복장 문제로 지적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 최대한 자율성과 개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경찰관이 시위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한다. 집회와 시위는 관리가 아니라 보호 대상이다. 노동권을 보장받는 미국 경찰관은 근로조건 문제로 피켓시위를 한다. 시위하는 동안 다른 경찰관이 질서를 유지해준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보수적이다.”
한편 검찰은 “경찰의 언론플레이”니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행위”니 하면서 불쾌해했다. 그녀가 토끼처럼 큰 두 눈을 동그랗게 모으며 반박했다.
“내가 검찰청 앞에서 시위하는 건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자기들 특권의식은 부끄럽지 않은지. 거의 수사 방해 수준이다. 모 방송사에서 토론을 제안하기에 좋다고 했는데 검찰 쪽에선 거절했다.”
한국의 형사사법체계에서 모든 경찰 수사는 검찰 지휘를 받아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경찰은 검사와 관련된 사건은 손도 대지 못하거나 무조건 검찰에 넘기는 게 관행이었다. 상전인 검찰의 앞마당에서 현직 경찰 간부가 1인 시위를 벌이는 건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검찰이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에게 검찰의 잘못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검찰은 공정한 수사를 통해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그런데 밀양사건만 보더라도 정작 자신들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은 존재임을 과시한다. 특권의식인 것이다. 언론을 상대로 ‘기획고소’니 ‘보복수사’니 떠들면서 경찰의 정당한 수사를 방해한다. 정말 비겁하다.”
이 경감의 목소리가 점차 열기를 띠었다. 경찰 경력 11년째인 그녀는 수사권 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 소리를 들을 만하다. 2005년에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에서 근무했다. 그녀는 현 형사사법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검찰의 막강한 권한을 꼽았다.
“한국 검찰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수사권과 수사지휘권, 기소권을 독점한다. 독점은 부패와 권력 남용을 낳게 마련이다. 2000년 이후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한 17명의 심리를 조사해봤다. 유서를 분석해보니 흥미롭게도 학교폭력을 못 견뎌 자살한 학생의 심리와 비슷했다.”
이 경감의 분석에 따르면 두 유형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엄청난 인격 모독이 있었다. 둘째, 막강한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셋째, 당사자의 고통이 가족에까지 미쳤다.
“자식을 조사하겠다고 겁을 주고 사돈의 팔촌 계좌까지 뒤지면 ‘내가 빨리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고 가족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죄를 조사해 벌을 주는 데 그쳐야지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하는 건 사법정의가 아니지 않나.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다. 누구든지 그 앞에선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반대하는 쪽에선 경찰의 무능과 부패를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격 미달이니 독립적으로 수사하면 안 되고 검찰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녀는 이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수원살인사건과 이경백(‘룸살롱 황제’) 사건을 접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부끄러웠다. 경찰이 스스로 그런 무능과 비리의 싹을 잘라내지 못한다면 검찰 힘을 빌려서라도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 수사구조는 개혁해야 한다. 검찰의 독점적 권한에 따른 폐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언론도 문제다. ‘밥그릇 싸움’이라며 양비론을 펴는 건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찰을 두려워하는 면도 있고.”
그녀가 제시하는 검찰개혁 해법은 힘을 분산하는 것이다.
“정치검사가 왜 나오는가. 정치권력이 검찰을 장악하려 들기 때문이다. 검찰 권한이 워낙 막강하니 검찰만 자기편으로 만들면 모든 걸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검찰 권한을 쪼개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기관 간 견제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밤새 할 수 있는 일 세 가지
경남여고를 나온 그녀는 부산 토박이다. 아버지는 사업가고 어머니는 교수다. 그녀의 예술적 끼는 여고생 때부터 발현됐다. 학창시절에 대해 묻자 “모범생이었다”고 대답하면서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성격이 활달한 편이었다. 반장을 많이 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면 춤추는 걸 즐겼다. 전날 밤에 밤새 거울 보며 연습했다.”
교습한 게 아니라 TV 가요프로그램을 보면서 익혔다니 타고난 재주라 하겠다. “춤을 잘 추느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의례적인 겸양의 표현도 없이 “좀 춥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감추고 있던 부산 억양이 튀어나온 걸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딱딱한 얘기에서 벗어나선지 그녀의 말투가 한층 활기를 띠었다. 자신이 밤새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 있는데, 술 마시기와 글쓰기, 그리고 춤추기란다. 술을 잘 마시는 비결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체력. 특별히 잘하는 운동은 없지만 좋은 유전자 덕에 체력이 좋다는 것이다. 그녀는 “돈이 없어 못 마시지, 체력이 달려 못 마시지는 않는다”며 깔깔거렸다.
춤도 체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아침마다 재즈댄스 교습소에서 춤을 춘다. 그런데 춤추기 전에 근력운동을 한다. 스트레칭에 이어 윗몸일으키기를 200번 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고. 하나 덧붙이면 검도 초단이다.
이제 그녀의 대표 특기인 드럼 얘기를 해보자. 고3 졸업반일 때 몇 달간 학원에 등록해 배운 게 시작이었다. 워낙 좋아해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 악보 보는 눈이 밝은 것도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느는 데 도움이 됐다.
경찰대에 들어간 후 음악동아리 푸르뫼에 가입했다. 멤버들은 그녀가 키보드를 맡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드럼을 치고 싶었던 그녀는 아예 피아노를 못 치는 척했다. 결국 뜻한 대로 드러머가 됐다. 교내 행사가 많아 두 달에 한 번꼴로 공연했다. 왜 그토록 드럼이 좋은 걸까.
“드럼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끌어낸다. 드럼을 칠 때마다 심장이 울린다. 그 느낌이 무척 좋다. 기타가 화려해 보이지만 연주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건 드럼이다.”
그녀는 “드럼은 생각보다 배우기 어렵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교습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음악 얘기가 길어지자 눈빛이 샛별처럼 반짝거린다. 그녀가 좋아했던 곡은 메탈리카(Metallica)의 ‘Orion’ ‘Master of Puppets’ 등 헤비메탈 풍이다. ‘Orion’은 연주만 있는 곡인데, 경찰대 재학 시절 밤에 귀가할 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랬던 그녀가 요즘은 비틀스와 퀸, 모차르트 등 고전에 심취해 있다. 7080 노래에도 감흥을 느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한다. 모차르트는 들으면 들을수록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틀스 전곡을 들어보니 정말 매력적이다. 엄마가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의 ‘The Saddest Thing’을 좋아했는데, 이제 나도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음악을 들으면 인생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밴드를 만들었다. 2004년 인천경찰청 기획계에 근무할 때는 ‘폴리스 라인’, 2005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에서 일할 때는 ‘비상 60’, 지난해 송파경찰서 경무계장으로 재직할 때는 ‘송파밴드’를 결성했다. 인기가 좋아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자선공연도 하고 청소년과 함께하는 공연도 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자칫 그녀를 ‘날라리’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대를 3등(행자부장관상)으로 졸업한 학구파다. 졸업 후 곧바로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학을 공부했다. 석사학위 논문 주제는 ‘경찰 내 성별 관계에 관한 연구’.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초급간부 시절 휴직계를 내고 영국으로 훌쩍 떠났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범죄학을 전공한 그녀는 ‘변호사와 판사 사이의 인간관계가 판결에 미치는 영향’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전세금을 빼서 몽땅 들고 갔다. 공부도 실컷 했고 놀기도 많이 놀았다. 지식을 주워 담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부가 재미있었다. 정말 내 영혼이 살찌는 시기였다.”
그녀는 요즘 미술에도 취미를 붙여 틈나는 대로 미술관을 둘러본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맞는 말 같다. 루브르, 오르세 등 유럽의 대표적 미술관을 처음 찾았을 때 그 훌륭한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다. 자꾸 다니다 보니 안목이 높아졌다. 요즘은 미술관을 찾는 것 자체가 즐겁다.”
성격이 낙천적인 그녀는 한 번도 생을 비관하거나 자살을 꿈꿔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세계의 발전을 믿는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자다.
“인간의 절대적 수명이 늘었다. 그것만큼 진보에 대한 분명한 증거도 없다. 나는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싶다.”
철학이 깃든 포르노소설 구상
그녀는 “진짜 비관주의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이유다. 구상 중인 소설의 소재라는 것이다. 켁. 소설까지. 더 놀라운 것은 포르노소설도 쓴다는 것.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장정일에게 보내보라고 했다(웃음). 내가 쓰려는 건 단순한 포르노가 아니다. 여성학적 관점, 불교적 관점, 철학이 깃든 고차원적 포르노다. 그 나름대로 탄탄한 플롯이 있는. 대부분의 포르노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상상력이 한쪽으로 집중돼 있다. 남성주의적 시각에서 비롯한 잘못된 학습을 전파한다. 예컨대 강간신화는 여성이 겉으로는 (폭력적 관계를) 싫어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한다는 잘못된 판타지를 심어준다.”
내가 “탄탄한 플롯이 있는”이라는 표현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자 그녀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듯 좋아하는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선지 아직 미혼이다. 결혼은,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결혼계획에 대해 묻자 “관심 없다”고 무 자르듯 말했다. 그렇다고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남자 친구’는 늘 있어왔다니까.
“결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체적으로 가정을 꾸리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지금 나에겐 싱글이 편하다. 나만의 공간과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1인 시위에 대해 일부에선 “여성성을 상품화했다”고 비판한다. 이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고 응수했다.
“여성성을 주체적으로 표현하면 남성은 이를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한계다. 나는 일찍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맘먹었다. 이지은답게 말이다.”
그녀는 앞으로 작곡도 해볼 생각이라고 했는데, 나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한국 포르노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길 기대한다.
인터뷰가 끝난 후 추가 촬영을 위해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지하 3층에 있는 밴드 연습실을 찾은 이지은(34) 경감은 고기가 물을 만난 양 즐거워했다. 검찰청(대구지검 서부지청) 앞에서 선글라스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1인 피켓시위를 벌여 전국 경찰을 뒤집어놓았던 이 시대의 문제적 여경이 언론사 건물 지하에서 드럼을 두들길 줄이야.
세상에 억울한 사람 정말 많아
시위사건 이후 언론에 몇 번 소개됐다고, 또는 ‘튀는 신세대 여경’쯤으로 대수롭잖게 여겨 그녀를 인터뷰하지 않았더라면 후회할 뻔했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그토록 뚜렷이 대비되면서 예속과 자유의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사람은 그 근원을 가늠하기 힘든 독특하고도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게 마련이다.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눠보니 어떻게 제복 직업에 매여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술적 끼가 넘쳐흐르고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녔다.
이를테면 그녀의 삶에서 남자나 결혼 따위는 안줏거리도 안 될 정도로 시시한 소재다. 그녀가 꿈꾸는 세상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면서도 성취하고 싶은 일이 널렸다. 97학번인 그녀는 경찰대 17기다. 서울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석사학위를 딴 엘리트 여성 경찰간부가 아침마다 재즈댄스로 땀을 흘리고 헤비메탈을 즐기면서 ‘플롯이 탄탄한’ 포르노소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뭘까.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올 법한 그녀의 흥미진진한 라이프 스토리는 잠시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공적인 얘기부터 하자. 드럼 치는 걸 자랑하려고 인터뷰에 응한 건 아닐 테니.
인터뷰는 5월 8일 오전 경찰청 1층 로비에 마련된 그림 전시장에서 진행했다. 그녀가 소속된 부서(경찰청 수사국 수사구조개혁단)에서는 사복을 입는다. 주황색이 곁들여진 살굿빛 상의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쇼트커트 때문인지 미소년 같다. 귀에 매달린 구슬 모양의 상앗빛 귀고리가 앙증맞다.
“그 일(1인 시위) 이후 정말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시민들로부터 ‘검사가 사건을 말아먹었다’는 내용의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그들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다. 직접 찾아온 사람들도 있다. 적절한 선에서 법률적 조언을 해준다. 오늘 오후에도 민원인을 만나는 약속이 잡혀 있다.”
독점은 부패와 권력 남용 불러
이 경감의 1인 시위는 이른바 밀양고소사건에 연루된 박모 검사가 경찰의 소환조사에 응하지 않는 데 대한 일종의 항의 표시였다. 박 검사는 지난해 9월 밀양경찰서 정모 경위로부터 수사 축소 지시와 인격적 모욕을 한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에 대한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박 검사가 조사를 거부하는 데다 유력한 증거인 조사실 CCTV마저 관할 검찰청의 거부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위를 두고 경찰 안팎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시선이 엇갈렸다. 격려하는 쪽에선 “사람들에게 검찰의 부당한 행위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우려하는 쪽에선 “일단 복장부터 맘에 안 든다”고 수군거렸다. “집회와 시위를 관리하는 경찰관이 시위하는 게 바람직한가”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학교(경찰대) 다닐 때도 복장 문제로 지적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 최대한 자율성과 개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경찰관이 시위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이해는 하지만 동의는 못한다. 집회와 시위는 관리가 아니라 보호 대상이다. 노동권을 보장받는 미국 경찰관은 근로조건 문제로 피켓시위를 한다. 시위하는 동안 다른 경찰관이 질서를 유지해준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보수적이다.”
한편 검찰은 “경찰의 언론플레이”니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행위”니 하면서 불쾌해했다. 그녀가 토끼처럼 큰 두 눈을 동그랗게 모으며 반박했다.
“내가 검찰청 앞에서 시위하는 건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자기들 특권의식은 부끄럽지 않은지. 거의 수사 방해 수준이다. 모 방송사에서 토론을 제안하기에 좋다고 했는데 검찰 쪽에선 거절했다.”
한국의 형사사법체계에서 모든 경찰 수사는 검찰 지휘를 받아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경찰은 검사와 관련된 사건은 손도 대지 못하거나 무조건 검찰에 넘기는 게 관행이었다. 상전인 검찰의 앞마당에서 현직 경찰 간부가 1인 시위를 벌이는 건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고선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검찰이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에게 검찰의 잘못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검찰은 공정한 수사를 통해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그런데 밀양사건만 보더라도 정작 자신들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은 존재임을 과시한다. 특권의식인 것이다. 언론을 상대로 ‘기획고소’니 ‘보복수사’니 떠들면서 경찰의 정당한 수사를 방해한다. 정말 비겁하다.”
이 경감의 목소리가 점차 열기를 띠었다. 경찰 경력 11년째인 그녀는 수사권 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 소리를 들을 만하다. 2005년에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에서 근무했다. 그녀는 현 형사사법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검찰의 막강한 권한을 꼽았다.
“한국 검찰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수사권과 수사지휘권, 기소권을 독점한다. 독점은 부패와 권력 남용을 낳게 마련이다. 2000년 이후 검찰 수사를 받다 자살한 17명의 심리를 조사해봤다. 유서를 분석해보니 흥미롭게도 학교폭력을 못 견뎌 자살한 학생의 심리와 비슷했다.”
이 경감의 분석에 따르면 두 유형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엄청난 인격 모독이 있었다. 둘째, 막강한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셋째, 당사자의 고통이 가족에까지 미쳤다.
“자식을 조사하겠다고 겁을 주고 사돈의 팔촌 계좌까지 뒤지면 ‘내가 빨리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고 가족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죄를 조사해 벌을 주는 데 그쳐야지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하는 건 사법정의가 아니지 않나.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다. 누구든지 그 앞에선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경찰의 수사권 독립을 반대하는 쪽에선 경찰의 무능과 부패를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격 미달이니 독립적으로 수사하면 안 되고 검찰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녀는 이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수원살인사건과 이경백(‘룸살롱 황제’) 사건을 접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부끄러웠다. 경찰이 스스로 그런 무능과 비리의 싹을 잘라내지 못한다면 검찰 힘을 빌려서라도 잘라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과 별개로 수사구조는 개혁해야 한다. 검찰의 독점적 권한에 따른 폐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언론도 문제다. ‘밥그릇 싸움’이라며 양비론을 펴는 건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찰을 두려워하는 면도 있고.”
그녀가 제시하는 검찰개혁 해법은 힘을 분산하는 것이다.
“정치검사가 왜 나오는가. 정치권력이 검찰을 장악하려 들기 때문이다. 검찰 권한이 워낙 막강하니 검찰만 자기편으로 만들면 모든 걸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검찰 권한을 쪼개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기관 간 견제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밤새 할 수 있는 일 세 가지
경남여고를 나온 그녀는 부산 토박이다. 아버지는 사업가고 어머니는 교수다. 그녀의 예술적 끼는 여고생 때부터 발현됐다. 학창시절에 대해 묻자 “모범생이었다”고 대답하면서 뭔가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성격이 활달한 편이었다. 반장을 많이 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가면 춤추는 걸 즐겼다. 전날 밤에 밤새 거울 보며 연습했다.”
교습한 게 아니라 TV 가요프로그램을 보면서 익혔다니 타고난 재주라 하겠다. “춤을 잘 추느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의례적인 겸양의 표현도 없이 “좀 춥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감추고 있던 부산 억양이 튀어나온 걸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딱딱한 얘기에서 벗어나선지 그녀의 말투가 한층 활기를 띠었다. 자신이 밤새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 있는데, 술 마시기와 글쓰기, 그리고 춤추기란다. 술을 잘 마시는 비결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체력. 특별히 잘하는 운동은 없지만 좋은 유전자 덕에 체력이 좋다는 것이다. 그녀는 “돈이 없어 못 마시지, 체력이 달려 못 마시지는 않는다”며 깔깔거렸다.
춤도 체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녀는 아침마다 재즈댄스 교습소에서 춤을 춘다. 그런데 춤추기 전에 근력운동을 한다. 스트레칭에 이어 윗몸일으키기를 200번 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고. 하나 덧붙이면 검도 초단이다.
이제 그녀의 대표 특기인 드럼 얘기를 해보자. 고3 졸업반일 때 몇 달간 학원에 등록해 배운 게 시작이었다. 워낙 좋아해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쳐 악보 보는 눈이 밝은 것도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느는 데 도움이 됐다.
경찰대에 들어간 후 음악동아리 푸르뫼에 가입했다. 멤버들은 그녀가 키보드를 맡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드럼을 치고 싶었던 그녀는 아예 피아노를 못 치는 척했다. 결국 뜻한 대로 드러머가 됐다. 교내 행사가 많아 두 달에 한 번꼴로 공연했다. 왜 그토록 드럼이 좋은 걸까.
“드럼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끌어낸다. 드럼을 칠 때마다 심장이 울린다. 그 느낌이 무척 좋다. 기타가 화려해 보이지만 연주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건 드럼이다.”
그녀는 “드럼은 생각보다 배우기 어렵다. 익숙해지기 전까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교습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음악 얘기가 길어지자 눈빛이 샛별처럼 반짝거린다. 그녀가 좋아했던 곡은 메탈리카(Metallica)의 ‘Orion’ ‘Master of Puppets’ 등 헤비메탈 풍이다. ‘Orion’은 연주만 있는 곡인데, 경찰대 재학 시절 밤에 귀가할 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랬던 그녀가 요즘은 비틀스와 퀸, 모차르트 등 고전에 심취해 있다. 7080 노래에도 감흥을 느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한다. 모차르트는 들으면 들을수록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틀스 전곡을 들어보니 정말 매력적이다. 엄마가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의 ‘The Saddest Thing’을 좋아했는데, 이제 나도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음악을 들으면 인생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밴드를 만들었다. 2004년 인천경찰청 기획계에 근무할 때는 ‘폴리스 라인’, 2005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에서 일할 때는 ‘비상 60’, 지난해 송파경찰서 경무계장으로 재직할 때는 ‘송파밴드’를 결성했다. 인기가 좋아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자선공연도 하고 청소년과 함께하는 공연도 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자칫 그녀를 ‘날라리’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대를 3등(행자부장관상)으로 졸업한 학구파다. 졸업 후 곧바로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학을 공부했다. 석사학위 논문 주제는 ‘경찰 내 성별 관계에 관한 연구’.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초급간부 시절 휴직계를 내고 영국으로 훌쩍 떠났다. 케임브리지대에서 범죄학을 전공한 그녀는 ‘변호사와 판사 사이의 인간관계가 판결에 미치는 영향’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전세금을 빼서 몽땅 들고 갔다. 공부도 실컷 했고 놀기도 많이 놀았다. 지식을 주워 담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부가 재미있었다. 정말 내 영혼이 살찌는 시기였다.”
그녀는 요즘 미술에도 취미를 붙여 틈나는 대로 미술관을 둘러본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맞는 말 같다. 루브르, 오르세 등 유럽의 대표적 미술관을 처음 찾았을 때 그 훌륭한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다. 자꾸 다니다 보니 안목이 높아졌다. 요즘은 미술관을 찾는 것 자체가 즐겁다.”
성격이 낙천적인 그녀는 한 번도 생을 비관하거나 자살을 꿈꿔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는 세계의 발전을 믿는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자다.
“인간의 절대적 수명이 늘었다. 그것만큼 진보에 대한 분명한 증거도 없다. 나는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싶다.”
철학이 깃든 포르노소설 구상
그녀는 “진짜 비관주의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이유다. 구상 중인 소설의 소재라는 것이다. 켁. 소설까지. 더 놀라운 것은 포르노소설도 쓴다는 것.
“친구들에게 보여줬더니 장정일에게 보내보라고 했다(웃음). 내가 쓰려는 건 단순한 포르노가 아니다. 여성학적 관점, 불교적 관점, 철학이 깃든 고차원적 포르노다. 그 나름대로 탄탄한 플롯이 있는. 대부분의 포르노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상상력이 한쪽으로 집중돼 있다. 남성주의적 시각에서 비롯한 잘못된 학습을 전파한다. 예컨대 강간신화는 여성이 겉으로는 (폭력적 관계를) 싫어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한다는 잘못된 판타지를 심어준다.”
내가 “탄탄한 플롯이 있는”이라는 표현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자 그녀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듯 좋아하는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선지 아직 미혼이다. 결혼은,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결혼계획에 대해 묻자 “관심 없다”고 무 자르듯 말했다. 그렇다고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남자 친구’는 늘 있어왔다니까.
“결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체적으로 가정을 꾸리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지금 나에겐 싱글이 편하다. 나만의 공간과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1인 시위에 대해 일부에선 “여성성을 상품화했다”고 비판한다. 이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고 응수했다.
“여성성을 주체적으로 표현하면 남성은 이를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한계다. 나는 일찍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맘먹었다. 이지은답게 말이다.”
그녀는 앞으로 작곡도 해볼 생각이라고 했는데, 나는 무엇보다도 그녀가 한국 포르노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