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 40%대 진입으로 간만에 ‘국민드라마’ 반열에 오른 MBC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이 종영했다. 연장도 가능했을 텐데 막을 내린 이유는 제작진이 MBC 노조의 장기파업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타의에 의해 꺾인 사랑이 더 애절하듯 ‘해품달’이 한창 인기를 더해가던 중에 끝나버린 데 대한 시청자의 아쉬움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아쉬움을 달래듯 극 중에서 임금‘이훤’으로 나온 배우 김수현이 CF를 통해 연일 TV에 얼굴을 비치는 중이다. 김수현은 이번 드라마로 50억 원대의 모델 수입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훤을 향한 시청자, 특히 주부들의 애정은‘해품달’방송 때마다 ‘주부 어록’으로 엮여 나온 명대사가 입증한다.
“잊어달라 하였느냐. 잊어주길 바라느냐. 미안하구나.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
“떨어지라 명한 적도 없다.”
“감히 내 앞에서 멀어지지 마라. 어명이다.”
연우(한가인 분)가 간절히 그리워 내뱉는 훤의 말은 여성이 연인이나 남편에게서 절실히 듣고 싶었던 말들이다.
연우보다 더 간절한 ‘복이나인’
그런데 이 기사는 안타깝게도 ‘여심 환상 깨기’가 될 듯싶다. 외척 등용으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대왕대비 윤씨(김영애 분)의 방해와 장인인 이조판서 윤대형(김응수 분)의 악랄한 계략에도 ‘연우 감싸기’를 포기하지 않은 훤의 오라를 단숨에 깰 만한 사실을 공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훤의 ‘똥’얘기다.
훤은 똥을 어떻게 쌌을까. 놀랍게도 조선 왕은 궁녀 앞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배에 ‘신호’가 오면 “짐이 용무가 급하다. 나인은 어서 들라”며 나랏일보다 더 급한 어명을 내렸던 것이다. 국사에 해박한 이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조선 궁궐의 화장실 문화는 동시대 중세 유럽 왕실보다 앞섰다.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 궁전은 똥 천지였다. 서민이 사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에 똥이 넘쳐 그를 피하려고 하이힐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중세 유럽의 귀부인이 즐겨 입었던 치마폭이 넓은 드레스에도 ‘똥’과 관련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고래 뼈 등으로 만든 와이어를 안에 넣어 한껏 부풀린 크리놀린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으면 그대로 앉아 용변을 보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없었다는 것(크리놀린 풍 드레스는 당시 유행하던 귀부인의 애인 감추기 용도로도 쓰였다).
왕권과 신권, 똥으로 힘겨루기?
다시 조선 궁궐로 돌아오면, 역사서는 경복궁에 화장실이 28개, 창덕궁에 21개 있었다고 전한다. 크기도 1칸짜리부터 7칸까지 다양했다. 궁에 있는 화장실은 서각(西閣), 혼헌(渾軒)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경기도 수원 화성행궁 화령전에 가면 재현해놓은 조선 궁궐의 전통화장실을 볼 수 있다.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보관한 곳이다.
아무튼 목하 ‘연우앓이’를 했던 훤도 배변 신호가 올 때만큼은 연우보다 궁녀를 먼저 불렀을 것이다. 이 궁녀는 바로 ‘복이나인(僕伊內人)’이다. 복이나인은 궁에서 난방, 청소, 조명 등을 담당하는 복이처 소속 궁녀다. 왕의 용무 뒤처리를 맡은 궁녀는 복이처 최고 상궁으로, 왕의 하명이 떨어지면 즉시 ‘매화틀’이라는 나무 그릇을 대령했다. 비단천으로 두른 임시 가림막 안에서 왕이 용무를 보고 나면 복이상궁이 비단 천으로 왕의 뒤를 꼼꼼히 닦아주는 사이 다른 복이나인이 매화틀을 들고 내의원 어의에게 달려갔다. 그러면 어의는 왕의 똥을 손가락에 찍어 맛을 봤다. ‘똥맛’으로 왕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것이다.
매화틀은 왕의 이동식 좌변기였던 셈이다. 복이나인은 매화틀을 항시 깨끗이 유지했다. 왕이 본 용변의 뒤처리를 끝내면 깨끗이 씻어 매추(마른 짚가지나 잔솔잎)를 깔았다. 매추는 똥을 덮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복이나인 외에는 누구도 왕의 똥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똥을 ‘매화(梅花)’라고 불렀다. 하늘같이 높은 주상의 똥을 감히 필설에 담을 수 없어 매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백성과 신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속 편히 볼일을 보는데, 늘 궁녀 앞에서 일을 봐야 했던 조선 왕은 얼마나 거북했을까.
조선 왕이 용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한 사실에서 역사가들은 ‘신권(臣權)이 왕권을 억압한 조선 역사’를 짚어내기도 한다. 조선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시종일관 점철했다. 신하는 왕의 사생활을 간섭해 극도로 제약함으로써 왕을 견제하고 신권을 확장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확인해 “똑바로 좀 못 해”라며 왕을 통제한 것이다. 한 예로 중종 12년 8월 8일 조광조는 중종에게 “경연 때 독서를 힘겨워 하시던데, 혹시 요즘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라며 혹독하게 몰아세웠다.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하루 세 차례나 중종에게 주입식 강의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니 조선 왕이 똥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눌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단 한 명, 이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이가 있다.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신하가 쓰는 궁궐 화장실을 애용했다. 광해군은 ‘똥 싸기’로 정적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일생을 기록한 ‘계축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겨울에 똥을 누면서 아침부터 뒷간에 가서는 정오 때까지 계속 누시고, (웃어른께) 문안을 드려야 할 때는 유난히 (뒷간을) 자주 드나들며 똥을 두세 번씩 누시니 그렇게 애가 타는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광해군의 젖어미였던 궁녀 덕환이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고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에게 똥이란 그야말로 똥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생 누군가가 지켜보는 앞에서 똥을 싼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치부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고, 이는 잠재적인 인격 통제나 다름없다. 인간에게 가장 자유로워야 할 배설 때문에 힘들어했을 조선 왕이지만, 적어도 ‘해품달’의 훤은 그런 억압에서 해방된 듯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도 멋지게 여심을 흔들 수 있겠는가.
“내 똥 말인가? 다물라, 다물라, 그 입 다물라. 그리고 보기 싫으니 당분간 돌아서 있거라.”
조선 왕이 이 글을 보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훤을 향한 시청자, 특히 주부들의 애정은‘해품달’방송 때마다 ‘주부 어록’으로 엮여 나온 명대사가 입증한다.
“잊어달라 하였느냐. 잊어주길 바라느냐. 미안하구나.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
“떨어지라 명한 적도 없다.”
“감히 내 앞에서 멀어지지 마라. 어명이다.”
연우(한가인 분)가 간절히 그리워 내뱉는 훤의 말은 여성이 연인이나 남편에게서 절실히 듣고 싶었던 말들이다.
연우보다 더 간절한 ‘복이나인’
그런데 이 기사는 안타깝게도 ‘여심 환상 깨기’가 될 듯싶다. 외척 등용으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대왕대비 윤씨(김영애 분)의 방해와 장인인 이조판서 윤대형(김응수 분)의 악랄한 계략에도 ‘연우 감싸기’를 포기하지 않은 훤의 오라를 단숨에 깰 만한 사실을 공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훤의 ‘똥’얘기다.
훤은 똥을 어떻게 쌌을까. 놀랍게도 조선 왕은 궁녀 앞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배에 ‘신호’가 오면 “짐이 용무가 급하다. 나인은 어서 들라”며 나랏일보다 더 급한 어명을 내렸던 것이다. 국사에 해박한 이들은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조선 궁궐의 화장실 문화는 동시대 중세 유럽 왕실보다 앞섰다.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 궁전은 똥 천지였다. 서민이 사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에 똥이 넘쳐 그를 피하려고 하이힐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중세 유럽의 귀부인이 즐겨 입었던 치마폭이 넓은 드레스에도 ‘똥’과 관련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고래 뼈 등으로 만든 와이어를 안에 넣어 한껏 부풀린 크리놀린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으면 그대로 앉아 용변을 보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없었다는 것(크리놀린 풍 드레스는 당시 유행하던 귀부인의 애인 감추기 용도로도 쓰였다).
왕권과 신권, 똥으로 힘겨루기?
조선시대의 화장실 문화는 동시대 유럽보다 앞섰다.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거처했던 창덕궁에는 화장실이 21개 있었다.
아무튼 목하 ‘연우앓이’를 했던 훤도 배변 신호가 올 때만큼은 연우보다 궁녀를 먼저 불렀을 것이다. 이 궁녀는 바로 ‘복이나인(僕伊內人)’이다. 복이나인은 궁에서 난방, 청소, 조명 등을 담당하는 복이처 소속 궁녀다. 왕의 용무 뒤처리를 맡은 궁녀는 복이처 최고 상궁으로, 왕의 하명이 떨어지면 즉시 ‘매화틀’이라는 나무 그릇을 대령했다. 비단천으로 두른 임시 가림막 안에서 왕이 용무를 보고 나면 복이상궁이 비단 천으로 왕의 뒤를 꼼꼼히 닦아주는 사이 다른 복이나인이 매화틀을 들고 내의원 어의에게 달려갔다. 그러면 어의는 왕의 똥을 손가락에 찍어 맛을 봤다. ‘똥맛’으로 왕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것이다.
매화틀은 왕의 이동식 좌변기였던 셈이다. 복이나인은 매화틀을 항시 깨끗이 유지했다. 왕이 본 용변의 뒤처리를 끝내면 깨끗이 씻어 매추(마른 짚가지나 잔솔잎)를 깔았다. 매추는 똥을 덮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복이나인 외에는 누구도 왕의 똥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똥을 ‘매화(梅花)’라고 불렀다. 하늘같이 높은 주상의 똥을 감히 필설에 담을 수 없어 매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백성과 신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속 편히 볼일을 보는데, 늘 궁녀 앞에서 일을 봐야 했던 조선 왕은 얼마나 거북했을까.
조선 왕이 용변도 자유롭게 보지 못한 사실에서 역사가들은 ‘신권(臣權)이 왕권을 억압한 조선 역사’를 짚어내기도 한다. 조선 역사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시종일관 점철했다. 신하는 왕의 사생활을 간섭해 극도로 제약함으로써 왕을 견제하고 신권을 확장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확인해 “똑바로 좀 못 해”라며 왕을 통제한 것이다. 한 예로 중종 12년 8월 8일 조광조는 중종에게 “경연 때 독서를 힘겨워 하시던데, 혹시 요즘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라며 혹독하게 몰아세웠다.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하루 세 차례나 중종에게 주입식 강의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니 조선 왕이 똥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눌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단 한 명, 이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이가 있다.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신하가 쓰는 궁궐 화장실을 애용했다. 광해군은 ‘똥 싸기’로 정적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일생을 기록한 ‘계축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겨울에 똥을 누면서 아침부터 뒷간에 가서는 정오 때까지 계속 누시고, (웃어른께) 문안을 드려야 할 때는 유난히 (뒷간을) 자주 드나들며 똥을 두세 번씩 누시니 그렇게 애가 타는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광해군의 젖어미였던 궁녀 덕환이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에 대한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고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에게 똥이란 그야말로 똥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생 누군가가 지켜보는 앞에서 똥을 싼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치부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고, 이는 잠재적인 인격 통제나 다름없다. 인간에게 가장 자유로워야 할 배설 때문에 힘들어했을 조선 왕이지만, 적어도 ‘해품달’의 훤은 그런 억압에서 해방된 듯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도 멋지게 여심을 흔들 수 있겠는가.
“내 똥 말인가? 다물라, 다물라, 그 입 다물라. 그리고 보기 싫으니 당분간 돌아서 있거라.”
조선 왕이 이 글을 보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