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온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한 유로존의 재정위기는 연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통해 한숨 돌린 분위기다. 17개 유로 사용국이 자국의 재정을 좀 더 엄격히 관리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에 급한 불은 꺼졌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유럽이 지금의 위기에서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영문계간지 ‘글로벌아시아’ 2011년 겨울호에 실린 독일 전문가의 분석을 통해 유럽 재정위기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위기 극복을 위한 조치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한 지 3년, 유로 지역은 심각한 공공부채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아일랜드가 가장 심각한 지경이고,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위태롭다. 프랑스와 독일마저도 과도한 공공부채를 떠안은 상황이라 당분간 건실한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인구 고령화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어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전망 또한 어둡다.
유로 지역 국가들이 불안해 보이는 건 비슷하지만, 공공부채 위기에 봉착한 원인은 각기 다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을 놓고 보면, 공공지출 삭감이나 적절한 세제 인상을 미루는 등 엄격한 재정 관리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게 문제다. 유로 지역의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이 세부적인 규범과 보고 의무를 규정했지만 모든 회원국에 재정 규율(Fiscal discipline)을 심는 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는 비교적 잘 조율된 예산정책과 강력한 경제성장 덕분에 금융위기 이전에 부채 부담을 상당 수준 덜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위기를 맞은 것은 정부 스스로 도산한 은행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기 능력을 과신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최근 몇 년만 보면 적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유럽의 공공부채 상황을 미심쩍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부채 상환 금리가 치솟아 결국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탈리아는 부정적 기대가 부정적 결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정부가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해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투자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금리는 부채 상환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을 수 있는 것이다.
저금리에 대한 기대로 유로 도입
유로를 처음 도입한 1999년의 상황은 매우 달라 보였다. 처음에는 유로 도입으로 금리가 매우 낮은 수준에서 통합되는 결과를 이끌었다. 유로 지역은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낮으리라는 시장의 기대 심리를 반영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국가가 유로를 도입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저금리에 대한 기대였다. 국가 부채가 많았던 유럽 국가들 처지에서 유로 도입은 대출 비용의 상당한 절감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난 18개월을 돌아보면, 영구적인 저금리에 대한 희망은 환상에 불과했다. 애초 유로 지역 모든 정부의 부채는 리스크에서 자유롭다는 전제 조건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통화연합시대가 열리면 각국 정부의 부채 조건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개별 통화를 쓴다면 정부가 공공부채 위기에 빠질 경우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내 빚을 갚아버리면 된다. 고(高)인플레이션을 대가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이 경우 투자자들은 이자에 인플레이션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그리스는 1990년대 초 공공부채에 대해 24%의 금리를 지불했다.
그러나 유로 지역 같은 통화연합에서는 중앙은행이 개별 국가의 막대한 부채를 대신 떠안지 않는 한 이러한 시스템이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내세우는 것이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이다. 통화연합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국 정부는 오히려 부도 사태를 맞을 위험이 더 크다는 의미다. 각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고금리 또한 인플레이션 리스크 프리미엄이기보다 부도 리스크에 따른 결과라 보는 게 맞다. 확실한 사실은 시장이 이러한 점을 인식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유로채권(Eurobonds)이 이번 위기를 타파할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회원국이 공공부채를 한데 모아 채권을 발행하고, 이에 대해 모든 회원국 정부가 공동으로 보증하는 방식이다. 금리는 현재 각국 정부가 지불하고 있는 금리의 평균 수준이 될 것이나, 발행한 채권 수량에 따라 가중치가 매겨진다.
그러나 유로채권은 오늘날 유로 지역에서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하나는 이런 무제한적 보증 구조는 다른 회원국의 향후 세수를 담보로 대출하는 격이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재정 규모가 작은 회원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덩치가 큰 회원국 하나가 빚의 극히 일부를 갚지 않는 것으로 인해 소규모 회원국의 재정이 거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자국이 발행한 양만큼의 유로채권을 보증하게 될 것이다.
유로채권의 또 다른 문제는 회원국에 유로채권 외의 방식을 제한한다는 점이다. 사정이 그래도 나은 회원국은 유로채권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자국 신용도를 유리하게 유지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정이 좋지 않은 국가들만 남아 유로채권 금리도 오를 테고, 결국 신용도가 가장 낮은 국가들만 유로채권을 발행할 것이다. 이는 유로채권 도입의 본래 취지에 반하는 결과다. 그렇다고 모든 회원국이 유로채권을 통해 돈을 빌리도록 강제할 수도 없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위원회가 회원국의 재정 정책을 좀 더 강력하게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 안정성장협약의 재정 규범을 어기는 국가에 즉각적이면서도 가혹한 처벌을 가하자고도 했다. 이에 더해 독일의 선례를 따라 모든 회원국의 재정적자가 GDP의 0.5%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상한제, 이른바 ‘부채 브레이크(Debt brake)’ 채택을 요구했다. 이들의 이 같은 제안은 2011년 브뤼셀 정상회의 당시 유로를 사용하는 17개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이 대체로 합의한 내용이다. 실제로 이 같은 법안이 시행되면 유럽위원회가 모든 회원국의 재정 흐름을 감시하고, 과도한 재정 적자를 안고 있는 국가는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로 지역 전체에 재정 규율이 확립된다면 희망적이다.
재정 흐름 감시는 비현실적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각국의 재정정책을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관료 체계가 필요하다. 회원국 정부 및 사회안정 지원 기관 전체를 감독하는 거대한 금융 전문가 집단도 필요하다. 각국 정부가 공식적인 예산 외 다른 재정적 지출을 감추지 않도록 하는 장치도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접근은 현실적으로 이행 불가능할 뿐 아니라 효과 면에서도 회의적이다.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는 재정 흐름이 대체로 잘 통제되고 있음에도 공공부채 위기에 직면했다. 더욱이 재정 면에서 단기적인 유동성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디플레 편향(Deflationary bias)과 함께 갖가지 술책으로 감시를 피하려는 강한 충동을 심어준다. 유로가 정착하는 초기 단계에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경기 침체 및 실업률 증가를 막으려고 안정성장협약을 어긴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유럽위원회의 과도한 통제는 각국 정부의 자발적인 재정 건전성 확립 의지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유럽위원회의 규제와 관리가 상세할수록 재정 건전성이 좋지 않은 국가의 정부가 유럽위원회에 거는 기대는 커진다. 유럽위원회의 관리를 받았음에도 사정이 이러하니 그 책임을 떠맡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각국의 재정정책에 대한 중앙 통제와 관장은 환상일 뿐이다.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은 없는가. 그리스를 보면 분석 자체는 매우 간단하다. 그리스의 공공부채는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며, 지난 18개월간 그리스에 제공된 구제책은 더 많은 부채를 얹어줬을 뿐 상황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지금 그리스에 필요한 것은 부채비율을 GDP 대비 60~80%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다른 회원국들의 구제를 받는 방법이다. 실질적으로는 유럽재정안정기금(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 EFSF)이 EFSF 채권과 그리스 채권을 맞바꿔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선 한동안 다른 회원국들이 세수 일부를 EFSF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나 EFSF의 재정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리스를 구제한 다음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부채도 보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FSF의 재정 규모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독일을 비롯한 다른 회원국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둘째, ECB의 구제를 받는 방법이다. 그리스의 경우 경제 및 공공부채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점을 감안하면, ECB가 구제한다 해도 유로 지역의 인플레이션 수준이 더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이후 규모가 더 큰 국가가 동일한 구제 요구를 해오면 유로 지역 내 물가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과거 ECB가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의 부채를 대납했다가 독일 등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정부가 디폴트를 선언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그리스는 채무 상환을 중단하고, 채권단과 협상해 채무 가치의 평가절하 및 재조정에 들어간다. 사실 진작 이 같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그리스 채권을 보유한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이 손실을 보게 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금융위기에 대한 정치적 파장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은행들이 예방 조치를 취할 시간은 충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 번째가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방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은 유로 지역의 모든 회원국으로 하여금 자국 부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할 것이다. 이는 유럽조약(European Treaty)의 ‘구제 불가(No bailout)’ 조항이 담고 있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보듯 유로 지역 자체적으로 국가 부도 사태에 대한 절차적 틀을 갖지 못하면 이 조항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정치인들은 스스로 어떤 해법을 모색하기보다 ‘구제’를 선호할 테니 말이다.
좀 더 강한 시장 규율로 이어질 것
따라서 향후 국가 부도에 대처하는 절차, 즉 구체적으로 그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유럽부도법원(Euro-Area Court of Default)을 설립해야 한다. 재정위기에 맞닥뜨린 국가는 유럽부도법원에 자국 부채에 대한 모든 지불 행위를 일시 중단해줄 것을 청원하고, 채권자들과의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유럽부도법원은 채무국가와 채권단이 협상을 준비하는 데 지침을 제공하고 합의가 이뤄진 후에는 해당 정부에 재정 지원을 하면 된다. 이러한 절차에 따른 재정 지원은 경제적 정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틀이 만들어지면 금융 시장은 물론, 규제에까지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각국 정부는 공공부채가 결코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금융 규제 대상에서 예외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각국의 재정운영 능력을 예의 주시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좀 더 강한 시장 규율(Market discipline)로 이어질 것이다. 국가 부도 사태에 대처하는 절차적 틀은 구제 불가 원칙과 함께 유로 지역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영어 원문은 www.globalasia.org/V6N4_Winter_2011/Juergen_von_Hagen.html 참조)
*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 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이 되고 있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한 지 3년, 유로 지역은 심각한 공공부채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스와 포르투갈, 아일랜드가 가장 심각한 지경이고,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위태롭다. 프랑스와 독일마저도 과도한 공공부채를 떠안은 상황이라 당분간 건실한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인구 고령화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어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전망 또한 어둡다.
유로 지역 국가들이 불안해 보이는 건 비슷하지만, 공공부채 위기에 봉착한 원인은 각기 다르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을 놓고 보면, 공공지출 삭감이나 적절한 세제 인상을 미루는 등 엄격한 재정 관리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게 문제다. 유로 지역의 안정성장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이 세부적인 규범과 보고 의무를 규정했지만 모든 회원국에 재정 규율(Fiscal discipline)을 심는 데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는 비교적 잘 조율된 예산정책과 강력한 경제성장 덕분에 금융위기 이전에 부채 부담을 상당 수준 덜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위기를 맞은 것은 정부 스스로 도산한 은행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기 능력을 과신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최근 몇 년만 보면 적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유럽의 공공부채 상황을 미심쩍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부채 상환 금리가 치솟아 결국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탈리아는 부정적 기대가 부정적 결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정부가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해 국가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투자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금리는 부채 상환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을 수 있는 것이다.
저금리에 대한 기대로 유로 도입
유로를 처음 도입한 1999년의 상황은 매우 달라 보였다. 처음에는 유로 도입으로 금리가 매우 낮은 수준에서 통합되는 결과를 이끌었다. 유로 지역은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낮으리라는 시장의 기대 심리를 반영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국가가 유로를 도입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저금리에 대한 기대였다. 국가 부채가 많았던 유럽 국가들 처지에서 유로 도입은 대출 비용의 상당한 절감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난 18개월을 돌아보면, 영구적인 저금리에 대한 희망은 환상에 불과했다. 애초 유로 지역 모든 정부의 부채는 리스크에서 자유롭다는 전제 조건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통화연합시대가 열리면 각국 정부의 부채 조건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개별 통화를 쓴다면 정부가 공공부채 위기에 빠질 경우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내 빚을 갚아버리면 된다. 고(高)인플레이션을 대가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이 경우 투자자들은 이자에 인플레이션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그리스는 1990년대 초 공공부채에 대해 24%의 금리를 지불했다.
그러나 유로 지역 같은 통화연합에서는 중앙은행이 개별 국가의 막대한 부채를 대신 떠안지 않는 한 이러한 시스템이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내세우는 것이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이다. 통화연합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각국 정부는 오히려 부도 사태를 맞을 위험이 더 크다는 의미다. 각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고금리 또한 인플레이션 리스크 프리미엄이기보다 부도 리스크에 따른 결과라 보는 게 맞다. 확실한 사실은 시장이 이러한 점을 인식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유로채권(Eurobonds)이 이번 위기를 타파할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회원국이 공공부채를 한데 모아 채권을 발행하고, 이에 대해 모든 회원국 정부가 공동으로 보증하는 방식이다. 금리는 현재 각국 정부가 지불하고 있는 금리의 평균 수준이 될 것이나, 발행한 채권 수량에 따라 가중치가 매겨진다.
그러나 유로채권은 오늘날 유로 지역에서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하나는 이런 무제한적 보증 구조는 다른 회원국의 향후 세수를 담보로 대출하는 격이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재정 규모가 작은 회원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덩치가 큰 회원국 하나가 빚의 극히 일부를 갚지 않는 것으로 인해 소규모 회원국의 재정이 거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자국이 발행한 양만큼의 유로채권을 보증하게 될 것이다.
유로채권의 또 다른 문제는 회원국에 유로채권 외의 방식을 제한한다는 점이다. 사정이 그래도 나은 회원국은 유로채권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자국 신용도를 유리하게 유지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정이 좋지 않은 국가들만 남아 유로채권 금리도 오를 테고, 결국 신용도가 가장 낮은 국가들만 유로채권을 발행할 것이다. 이는 유로채권 도입의 본래 취지에 반하는 결과다. 그렇다고 모든 회원국이 유로채권을 통해 돈을 빌리도록 강제할 수도 없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위원회가 회원국의 재정 정책을 좀 더 강력하게 통제할 것을 촉구했다. 안정성장협약의 재정 규범을 어기는 국가에 즉각적이면서도 가혹한 처벌을 가하자고도 했다. 이에 더해 독일의 선례를 따라 모든 회원국의 재정적자가 GDP의 0.5%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 상한제, 이른바 ‘부채 브레이크(Debt brake)’ 채택을 요구했다. 이들의 이 같은 제안은 2011년 브뤼셀 정상회의 당시 유로를 사용하는 17개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이 대체로 합의한 내용이다. 실제로 이 같은 법안이 시행되면 유럽위원회가 모든 회원국의 재정 흐름을 감시하고, 과도한 재정 적자를 안고 있는 국가는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로 지역 전체에 재정 규율이 확립된다면 희망적이다.
재정 흐름 감시는 비현실적
그러나 이러한 접근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각국의 재정정책을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규모의 관료 체계가 필요하다. 회원국 정부 및 사회안정 지원 기관 전체를 감독하는 거대한 금융 전문가 집단도 필요하다. 각국 정부가 공식적인 예산 외 다른 재정적 지출을 감추지 않도록 하는 장치도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접근은 현실적으로 이행 불가능할 뿐 아니라 효과 면에서도 회의적이다.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는 재정 흐름이 대체로 잘 통제되고 있음에도 공공부채 위기에 직면했다. 더욱이 재정 면에서 단기적인 유동성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디플레 편향(Deflationary bias)과 함께 갖가지 술책으로 감시를 피하려는 강한 충동을 심어준다. 유로가 정착하는 초기 단계에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가 경기 침체 및 실업률 증가를 막으려고 안정성장협약을 어긴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유럽위원회의 과도한 통제는 각국 정부의 자발적인 재정 건전성 확립 의지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유럽위원회의 규제와 관리가 상세할수록 재정 건전성이 좋지 않은 국가의 정부가 유럽위원회에 거는 기대는 커진다. 유럽위원회의 관리를 받았음에도 사정이 이러하니 그 책임을 떠맡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각국의 재정정책에 대한 중앙 통제와 관장은 환상일 뿐이다.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은 없는가. 그리스를 보면 분석 자체는 매우 간단하다. 그리스의 공공부채는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며, 지난 18개월간 그리스에 제공된 구제책은 더 많은 부채를 얹어줬을 뿐 상황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지금 그리스에 필요한 것은 부채비율을 GDP 대비 60~80%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다른 회원국들의 구제를 받는 방법이다. 실질적으로는 유럽재정안정기금(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 EFSF)이 EFSF 채권과 그리스 채권을 맞바꿔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선 한동안 다른 회원국들이 세수 일부를 EFSF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나 EFSF의 재정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리스를 구제한 다음 포르투갈과 아일랜드 부채도 보증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FSF의 재정 규모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독일을 비롯한 다른 회원국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둘째, ECB의 구제를 받는 방법이다. 그리스의 경우 경제 및 공공부채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점을 감안하면, ECB가 구제한다 해도 유로 지역의 인플레이션 수준이 더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이후 규모가 더 큰 국가가 동일한 구제 요구를 해오면 유로 지역 내 물가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과거 ECB가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의 부채를 대납했다가 독일 등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정부가 디폴트를 선언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그리스는 채무 상환을 중단하고, 채권단과 협상해 채무 가치의 평가절하 및 재조정에 들어간다. 사실 진작 이 같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그리스 채권을 보유한 프랑스와 독일 은행들이 손실을 보게 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금융위기에 대한 정치적 파장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은행들이 예방 조치를 취할 시간은 충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세 번째가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방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은 유로 지역의 모든 회원국으로 하여금 자국 부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할 것이다. 이는 유럽조약(European Treaty)의 ‘구제 불가(No bailout)’ 조항이 담고 있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보듯 유로 지역 자체적으로 국가 부도 사태에 대한 절차적 틀을 갖지 못하면 이 조항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정치인들은 스스로 어떤 해법을 모색하기보다 ‘구제’를 선호할 테니 말이다.
좀 더 강한 시장 규율로 이어질 것
따라서 향후 국가 부도에 대처하는 절차, 즉 구체적으로 그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유럽부도법원(Euro-Area Court of Default)을 설립해야 한다. 재정위기에 맞닥뜨린 국가는 유럽부도법원에 자국 부채에 대한 모든 지불 행위를 일시 중단해줄 것을 청원하고, 채권자들과의 합의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유럽부도법원은 채무국가와 채권단이 협상을 준비하는 데 지침을 제공하고 합의가 이뤄진 후에는 해당 정부에 재정 지원을 하면 된다. 이러한 절차에 따른 재정 지원은 경제적 정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틀이 만들어지면 금융 시장은 물론, 규제에까지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각국 정부는 공공부채가 결코 리스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금융 규제 대상에서 예외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투자자들은 각국의 재정운영 능력을 예의 주시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좀 더 강한 시장 규율(Market discipline)로 이어질 것이다. 국가 부도 사태에 대처하는 절차적 틀은 구제 불가 원칙과 함께 유로 지역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영어 원문은 www.globalasia.org/V6N4_Winter_2011/Juergen_von_Hagen.html 참조)
*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과정을 주목한다’는 기조 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들의 공론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