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진이 뚱뚱하게 분장해 화제가 됐던 ‘화평공주 체중감량사’.
2008년 3월 KBS ‘드라마시티’의 폐지는 방송가 최고 이슈였다. 방송 3사를 통틀어 단막극의 유일한 보루가 무너진다는 상징적 의미였다. 이는 단순히 단막극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아닌, 방송 인력의 인큐베이팅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드라마 스페셜’시즌2의 전체 프로듀서를 맡은 함영훈 KBS 감독은 단막극의 당위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와 감독 창의력 발휘의 무대
“어떤 사안에 대해 드라마국에 있는 70여 명의 PD 모두가 동의하는 문제는 없다. 다들 처지와 위치가 다르니까. 하지만 그 70여 명이 모두 동의했던 것은 단막극을 다시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근거는 드라마가 다양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만나는 사람의 창의력을 발휘할 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스타 작가와 검증된 감독이 좋은 얘기를 갖고 있어도 스타를 캐스팅하지 못하면 공중파 편성을 받기 어려운 드라마 시장에서 단막극은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이 데뷔(방송 은어로 ‘입봉’)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장이다. 종합편성채널 JTBC는 시청자를 끌어오기 위한 개국 특집드라마로 노희경 작가의 ‘빠담빠담 : 그와 그녀의 심장 박동소리’를 편성했다. 그가 KBS 드라마 ‘거짓말’로 유명 작가가 되는 데는 ‘MBC 베스트극장’의 ‘세리와 수지’로 데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유독 단막극 폐지를 강하게 비판했던 그가 지난해 ‘드라마 스페셜’로 단막극이 부활하자 ‘빨간 사탕’으로 첫 포문을 연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에서 말하는 소위 유망주 육성의 중요성이 바로 이런 것이다. 돈이 천문학적으로 많다면 레알 마드리드(이하 레알)나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처럼 이미 스타가 된 선수들만 모아 은하계를 만들어도 된다. 그것이 안 된다면 메시와 이니에스타를 키운 바르셀로나나 앙리를 월드스타로 만든 아스널처럼 유망주를 키우는 방식으로 운영비는 줄이고 성과를 내야 한다.
하지만 돈 많은 레알과 맨시티라도 다른 팀이 유망주를 육성하지 않으면 영입할 스타를 찾을 수 없다. 요컨대 유망주의 성장은 한 시장의 선순환 구조를 위해 꼭 필요하며, 단막극은 드라마 시장의 유망주 무대인 셈이다. 데뷔작 ‘마지막 후레쉬맨’으로 ‘이달의 PD상’을 받은 김진원 감독은 “정말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데뷔할 때 ‘드라마 스페셜’이 생겼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 자신에 대해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포기도 하고 타협도 하고…. 물론 긴 작품의 야외 연출을 하면서도 갈고닦을 수 있겠지만, 짧은 시간에 이것들을 경험하고 결과까지 알 수 있는 분야는 단막극밖에 없다. 그리고 단막극이 부활하면서 드라마국 PD들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조연출이나 선배들과 얘기하는 것이 단막극이 없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각 작품에 대해 다들 궁금해하고 토론도 펼친다.”
KBS ‘드라마 스페셜’ 시즌2에 방영됐던 ‘터미널’(왼쪽)과 ‘아내가 사라졌다’.
데뷔의 장이 인력 선순환을 만들어낸다면, 함 감독이 말한 또 다른 미덕인 다양성은 드라마의 장르적 토양을 풍성하게 한다. 노희경 작가가 동성애를 인간의 보편적 사랑으로 품어낸 퀴어물 ‘슬픈 유혹’으로 드라마 장르의 외연을 넓힌 것처럼, 8월 방송한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 아니었다면 여성의 동성애가 공중파에서 다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갈수록 다양해지는 시청자의 취향과 정서, 신념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선행돼야 하는 실험이다.
편의점 연쇄살인마에게 가족을 잃은 전직 프로레슬러가 직접 범인을 응징하는 ‘필살기’는 영화 ‘씬 시티’ ‘드라이브’에서나 볼 법한 사적 복수의 서사를 보여줬고, ‘82년생 지훈이’는 툭하면 재벌 2세가 등장하는 미니시리즈와 달리 이제 갓 서른이 된 청춘의 아픈 일상을 담았다. 이들 작품은 자체로도 유의미하지만,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의 성장처럼 더 큰 성과를 위한 토양이 됐다. 가령 1시간짜리 단막극은 아니었지만 4부작의 탁월한 정치사극인 ‘한성별곡’이 아니었다면 곽정환 감독의 ‘추노’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대의를 차치하더라도, 단막극은 시청자가 볼만한 얘기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배우 유진이 뚱뚱하게 분장해 화제가 됐던 ‘화평공주 체중감량사’는 현대 여성이 다이어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백제라는 시공간에 대입해 만든 퓨전 사극, 아니 사극을 가장한 현대극이었다. 미니시리즈나 주말드라마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발랄한 상상력이 담긴 작품이었다. 1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이뤄내야 하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는 서사 역시 중요한 미덕이다.
공중파에서 여성의 동성애를 다뤄 논란이 됐던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
방송 3사를 통틀어 잘 만든 드라마를 손에 꼽기 어려웠던 지난 1년간 ‘드라마 스페셜’이 방송됐던 일요일 밤 11시 30분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스페셜’시즌2는 끝났지만, 23편의 작품과 23주의 기다림이 만든 희망적 분위기는 처음과 다르다. 후배에게 “단막극이 있으니까 ‘야, 작가 만나고 열심히 해’라고 할 수 있게 된”(함영훈 감독) 창작자들에게도, 무리수와 우연이 없는 제대로 된 얘기를 만날 수 있던 시청자에게도.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또 볼 수 있으리라는 건강한 기대감, 이것이 과연 얼마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