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단체급식이 일상화하면서 도시락이 사라졌다.
개인의 기호를 무시한 단체급식은 어찌 보면 전체주의적 방식일 수 있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계층을 위한 복지로서의 단체급식만 논의하기도 벅찬 사회여서 이런 점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기호를 존중하는 것도 교육에서 꼭 필요한 부분일 테니 “단체급식에 대해서는 일단 무조건 공감”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문제는 교육계의 일이니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는 사라진 학교 도시락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농업사회에서 밥은 집에서 먹는 것이었다. 노동 현장, 즉 논밭이 집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락을 ‘집에서 먹는 밥과 반찬을 싸서 이동해 먹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논밭에서 먹는 새참이 도시락의 원형일 수 있겠다. 그러니 흔히 도시락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것은 산업사회에 들어와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집과 일자리의 거리가 멀어지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게 된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도시락은 결혼식 답례 도시락이다. 학교에 다니기 전이니 1960년대 중반쯤 일일 것이다. 전통 결혼식은 결혼 당사자의 집안에서 음식을 마련해 하객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였는데, 도시생활을 하면서 접대 공간이 마땅치 않자 도시락을 싸줬던 것이다. 나무도시락에는 돼지편육과 각종 부침개, 약밥, 떡, 홍어무침이 들어 있었다. 1970년대에 이 결혼식 도시락이 홀연 사라졌다. 요즘에도 결혼식장에 갈 때마다 혹 도시락을 안 주나 살핀다.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그 집안의 정성을 먹고 싶은 것이다.
필자가 학창시절 학교에 싸간 도시락은 초라했다. 김치가 기본 반찬이며, 좀 더 낫다 싶으면 김치볶음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 어묵볶음이나 멸치볶음이 보태지기도 하고, 가끔 달걀을 발라 부친 분홍색 소시지가 들어 있었다. 달걀 프라이가 올려진 날은 어머니가 곗돈이라도 탄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도시락 재질은 양은이었고 모양은 네모났는데, 그 안에 반찬을 넣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극도로 꺼렸다. 반찬 국물이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병 반찬통을 따로 갖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는데, ‘거버’라는 이유식 병이 최고 인기였다. 시장에서 이 이유식 빈 병을 비싸게 팔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온도시락이 유행했다. 당시 경제 수준에서는 요즘의 명품 핸드백 정도로 비쌌다. 보온도시락을 사달라고 양은도시락을 마루에 던졌다가 빗자루로 맞은 뒤 문밖에 서 있었던 기억을 공유하는 필자 또래가 많을 것이다.
1970년대에는 선생님이 도시락을 점검했다. 쌀이 모자라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대로, 흰쌀밥만 싸오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혼·분식 장려 장부’를 꺼내들고 교탁에 섰다. 그러면 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나가 자신이 싸온 도시락 뚜껑을 열고 선생님 얼굴 앞에 내밀었다. 흰쌀밥 도시락이면 벌을 섰다. 무릎을 꿇고 도시락을 머리 위에 올린 뒤 “혼·분식을 합시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나서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혼·분식 도시락’ 이야기를 꺼내면 웬 구석기시대 일인가 할 것이다. 필자는 도시락을 안 먹는 지금 학생 세대가 부럽다. “지금 대한민국 수준에 단체급식이 어딘데”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 개개인의 기호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맛 칼럼니스트가 사는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