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기의 법률적 명칭은 일장기(日章旗)지만, 일반적으로 ‘히노마루(日の丸)’라고 부른다. 일본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선 공립학교 졸업식과 입학식에서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기립 제창을 반대하는 교직원에 대한 처분을 강화하고, 기미가요 기립 제창을 의무화하는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등 우경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 집계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졸업식 등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 거부, 피아노 반주 거부 등으로 징계처분을 받은 교직원 수는 전국적으로 1143명에 달한다. 매년 100여 명이 처분을 받은 셈으로, 대부분이 교사다. 이 가운데 도쿄도(都) 소속이 433명으로 약 40%를 차지한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375명이 징계처분취소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 기미가요 관련 처분 교직원 1100여 명
일본 최고재판소는 5월 30일 도쿄도립고교에 재직 중이다 2004년 계고처분을 받은 전직 교사(64)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기미가요를 부를 때(제창) 교사에게 일어서도록(기립) 한 교장의 직무명령은 “사상·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19조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라는 합헌판결을 처음 내렸다. 이후 다른 소송에서도 최고재판소의 합헌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2007년 3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촉탁원’으로 다시 고용해달라고 신청했지만 학교 측이 기미가요 제창 때 기립하지 않아 처분받은 사실을 빌미로 거절하자 이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침략전쟁의 역사를 배우는 재일조선인이나 재일중국인 생도에게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한 의례를 강제하는 것은 양심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을 소송 제기의 이유로 들었다. 최고재판소는 판결에서 학교가 식전에 행하는 기미가요 기립 제창을 ‘관례상의 의례적 행위’라고 규정하고, “(학교 측이) 기립을 명령했다 하더라도 원고의 역사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기립 제창은 국가, 국기에 대한 경의의 표명’으로 원고의 사상, 양심의 자유를 간접적으로 제약하는 면은 있다”고 했다.
이 전직 교사는 합헌판결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히노마루를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락(短絡)적 사고는 일본문화를 망치는 길이다. 나는 (기립 제창을 주장해온)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보다 더 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학교 측의 처벌 강화 때문일까. 2010년과 2011년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 거부 등으로 처분받은 교직원 수는 크게 줄어 수십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졸업식 등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휴가를 내는 교직원이 늘어나고, 처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기미가요를 기립 제창하는 경우도 증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처벌이란 채찍에 휴가라는 소극적 저항으로 방향을 틀거나 아예 ‘굴복’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 교직원 징계 건수가 격감하는 것은 각 교육위원회가 기미가요 제창 의무를 지시한 방침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정착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한 교사들의 움직임 중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졸업식 날 휴가 내고 불참
졸업식 전날 휴가를 내고 아예 식에 참석하지 않은 40대의 한 도립고교 교사는 “신념을 굽힐 것인가, 처분을 받을 것인가. 어느 쪽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 기미가요 제창 때 기립을 거부해 경고처분을 받았다. 그 후 졸업식이 있을 때면 내빈 안내 등 식장 밖 업무를 맡아 처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엔 식장에 들어갈 것을 지시받았다. 다시 기립을 거부하면 감급, 정직, 면직 등 더 무거운 처분을 받고, 인사이동에서도 불이익을 당한다. 그래서 상사에게 식장 밖 일을 담당하길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휴가를 냈다.
과거 두 차례 처분을 받았던 도립고교의 한 교사(60)는 기립 제창의 의무화는 ‘사상, 신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한다. 2011년이 정년이었던 그는 2010년 졸업식에서도 처분을 각오하고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식장 밖에서 안내를 담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사전에 식장 밖 업무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장이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처분받는 교사를 내고 싶지 않아 그를 안내 담당으로 돌린 것이었다.
역시 도립고교에 근무 중인 40대 교사는 2010년 졸업식에서 처음 기립했다. 그는 과거의 처분이 무거워 다음은 정직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식장 밖 담당을 희망하면 동료들에게 부담이 가므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립을 했지만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상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입을 반쯤 벌린 채 국가 제창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는 “식은땀이 흘렀다”고 말했다.
# 일장기·기미가요는 침략의 상징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가 국가 대항전도 아닌 시합에서 태극마크를 넣은 모자를 쓰고 경기하는 모습을 TV 중계에서 본 일이 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국기와 국가는 경외 대상이다. 자국 국기와 국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일본에서만 이 같은 ‘해괴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옛 일본제국의 식민 통치 시기, 그리고 만주사변(1931년) 이후 일본군의 중국대륙과 동남아사아 침략 및 점령 시기에 상징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특히 35년간 일본강점기를 지낸 한국은 히노마루와 관련한 쓰라린 경험이 많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부터 일선 파출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공서는 물론, 학교 교실에도 히노마루를 걸어놓고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될 것을 강요했다. 식민통치기였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은 히노마루를 달고 일본 선수로 뛰었고, 당시 동아일보는 시상대에 오른 손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간부들이 구속되고 신문도 정간해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일본제국의 통치와 침략을 받은 한국과 중국 등에선 당시에도 히노마루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이 강했고, 지금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 1999년 국가·국기로 제정
일본제국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그리고 그 전쟁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기 위해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사망한 사람은 약 2100만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군인 등 일본인 희생자도 약 310만 명에 이른다. 일본에선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로 인식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행위를 비판, 반성하는 의미에서 교사 등 일본 내 양심 세력이 히노마루 게양, 기미가요 기립 제창에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히노마루가 만들어진 것은 1855년이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에도(江戶) 막부가 1854년 미일(美日)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한 뒤 일본 선박을 외국 선박과 구별할 수 있는 표시가 필요해 흰 바탕에 태양을 한가운데 넣은 기(旗)를 선박에 단 것이 시작이라 기록돼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0년 히노마루는 상선규칙에 국기로 규정해 일본 선박의 국적 표시기로 사용했다. 그 이후 한가운데 태양에서 16개의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양의 욱일기(旭日旗)를 육군의 ‘연대기(군기)’, 해군의 ‘군함기’로 사용했다.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 중에도 일본군은 이 깃발을 사용했고, 이후 이것을 약간 변형해 자위대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히노마루를 1999년까지 법령으로 국기로 규정되지 않은 채 사실상의 국기로 사용했다.
필자가 일본에서 졸업식 등의 행사에 참석해 기미가요를 들어본 바에 따르면 일본인은 대체로 기미가요를 크게 부르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인이 애국가를 부를 때와 비교하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기미가요는 애국가와 달리 가사가 아주 짧은데 “천황의 세상이 1000대로, 8000대로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 돼서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내용이다. ‘기미(君)’는 시가(詩歌)에선 ‘그대’ ‘님’이라는 의미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기미가요에서는 일반적으로 천황을 뜻한다. 그래서 기미가요는 ‘천황의 세상(시대)’이라는 뜻이 된다.
일본에 우경화 현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하던 1999년 3월. 히로시마(廣島)현의 현립고교 교장이 졸업식 전날, 국가 제창을 지시하는 교육위원회의 직무명령과 과거에 했던 것처럼 기미가요 제창 없이 식을 진행하자는 교원 노조의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다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1999년 8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은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을 정식으로 제정했고, 이어 도쿄도 등 각 교육위원회는 2003년 10월 각 공립학교에 졸업식 등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교직원의 기립 및 제창을 의무화하는 ‘통달’(방침)을 내려보냈다.
그동안 처분받은 교직원이 전국 각지에서 처분취소를 요구하며 제기한 소송이 수백 건에 달하지만 1심과 2심에선 ‘기립 제창 의무화는 특정 사상의 강제는 아니며 합헌’이라는 판결이 대세였다. 그런데 이번엔 최고재판소까지 합헌결정을 내린 것이다. 심지어 오사카부(大阪府) 의회는 6월 초 일본 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공립학교 교직원의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을 의무화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다른 지자체의 조례 제정도 예상된다.
일본 문부과학성 집계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졸업식 등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 거부, 피아노 반주 거부 등으로 징계처분을 받은 교직원 수는 전국적으로 1143명에 달한다. 매년 100여 명이 처분을 받은 셈으로, 대부분이 교사다. 이 가운데 도쿄도(都) 소속이 433명으로 약 40%를 차지한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375명이 징계처분취소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 기미가요 관련 처분 교직원 1100여 명
일본 최고재판소는 5월 30일 도쿄도립고교에 재직 중이다 2004년 계고처분을 받은 전직 교사(64)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기미가요를 부를 때(제창) 교사에게 일어서도록(기립) 한 교장의 직무명령은 “사상·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19조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라는 합헌판결을 처음 내렸다. 이후 다른 소송에서도 최고재판소의 합헌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2007년 3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촉탁원’으로 다시 고용해달라고 신청했지만 학교 측이 기미가요 제창 때 기립하지 않아 처분받은 사실을 빌미로 거절하자 이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침략전쟁의 역사를 배우는 재일조선인이나 재일중국인 생도에게 히노마루, 기미가요에 대한 의례를 강제하는 것은 양심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을 소송 제기의 이유로 들었다. 최고재판소는 판결에서 학교가 식전에 행하는 기미가요 기립 제창을 ‘관례상의 의례적 행위’라고 규정하고, “(학교 측이) 기립을 명령했다 하더라도 원고의 역사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기립 제창은 국가, 국기에 대한 경의의 표명’으로 원고의 사상, 양심의 자유를 간접적으로 제약하는 면은 있다”고 했다.
이 전직 교사는 합헌판결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히노마루를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단락(短絡)적 사고는 일본문화를 망치는 길이다. 나는 (기립 제창을 주장해온)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보다 더 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학교 측의 처벌 강화 때문일까. 2010년과 2011년 졸업식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 거부 등으로 처분받은 교직원 수는 크게 줄어 수십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졸업식 등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휴가를 내는 교직원이 늘어나고, 처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기미가요를 기립 제창하는 경우도 증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처벌이란 채찍에 휴가라는 소극적 저항으로 방향을 틀거나 아예 ‘굴복’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것. 교직원 징계 건수가 격감하는 것은 각 교육위원회가 기미가요 제창 의무를 지시한 방침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정착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한 교사들의 움직임 중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졸업식 날 휴가 내고 불참
졸업식 전날 휴가를 내고 아예 식에 참석하지 않은 40대의 한 도립고교 교사는 “신념을 굽힐 것인가, 처분을 받을 것인가. 어느 쪽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 기미가요 제창 때 기립을 거부해 경고처분을 받았다. 그 후 졸업식이 있을 때면 내빈 안내 등 식장 밖 업무를 맡아 처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2010년엔 식장에 들어갈 것을 지시받았다. 다시 기립을 거부하면 감급, 정직, 면직 등 더 무거운 처분을 받고, 인사이동에서도 불이익을 당한다. 그래서 상사에게 식장 밖 일을 담당하길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휴가를 냈다.
과거 두 차례 처분을 받았던 도립고교의 한 교사(60)는 기립 제창의 의무화는 ‘사상, 신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한다. 2011년이 정년이었던 그는 2010년 졸업식에서도 처분을 각오하고 일어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식장 밖에서 안내를 담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사전에 식장 밖 업무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장이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처분받는 교사를 내고 싶지 않아 그를 안내 담당으로 돌린 것이었다.
역시 도립고교에 근무 중인 40대 교사는 2010년 졸업식에서 처음 기립했다. 그는 과거의 처분이 무거워 다음은 정직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식장 밖 담당을 희망하면 동료들에게 부담이 가므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기립을 했지만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상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입을 반쯤 벌린 채 국가 제창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는 “식은땀이 흘렀다”고 말했다.
# 일장기·기미가요는 침략의 상징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가 국가 대항전도 아닌 시합에서 태극마크를 넣은 모자를 쓰고 경기하는 모습을 TV 중계에서 본 일이 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국기와 국가는 경외 대상이다. 자국 국기와 국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일본에서만 이 같은 ‘해괴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옛 일본제국의 식민 통치 시기, 그리고 만주사변(1931년) 이후 일본군의 중국대륙과 동남아사아 침략 및 점령 시기에 상징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특히 35년간 일본강점기를 지낸 한국은 히노마루와 관련한 쓰라린 경험이 많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부터 일선 파출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공서는 물론, 학교 교실에도 히노마루를 걸어놓고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될 것을 강요했다. 식민통치기였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은 히노마루를 달고 일본 선수로 뛰었고, 당시 동아일보는 시상대에 오른 손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간부들이 구속되고 신문도 정간해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일본제국의 통치와 침략을 받은 한국과 중국 등에선 당시에도 히노마루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이 강했고, 지금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 1999년 국가·국기로 제정
식민통치기였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
히노마루가 만들어진 것은 1855년이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에도(江戶) 막부가 1854년 미일(美日)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한 뒤 일본 선박을 외국 선박과 구별할 수 있는 표시가 필요해 흰 바탕에 태양을 한가운데 넣은 기(旗)를 선박에 단 것이 시작이라 기록돼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0년 히노마루는 상선규칙에 국기로 규정해 일본 선박의 국적 표시기로 사용했다. 그 이후 한가운데 태양에서 16개의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양의 욱일기(旭日旗)를 육군의 ‘연대기(군기)’, 해군의 ‘군함기’로 사용했다.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 중에도 일본군은 이 깃발을 사용했고, 이후 이것을 약간 변형해 자위대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히노마루를 1999년까지 법령으로 국기로 규정되지 않은 채 사실상의 국기로 사용했다.
필자가 일본에서 졸업식 등의 행사에 참석해 기미가요를 들어본 바에 따르면 일본인은 대체로 기미가요를 크게 부르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인이 애국가를 부를 때와 비교하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기미가요는 애국가와 달리 가사가 아주 짧은데 “천황의 세상이 1000대로, 8000대로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 돼서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내용이다. ‘기미(君)’는 시가(詩歌)에선 ‘그대’ ‘님’이라는 의미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기미가요에서는 일반적으로 천황을 뜻한다. 그래서 기미가요는 ‘천황의 세상(시대)’이라는 뜻이 된다.
일본에 우경화 현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하던 1999년 3월. 히로시마(廣島)현의 현립고교 교장이 졸업식 전날, 국가 제창을 지시하는 교육위원회의 직무명령과 과거에 했던 것처럼 기미가요 제창 없이 식을 진행하자는 교원 노조의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다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1999년 8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은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을 정식으로 제정했고, 이어 도쿄도 등 각 교육위원회는 2003년 10월 각 공립학교에 졸업식 등에서 기미가요 제창 시 교직원의 기립 및 제창을 의무화하는 ‘통달’(방침)을 내려보냈다.
그동안 처분받은 교직원이 전국 각지에서 처분취소를 요구하며 제기한 소송이 수백 건에 달하지만 1심과 2심에선 ‘기립 제창 의무화는 특정 사상의 강제는 아니며 합헌’이라는 판결이 대세였다. 그런데 이번엔 최고재판소까지 합헌결정을 내린 것이다. 심지어 오사카부(大阪府) 의회는 6월 초 일본 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공립학교 교직원의 기미가요 제창 시 기립을 의무화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다른 지자체의 조례 제정도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