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지방선거 이후 ‘이경실’이라는 검색어에는 새로운 연관 검색어가 생겼다. ‘이경실 언니 이경옥’. 바로 ‘이경옥 의원’이다. 개그우먼 이경실(44) 씨의 언니인 민주당 이경옥(48) 현직 의원이 서울 강남구 마선거구 구의회의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 의원과는 만나서, 이씨와는 전화로 ‘자매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쾌한 웃음 DNA가 꼭 닮은 자매
“창피해 죽겠어요. 동생 팔아서 당선된 것 같잖아요. 제가 동생이라면 모를까, 언니가 동생 신세를 지고….”
이경옥 의원은 명함을 건네며 연신 “창피하다”고 말했다. 명함에는 ‘동생은 ‘세바퀴’ 성격짱! 언니는 ‘강남구’ 실력짱!’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도 실렸다. 사진 아래에는 ‘친동생 이경실과’라는 설명이 달렸다.
이 의원은 2006년 비례대표로 구의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번 선거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강남구는 한나라당 텃밭. 지난 회기 때 구의원 21명 중 민주당 의원은 단 3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지지율 38%가 넘는 압승. 그는 “경실이 덕분에 승리한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처음에는 경실이 이야기를 일부러 안 했어요. 한데 주변에서 동생 이야기를 꼭 넣으라고 하더라고요. 선거를 치르며 동생 덕을 톡톡히 봤어요. 보통 구의원 선거에는 무관심한데, ‘이경실 언니’라고 소개하면 대번에 반응이 와요. 한나라당 텃밭이라 기대 없이 시작했는데, 경실이 덕에 당선된 것 같아요. 개그우먼 김지선 씨도 와서 도와줬고요.”
1남4녀 중 이 의원은 셋째, 이경실 씨는 넷째다. 둘 사이 남자형제가 있었으나 돌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이씨와 달리 선생님처럼 차분한 인상.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피니 호쾌한 웃음, 또랑또랑한 목소리, 분명한 말투에서 이씨의 모습이 겹친다.
“외모는 별로 안 닮았어요. 저는 아버지, 동생은 할머니 쪽에 가깝죠. 하지만 성격은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저도 가족 모임이나 회식에서 사회를 ‘기똥차게’ 보거든요.(웃음) 어머니가 여든둘이신데 지금까지 춤을 추실 만큼 멋을 아시고, 큰언니도 옛날에 가요 앨범을 냈어요. 집안 식구 모두 끼가 있는 편이죠.”(이 의원)
“가족들이 직선적이고 꼿꼿한 데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귀에 인이 박이도록 하신 말씀이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였어요. ‘경우’ ‘염치’를 강조하셨고, 가장 심한 욕이 ‘싸가지 없는 X’이었죠. 언니가 저보다 더 싹싹하고 친화력이 좋아요.”(이씨)
언니를 떠올리면 이경실 씨는 동화책 읽어주던 기억부터 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언니는 인물마다 목소리를 달리해서 책을 읽어주었다. 웃긴 인물, 조용한 인물 등 성격별로 감정을 달리했다. 학교에서 언니가 하던 대로 책을 읽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언니가 연예인 기질이 더 많아요. 어릴 때부터 표현력이 굉장히 좋았는데, 저도 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도 언니는 전교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늘 공부를 잘했어요. 제가 연극영화과를 간다고 했을 때 ‘역사학과나 철학과를 가라’며 말렸죠.”
장애와 암 딛고 새로운 출발
이 의원은 왼손 도움 없이 오른팔을 들 수 없다. 어깨신경이 손상돼 팔의 움직임이 여의치 않다. 한국외대 한국어교육과 80학번인 그는 대학 때 학생운동에 빠져 지냈다. 대학 4학년에 일어난 한순간의 사고로 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다친 이야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를 대신해 이경실 씨가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고3 때쯤이었나. 군산 집으로 언니가 다쳤다는 전화가 걸려왔어요. 도서관 7층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떨어진 거죠. 나무에 걸려서 살았지만, 폐에 구멍이 나고 크게 다쳤어요. 어려서부터 공부 잘한 언니는 엄마의 유일한 끈이었는데, 부모님이 크게 상심하셨죠.”
인생에서 처음 맛본 좌절. 몸이 불편하니 모든 일에 제약이 걸렸다.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없어 당연히 가야 할 교사의 길을 접었고, 사회생활을 하기도 벅찼다. 결혼 후 아이 둘을 낳고 공부하며 지내던 중 기회가 왔다. 2002년 유시민 의원이 만든 인터넷 정당에 가입한 것.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유시민 선배가 인터넷 정당을 만든다는 소식에 바로 가입했어요. 동네 소모임에 나가며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죠. 정치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는데, 2004년 선거운동을 하던 중 기회가 왔어요. 제가 유세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구의원을 해보라고 권유했죠.”
하지만 다시 시련이 닥쳤다. 유방암 2기. 수술을 끝내자 오만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구의원을 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수술을 해도 재발 가능성이 있으니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잖아요. 혹시 일찍 떠나더라도 아이들에게 ‘엄마가 구의원 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죠. 그래서 어렵사리 비례대표로 2006년에 구의원 생활을 시작했어요.”
구의원을 하겠다는 선언에 가족들은 당황해했다. 항암치료를 계속 받고 있던 상황. 스트레스 없이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하는데, 다시 병이 도질까 걱정이 앞섰다. 이경실 씨도 온 힘을 다해 언니를 말렸다. 그러면서도 언뜻 언니의 속마음이 읽혀 마음이 아팠다.
“언니가 수술 후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난 기분, 이대로 주저앉기엔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언니가 똑 부러지고 일을 잘하는 것은 알지만, 건강이 걱정돼서 온 식구가 반대했죠.”
당선 후 어머니가 계신 이경실 씨 집에 모여 가족파티를 열었다. 기쁜 마음에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사고에, 암에 늘 눈에 밟히던 셋째 딸의 새 출발. 이 의원은 “그간 흘린 눈물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며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 전했다.
이 의원은 당선을 동생 덕으로 돌렸지만 이씨는 오히려 언니에게 미안하다. 언니 자랑하기가 민망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워낙에 일 잘하는 언니인데 괜히 동생 덕 봤다는 말을 듣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나도 둘도, 모두 미안한 마음이다.
“당선되고 난 뒤 주변 사람들이 ‘네가 아니어도 될 사람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이야기 들으니 기분 좋고 자랑스러웠어요. 주민들은 잘 모르지만 강남구청에는 언니가 일 잘하는 구의원으로 많이 알려졌거든요.”
이 의원은 구정 홍보를 중점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아무리 혜택이 많아도 구민이 모르면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서다. 강남이지만, 재능을 살리는 장학재단도 만들고 싶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선 직후 피켓을 만들어 들고서 감사인사를 다녔는데, 지금껏 이만큼 낮추고 세상을 산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초심을 기억하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호쾌한 웃음 DNA가 꼭 닮은 자매
“창피해 죽겠어요. 동생 팔아서 당선된 것 같잖아요. 제가 동생이라면 모를까, 언니가 동생 신세를 지고….”
이경옥 의원은 명함을 건네며 연신 “창피하다”고 말했다. 명함에는 ‘동생은 ‘세바퀴’ 성격짱! 언니는 ‘강남구’ 실력짱!’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도 실렸다. 사진 아래에는 ‘친동생 이경실과’라는 설명이 달렸다.
이 의원은 2006년 비례대표로 구의원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번 선거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강남구는 한나라당 텃밭. 지난 회기 때 구의원 21명 중 민주당 의원은 단 3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지지율 38%가 넘는 압승. 그는 “경실이 덕분에 승리한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처음에는 경실이 이야기를 일부러 안 했어요. 한데 주변에서 동생 이야기를 꼭 넣으라고 하더라고요. 선거를 치르며 동생 덕을 톡톡히 봤어요. 보통 구의원 선거에는 무관심한데, ‘이경실 언니’라고 소개하면 대번에 반응이 와요. 한나라당 텃밭이라 기대 없이 시작했는데, 경실이 덕에 당선된 것 같아요. 개그우먼 김지선 씨도 와서 도와줬고요.”
1남4녀 중 이 의원은 셋째, 이경실 씨는 넷째다. 둘 사이 남자형제가 있었으나 돌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이씨와 달리 선생님처럼 차분한 인상. 하지만 시간을 두고 찬찬히 살피니 호쾌한 웃음, 또랑또랑한 목소리, 분명한 말투에서 이씨의 모습이 겹친다.
“외모는 별로 안 닮았어요. 저는 아버지, 동생은 할머니 쪽에 가깝죠. 하지만 성격은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저도 가족 모임이나 회식에서 사회를 ‘기똥차게’ 보거든요.(웃음) 어머니가 여든둘이신데 지금까지 춤을 추실 만큼 멋을 아시고, 큰언니도 옛날에 가요 앨범을 냈어요. 집안 식구 모두 끼가 있는 편이죠.”(이 의원)
“가족들이 직선적이고 꼿꼿한 데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귀에 인이 박이도록 하신 말씀이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였어요. ‘경우’ ‘염치’를 강조하셨고, 가장 심한 욕이 ‘싸가지 없는 X’이었죠. 언니가 저보다 더 싹싹하고 친화력이 좋아요.”(이씨)
언니를 떠올리면 이경실 씨는 동화책 읽어주던 기억부터 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언니는 인물마다 목소리를 달리해서 책을 읽어주었다. 웃긴 인물, 조용한 인물 등 성격별로 감정을 달리했다. 학교에서 언니가 하던 대로 책을 읽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언니가 연예인 기질이 더 많아요. 어릴 때부터 표현력이 굉장히 좋았는데, 저도 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도 언니는 전교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늘 공부를 잘했어요. 제가 연극영화과를 간다고 했을 때 ‘역사학과나 철학과를 가라’며 말렸죠.”
장애와 암 딛고 새로운 출발
이 의원은 왼손 도움 없이 오른팔을 들 수 없다. 어깨신경이 손상돼 팔의 움직임이 여의치 않다. 한국외대 한국어교육과 80학번인 그는 대학 때 학생운동에 빠져 지냈다. 대학 4학년에 일어난 한순간의 사고로 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다친 이야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를 대신해 이경실 씨가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고3 때쯤이었나. 군산 집으로 언니가 다쳤다는 전화가 걸려왔어요. 도서관 7층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떨어진 거죠. 나무에 걸려서 살았지만, 폐에 구멍이 나고 크게 다쳤어요. 어려서부터 공부 잘한 언니는 엄마의 유일한 끈이었는데, 부모님이 크게 상심하셨죠.”
인생에서 처음 맛본 좌절. 몸이 불편하니 모든 일에 제약이 걸렸다.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없어 당연히 가야 할 교사의 길을 접었고, 사회생활을 하기도 벅찼다. 결혼 후 아이 둘을 낳고 공부하며 지내던 중 기회가 왔다. 2002년 유시민 의원이 만든 인터넷 정당에 가입한 것.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유시민 선배가 인터넷 정당을 만든다는 소식에 바로 가입했어요. 동네 소모임에 나가며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죠. 정치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는데, 2004년 선거운동을 하던 중 기회가 왔어요. 제가 유세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구의원을 해보라고 권유했죠.”
하지만 다시 시련이 닥쳤다. 유방암 2기. 수술을 끝내자 오만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구의원을 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수술을 해도 재발 가능성이 있으니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잖아요. 혹시 일찍 떠나더라도 아이들에게 ‘엄마가 구의원 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죠. 그래서 어렵사리 비례대표로 2006년에 구의원 생활을 시작했어요.”
구의원을 하겠다는 선언에 가족들은 당황해했다. 항암치료를 계속 받고 있던 상황. 스트레스 없이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하는데, 다시 병이 도질까 걱정이 앞섰다. 이경실 씨도 온 힘을 다해 언니를 말렸다. 그러면서도 언뜻 언니의 속마음이 읽혀 마음이 아팠다.
“언니가 수술 후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난 기분, 이대로 주저앉기엔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언니가 똑 부러지고 일을 잘하는 것은 알지만, 건강이 걱정돼서 온 식구가 반대했죠.”
당선 후 어머니가 계신 이경실 씨 집에 모여 가족파티를 열었다. 기쁜 마음에 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사고에, 암에 늘 눈에 밟히던 셋째 딸의 새 출발. 이 의원은 “그간 흘린 눈물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며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 전했다.
이 의원은 당선을 동생 덕으로 돌렸지만 이씨는 오히려 언니에게 미안하다. 언니 자랑하기가 민망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워낙에 일 잘하는 언니인데 괜히 동생 덕 봤다는 말을 듣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 하나도 둘도, 모두 미안한 마음이다.
“당선되고 난 뒤 주변 사람들이 ‘네가 아니어도 될 사람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이야기 들으니 기분 좋고 자랑스러웠어요. 주민들은 잘 모르지만 강남구청에는 언니가 일 잘하는 구의원으로 많이 알려졌거든요.”
이 의원은 구정 홍보를 중점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아무리 혜택이 많아도 구민이 모르면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에서다. 강남이지만, 재능을 살리는 장학재단도 만들고 싶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선 직후 피켓을 만들어 들고서 감사인사를 다녔는데, 지금껏 이만큼 낮추고 세상을 산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초심을 기억하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