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의 능침. 왼쪽이 원경왕후의 능침이고, 오른쪽이 태종의 능침이다.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때 중국 쪽은 명나라 영락제가 통치하던 시기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이었으며, 로마교회의 부패상과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일던 때였다.
살아서 자신의 묘호를 알았던 이방원
1400년 11월 11일 정종이 왕세제 태종에게 선위했다. 정종이 왕권을 넘기려 하니 세제인 태종이 울면서 받지 않았으나 임금이 권유해 부득이 받아들였다. 태종이 둘째형인 정종에게 왕권을 이어받은 것이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지켜본 태조는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한다는 뜻을 전하니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태조도 어쩔 수 없는 왕위 계승이었다.
태종은 17년 10개월의 재위기간에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 폐지로 군사권을 장악했으며, 호패법 실시로 전국의 인구를 파악해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며 왕권을 강화했다. 거북선을 제조하게 하고, 신문고를 설치했으며, 한양 천도를 완성했다.
원경왕후 여흥 민씨는 개경의 귀족 출신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친족 배척 정책을 쓰면서 친정 식구인 민씨 형제의 유배와 처형 등의 문제가 불거져 부부간 불화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나 죽어서는 쌍분 속에 잠들어 영원한 동반자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1420년 7월 10일 정오, 세종의 어머니인 대비(원경왕후 민씨)가 상왕(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머리 풀고, 버선 벗고, 수일 동안 통곡한 세종은 대비의 능에 절을 세울 것을 논의하는 중에 상왕의 묘호를 태종으로 하고 능침사찰을 두기로 했다. 이로써 이방원은 살아서 자신의 묘호를 알게 됐다. 원래 묘호는 승하 후 3년 안에 종묘에 신주를 모시기 전에 그의 업적과 치적, 품성을 고려해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헌릉 자리는 태종이 생전(1415년)에 지관 이양달을 시켜 잡은 것을 좌의정 하륜이 천거했다. 이 지역은 백두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내려와 종산인 속리산에 머물렀다 서쪽으로 꺾인 뒤 또 수백 리를 거슬러 올라 과천 청계산에 이르러 다시 동북으로 꺾였다가 한강 앞에서 그쳐 대모산에 이르는 형세라 평가받는다. 이를 회룡고조(回龍顧祖)형이라 한다.
대모산의 허한 동부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고 습한 곳은 버드나무를 심어 비보(裨補)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때 정성 들여 조성한 헌릉은 여러 차례 풍수 논란을 거쳐 맥을 끊는다는 이유로 도로를 폐쇄하기도 하고 박석을 깔기도 했으나, 지금도 풍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헌릉 역시 건원릉을 조영한 박자청이 산릉도감을 맡았다. 동원된 인원은 1만4000여 명에 이른다. 건원릉 때보다 두 배나 많다. 8월 25일 승하한 대비의 시호는 원경왕후, 능호는 ‘바칠 헌(獻)’을 써서 헌릉이라 정했다. 이때 태종은 원경왕후와 자신의 능에 쓸 석물(石物)을 안암동 것으로 하고 석실로 만들라고 명했다. 그리고 능침 덮개 돌(全石)을 한 개는 커서 다루기 힘드니 두 개로 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향후 능 옆에 사찰을 세우지 말라는 법을 세웠다. 태종의 억불숭유 정책의 증거다.
헌릉의 석물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쌍릉의 배치를 보여준다.
태종은 왕권을 세종에게 넘긴 뒤에도 사냥 등을 즐기면서 섭정을 했으나 세종 4년인 1422년 4월 22일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세종은 명산과 개경사, 길상사 등에 여러 사람을 풀어 기도를 드리고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인을 석방하고 점을 보면서 아버지의 회복을 기원했다. 또한 궁궐에 비상을 걸어 궁내 출입을 통제했다.
병세가 더해지자 태종은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넷째 사위인 의산군 남휘의 집으로 옮겼으나 5월 10일 56세로 승하했다. 이렇게 병중에 거처를 옮긴 것은 아무리 상왕이라도 궁궐에서는 임종을 할 수 없는 왕실 법도 때문이었다. 세종은 연화방(창경궁) 신궁에서 버선을 벗고, 머리를 풀고 슬퍼했으며, 백관은 흰옷에 검정사모를 쓰고 검정각대를 띠고 궁중에 들어와, 열다섯 번 곡을 하고 네 번 절한 뒤 자리를 옮겨 곡을 했다. 이때는 여름철이라 얼음 소반을 준비하고 졸곡(장례) 때까지 사직을 제외한 모든 제사를 금했다. 세종은 부왕 태종이 병들자 간호하느라 음식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에나 묽은 죽으로 하루 한 끼를 들었다 한다. 효자 세종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종의 염(殮)은 날씨가 더워 소렴과 대렴을 같이 했다. 소렴은 시신을 깨끗이 하고 의복 19벌을 입히는 것이고, 대렴은 90벌을 입히는 것이니 모두 109벌의 옷을 입힌 것이다. 이는 사람이 지닌 백팔번뇌[사람의 눈, 귀, 코, 입, 몸, 뜻의 육근(六根)에 각각 고(苦), 낙(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거기에 탐(貪), 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를 다시 과거, 현재, 미래에 풀면 모두 108가지가 된다]의 해탈로 해석된다. 이 소렴과 대렴 기간에 왕은 정사를 정지한다.
상왕 승하의 슬픔 속에서도 정치적 암투는 계속됐다.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세자였으며 맏아들인 양녕대군을 궁궐(빈전)에서 내쫓으라고 상소를 하고 의정부, 육조에서도 하나같이 상소했다. 당시는 양녕대군이 품행이 방탕하다고 폐세자 되고 동생 세종이 즉위해 감찰대상으로 경기도 광주에 머물 때였다. 지금의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의 말인즉 “세종이 즉위하던 날 양녕이 밤중에 도망을 쳐서 태종께서 백방으로 수색해 찾아 우리 의정부와 육조에 넘겼으니 전하께서는 외방으로 돌려보내고, 효령대군 이하 종실들도 궁궐 내 빈소에 있지 말고 각기 사가의 빈소에 있으며, 다만 아침저녁에 영전제사만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어머니의 초상에도 장례를 마치고 돌아갔으며, 부모의 초상은 인생에 한 번 당하는 일인데 어찌 그리 하랴”는 이유로 상소를 거부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이 계속 상소하자 결국 양녕대군은 태종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이천 사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양녕대군이 이천으로 가자 사헌부는 양녕의 장인이 이천과 가까운 안성에 있어 장래 화를 꾸밀 염려가 있다는 핑계를 대 장인 김한로를 먼 곳으로 옮기라고 상소했다. 그러나 현명한 세종은 이를 무시했다. 감시 대상이었던 양녕은 상중에 수시로 궁궐을 들락거려 수문장과 사정관들을 곤란하게 했다. 발인을 앞두고 세종의 배려로 도성에 머물도록 허락받은 양녕은 남의 집 개를 빼앗아 먹다가 탄핵을 받아 청주로 쫓겨났다. 결국 양녕은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고 1년이 지난 소상(小祥)부터 제례에 참석할 수 있었다.
태종 장례 때도 산릉도감을 맡은 박자청은 인부 1만 명을 요구했으나 세종은 경기 수군과 관노로 대체하고 징발 인원은 가까운 도에서 2000명으로 하라고 명령했다.
8월 8일 이방원의 존호를 ‘성덕신공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고 9월 4일 발인했다. 9월 18일 세종이 졸곡제를 올리고 상복을 벗음으로써 국장이 마무리됐다.
태종 승하 다음 해에 헌릉에 신도비를 세웠다. 헌릉의 신도비는 수로를 통해 강화도의 돌을 운반해온 것이다. 비문은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이 지었다. 신도비문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집안 내력 및 공적, 효와 덕, 찬양문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신도비는 임진왜란 때 받침돌이 깨어지고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돼 1694년 숙종의 명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헌릉은 태종이 생전에 자리를 잡고, 세종이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든 조선시대 최대의 왕릉이다.
헌릉의 능침 앞 석물은 망주석만 빼고 모두 4개씩 배치됐다. 남한에 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것이다. 헌릉은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 공민왕의 무덤)과 정릉(正陵, 노국공주의 무덤)의 능제를 기본으로 조영했다. 천광의 깊이는 주척(周尺)으로 13척 3촌이며 흙에 윤기가 흐르며 수기가 없다고 태종이 직접 확인하고 우측에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 왕권 강화의 주역인 태종이 터를 잡고 석물의 제작을 감독하고, 최고의 선군인 세종이 만들었으니 헌릉이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길지에 자리한 최고의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헌릉의 난간석(왼쪽)과 무인석.
헌릉은 불교적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법석(法席)은 물론 원찰(願刹)도 금하고 원당이 없으며, 다만 현판류(懸板類) 8점이 남아 있다. 헌릉의 상설은 고려 현릉(玄陵)과 정릉(正陵)의 제도를 답습해 봉분을 2기로 하되 주위의 난간을 터서 연결하고, 망주석(望柱石)을 제외한 모든 석물을 한 벌씩 갖추어 쌍으로 배치했다. 봉분 하부에는 병풍석을 만들어 우석(隅石)에는 영저(靈杵)·영탁(靈鐸)을 새기고, 면석(面石)에는 와형운(渦形雲) 무늬를 두르되 중앙에 방위별로 수관인신(獸冠人身)의 12지신상을 새겨넣었고 하단에는 영지(靈芝)를 새겼다. 병풍석에는 앙련(仰蓮), 복련엽(伏蓮葉)을 새겼다.
헌릉의 예감은 효종 8년(1657) 1월 23일에 만든 것이다. 예감의 설치는 초기에는 없었던 것으로 제례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헌릉은 서울 강남의 대룡산 능선에 조성돼 많은 면적의 녹지를 이루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수백만 평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30여만 평, 즉 100만m2 정도로 축소됐다. 이번에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훼손된 능역시설의 복원 및 능역 전면부의 비닐하우스 정리 그리고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능선 보존 대책을 세울 것을 권유했다.
헌릉 진입공간 전면의 낮은 지역은 천연의 오리나무숲에 물봉선, 삿갓사초 등 다양한 습지성 식물이 자연생태적으로 자라, 서울시가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능 아래쪽에 자리 잡은 5만6200여 m2(1만7000여 평)의 오리나무숲은 습지성 식물과 오색딱따구리, 박새, 직박구리 같은 조류도 볼 수 있는 등 소중한 자연생태계가 고스란히 잘 보존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