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0일 국회 지식경제위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주승용 의원(사진)과 임인배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이 설전을 벌였다.
과거 국감에서는 의원들이 제기한 몇 가지 이슈가 불거져 국감장을 뜨겁게 달구곤 했다. 또 정부가 각 의원실에 제출한 국감자료 중 민감한 사안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파장이 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스타 의원’이 부각됐다.
하지만 올해 국감에서는 의원들이 터뜨린 메가톤급 이슈가 없었다. 상임위마다 정치적 문제로만 다투거나 이미 나온 내용들이 재탕, 삼탕으로 다뤄졌다. 정부가 제출한 자료도 너무 미흡해 기자들이 ‘기삿거리’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니 스타 의원이 뜨려야 뜰 수도 없었다.
의원들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이 오히려 피감기관들이 주목을 받았다. 불성실한 자료 제출이나 의원들에 대한 고압적 태도 등이 문제가 된 가운데 일부 피감기관장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국감장의 전형적 모습인 ‘호통치는 국회의원과 쩔쩔매는 피감기관장’이 역전된 듯한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국감장 곳곳서 역전된 모습 연출
10월20일 지식경제위의 한국전기안전공사 국감이 대표적이다. 첫 질의에 나선 민주당 주승용 의원은 “선배 의원 출신인 임인배 사장이 지난해 감전사고 현황 등 기본 자료조차 제출하지 않았다”며 “이런 것이 (임 사장이 기치로 내건) ‘1초 경영’이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임 사장이 발끈해 주 의원의 발언을 가로막고 공사 경영의 어려움을 직설적으로 토로한 뒤 한마디 내뱉었다.
“나는 디테일한 부분을 모르니까 담당한테 물어보라고요, 나는 모른다니까요.”
임 사장은 그러면서 뒤쪽에 앉아 있는 공사 임원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했다. 이에 보다 못한 정장선 위원장이 나섰다.
“사장님! 중지하십시오. 뭐 하는 겁니까?”
정 위원장의 제지에도 임 사장이 발언을 이어나가자 정 위원장은 결국 국감을 중단시켰다. 결국 여야는 간사 간 협의를 통해 22일 국감을 재개했다.
임 사장은 3선 의원 출신으로 지식경제위의 전신인 산업자원위에서 활동한 바 있고,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도 지냈다. 그는 소동 후 “무리하게 자료를 요구하는 데다, 자꾸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만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임 사장처럼 중진 의원 출신이지만 이번 국감에서 ‘후배 의원’들에게 감사를 받은 피감기관장들은 꽤 된다. 하지만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정형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김광원 마사회장,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등은 임 사장과 달리 갑과 을이 뒤바뀐 현실에 대체로 적응한 모습을 보였다.
임 사장 외에도 이번 국감에서는 ‘튀는’ 피감기관장이 여럿 나왔다. 의원들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환경노동위의 환경부 국감에서 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4대강 정비사업을 놓고 이만의 장관과 옥신각신하던 중에 “환경부 장관님, 정신 차리시고요”라고 한 말이 발단이 됐다. 이 장관은 곧바로 “정신 멀쩡합니다”라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관료 출신인 이 장관의 고압적 답변 태도가 이어지자 한나라당 조원진 의원이 “장관의 태도가 상당히 불손하다”는 경고의 말로 제동을 걸었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10월5일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일부 의원들의 질의에 훈계조로 답변해 국회의원을 무시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군 출신다운 ‘소신형’이란 호평과 국회의원을 무시한다는 지적을 함께 받았다. 의원들이 기무사 부지에 건립을 추진 중인 군 골프장 문제를 따지자 “협의매수의 의미를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며 나무라듯 말했다. 또 북한 선박의 접근을 포착하지 못한 해군 레이더 문제를 추궁하는 의원에게 “기능을 (제대로) 아셔야 한다”고 훈계조로 답변하기도 했다.
학자 출신으로 국감 데뷔전을 치른 심명철 4대강사업추진본부장은 의원들의 매몰찬 질의에도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답변 내용은 공격적이고 강단이 묻어났다. 의원들이 4대강 정비사업에 홍보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지적하자 “아직도 홍보가 부족하다”고 반박하는 식이었다.
해가 갈수록 국감 취지 퇴색
과거에는 의원들의 집요한 추궁이 이어지면 피감기관장은 무조건 “검토하겠다”거나 “의원님의 뜻을 잘 받들어 앞으로 잘하겠다”는 식으로 꼬리를 내리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국감에서는 의원들의 뜬금없는 질책 같은 것에 전혀 꿀리지 않고 ‘소신’을 피력하는 피감기관장이 줄을 이었다.
그뿐 아니라 각 피감기관 실무자들도 의원 보좌진의 무리한 자료 요구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이 잦았다. 일부 의원은 국감장에서 자신의 보좌진과 피감기관 실무자 사이에 오간 원색적인 말다툼을 공개했을 정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나라당 조문환 의원실의 이동창 보좌관은 1992년부터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근무하면서 18년째 국감장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이 보좌관은 이런 변화에 대해 “국회가 자초한 현상”이라고 잘라 말했다.
“국감 본래의 취지가 해를 거듭할수록 퇴색하고 있다. 정당은 당리당략에 이용하는 장으로, 의원들은 개인 홍보의 장으로만 간주하는 것 같다. 언론에 한 줄이라도 나오기 위해 골몰한다. 갈수록 정도가 심하다.
국회 스스로 국감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니 피감기관이 국감장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 아닌가. 특히 올해가 유별났다. 한마디로 피감기관이 국회를 ‘자질 미달’로 여기고 우습게 본 것이다.” 한나라당 중진 의원으로 있다가 지난해 총선 때 공천에서 떨어진 뒤 공공기관을 이끌며 올해 국감을 치른 한 피감기관장도 이 같은 해석에 동의했다. 그는 “뒤바뀐 처지로 국감장에 나가보니, 내가 현역 의원 시절 과다한 자료를 요구하고 무작정 호통만 치던 일이 생각나 부끄러웠다”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