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B> 가오치항에서 바라본 사량도.
가오치 선착장에서 바다 냄새와 함께 1시간쯤 들어가면 나타나는 사량도. 이 섬은 산이 특별한 섬이다. ‘섬에 산이 있어봤자 뭐 볼 게 있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량도에는 가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르고, 한 번 오르면 계속 찾게 되는 매력덩어리 산이 있기 때문이다.
섬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산
경남 통영시에 속한 사량도는 바다와 산이 한데 어우러진 등산로가 일품이다.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 수우도의 3개 섬으로 이뤄졌는데, ‘사량(蛇梁)’이라는 이름은 상도와 하도를 가로 흐르는 물길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해서 붙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사량도는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용됐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왜구 토벌을 위해 성을 쌓기도 했다. 수백 년 전의 치열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없이 아름다운 바다에서 세월을 낚는 낚시꾼과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이 오늘의 사량도를 누리고 있다. 사량도에서 사랑받는 산행코스는 옥녀봉을 시작으로 해서 가마봉, 불모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코스와 지리산에서 출발해 반대로 향하는 약 6.5km 구간의 코스다.
하나의 주봉이 있어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다른 산들과 달리, 사량도의 산은 하나의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대부분의 봉우리가 해발 400m 정도라 웬만큼 산을 타는 사람이라면 심심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바다에서 시작되는 산이다 보니 만만치가 않다. 산세가 험해 긴장감이 넘치는 데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광은 시원함을 지나쳐 서늘함까지 안겨준다.
사량도에는 우리가 아는 산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바로 지리산이다. 원래 이름은 지리망산이었다. 맑은 날 이 산에 오르면 저 멀리의 지리산 천왕봉까지 보인다고 해서 지리망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망’자를 빼고 그냥 지리산이라고 한다. 덕분에 한자까지도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의미의 ‘지리산(智異山)’이 됐다.
칼날 같은 능선, 긴장감 넘치는 산행
그렇게나 아름답다는 옥녀봉에서의 일출. 새벽 5시 랜턴을 켜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산에 올랐다. 산이 가파르다는 말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지만, 등산 초입의 돌계단을 오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어찌나 높던지, 금세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얼마쯤 올랐을까. 주위가 조금씩 환해지며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한 코발트블루 빛깔 옷을 입은 다도해의 자태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멀리서 태어나고 있는 오렌지 빛의 하늘과 눈을 비비며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 발밑에 펼쳐진 항구들. 그 모든 풍경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일출을 쫓아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감동스러운 일출을 여기에서 또 만날 줄이야. 고생하면서 올라가기는 했지만 어찌나 뿌듯하던지.
<B>2</B> 사량도의 아름다운 일몰. <B>3</B> 옥녀봉에서 가마봉에 오르는 코스. <B>4</B> 험한 길의 연속. <B>5</B> 바다낚시로 잡은 물고기. <B>6</B> 후릿그물 낚시에 걸린 복어 새끼. <B>7</B> 사량도 버스.
옥녀봉에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뒤에는 잠시 내려놓은 긴장감을 다시 챙겨야 한다. 그야말로 칼날 같은 능선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밧줄에만 의지해 바위 절벽에 오르기도 하고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철제계단도 통과해야 했다. 중국 산수화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장가계의 뾰족 봉우리도 ‘저리 가라’다(그곳에는 경이로운 높이의 엘리베이터라도 있다).
바위산이라 발 디딜 공간도 없다. 가끔 만나는 흙길에서는 나무뿌리가 발끝에 채여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외줄을 타고 깎아지르는 절벽을 오를 때는 절대 발밑을 보면 안 된다. 천 길 낭떠러지가 바로 발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저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눈을 하늘에 두고 ‘괜찮아, 괜찮아’ 주문을 외워야 했다. 먼저 산 위에 올라 “힘내, 다 왔어” 목이 쉬도록 외치며 손을 뻗어주는 선배의 손길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멀리서 보면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산이었는데, 직접 산을 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밖에서 보면 하염없이 좋아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는 우리 인생살이와도 닮았다. 도 산이 험하다 보니 ‘위험’이라는 빨간색 표지판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사량도의 산행을 즐기는 첫 번째 원칙은 절대 조급해하거나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 수직 절벽을 가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우회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우회로도 평탄한 길은 아니지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나무사다리를 오르는 것보다는 낫다. 가파른 산이기는 하지만 지레 겁먹고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스스로 어느 정도 체력과 담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마치 용감무쌍한 해병용사라도 된 것처럼 ‘하면 된다’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그런지 사량도에는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산에서 내려오고 나면 ‘내가 저 산을 어떻게 탔을까?’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달력을 보면서 ‘언제 또 가지?’라고 궁리하게 될 정도다.
바다에서 느끼는 손맛
산행이 아니더라도 사량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어촌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해안선을 따라 걷는 트레킹, 해안 드라이브를 하거나 사륜 바이크를 타고 유유자적 섬을 돌아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촌체험 프로그램에는 후릿그물 낚시, 조개 캐기, 바다낚시 등이 있다. 후릿그물 낚시는 여러 명이 힘을 합쳐서 그물로 하는 낚시.
청정지역이다 보니 한 번만 그물을 드리웠다 올려도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잡힌다.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여러 명이 함께 체험해본 후릿그물 낚시에서의 가장 큰 소득은 손톱만 한 해마나 알사탕만 한 새끼 복어였다. 아직 한참 자라야 하기에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지만, 그물로 해마를 낚았다는 것만도 재미있고 놀라웠다.
‘나는 그냥 쉬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섬 일주 드라이브가 어떨까. 사량도는 자동차를 배에 싣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바다와 긴 뱀처럼 이어진 산 능선을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해안도로는 길이가 17km 정도로, 한 바퀴 돌아보는 데 30분에서 1시간이면 충분하다. 은빛의 반짝이는 물빛을 감상하며 섬 구석구석을 맛보기 위해 떠나는 사량도 여행, 째깍째깍하는 일상의 시계 같은 것은 풀어놓고 돌아보면 더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