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6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 시도교육감 간담회장에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맨 왼쪽)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경쟁과 공개’ 기조에 ‘사교육’ 복병
며칠 뒤, 침묵을 지키던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한나라당 의원 모임에 참석해 입을 열었다. 점잖은 단어를 골라 썼지만 한마디로 ‘곽 위원장은 사교육 문제에 나서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법제화 과정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의원 상당수가 심야교습 제한 법제화를 거부했고 당과 정부, 청와대 협의 과정에서도 잡음이 끊이지 않으며 사교육 문제는 당-정-청 불화로 번지는 양상을 보였다.
정권 실세로 꼽히는 이들이 너나없이 사교육 문제에 달려든 것을 두고 ‘집권 2년차에 접어든 이명박 정부 사람들의 강박증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이 대통령이 대선 당시 교육 분야에서 내건 대표 공약은 ‘공교육 두 배, 사교육비 절반’이었다.
그런데 집권 1년차의 성적은 이를 무색하게 했다. 영어, 수학 월평균 사교육비가 2007년에 비해 8~12% 늘었다. 경기침체 속에 학부모들이 체감하는 사교육비 부담은 이보다 훨씬 크다. 민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교육을 정권 전반기에 휘어잡지 못하면 끝까지 만회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중구난방 사교육 대책’이라는 악수(惡手)로 이어진 셈이다. 강력한 사교육 대책을 주장한 한 정치권 인사는 “이참에 중산층의 사교육비 부담을 때려잡느냐, 못하느냐에 이 정권의 성패가 달렸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나오는 교육정책은 웬만하면 ‘사교육 경감대책의 일환으로’라는 꼬리표가 달린다. 아예 ‘사교육 없는 학교 만들기’라는 정책까지 나왔다. 사교육을 줄이자는 취지는 좋지만 사교육 대책에 매몰된 나머지 정부의 교육정책이 흔들린다는 비판도 커졌다. ‘경쟁과 공개’를 추구하던 교육 기조가 ‘사교육’이라는 복병만 만나면 갈지자(之) 행보를 한다는 지적이다.
정권 출범 후 첫 대통령교육과학문화수석이던 이주호 현 교과부 제1차관이 그린 ‘사교육 절반’의 밑그림은 공교육 강화를 통해 자연스레 사교육을 줄이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정책은 고교 다양화, 대학수학능력시험 과목수 축소, 대학 입시에 입학사정관제 도입 등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사교육 대책의 단골손님이던 특목고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교 다양화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 현장의 반응은 간단치 않았다. 교육계에서는 ‘정부가 입시정책에 손을 댈수록, 사교육 대책을 내놓을수록 사교육이 팽창한다’는 말이 늘 정설처럼 떠돈다. 심지어 ‘최악의 입시제도라도 안 건드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학파라치 제도로 사교육 음성화 우려
공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꺼낸 ‘고교 다양화 300정책’은 이래저래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자율형 사립고 100곳을 양성해 질 높은 고교 교육 수요를 충족시키겠다던 당초 취지는 사교육 논란 속에 변질됐다. 자율고 입시를 위한 사교육을 우려하는 여론이 들끓자 신입생 선발 방법에 추첨을 끼워넣었다. 수월성 추구라는 원칙을 내던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도 학부모도 원성이 자자하다. 우수 학생을 선발할 권리도 안 주면서 돈(법정 전입금)을 더 내놓으라니, 자율고로 전환하겠다는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다. 학부모들은 도리어 ‘사교육 파이’가 더 커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반에서 5등 정도 하는 아이만 특목고 준비를 했다면, 이제는 20등 하는 아이들까지 추첨에 기대를 걸고 자율고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 내신성적 50% 이상인 학생을 대상으로 추첨제를 한다니 중간 수준만 넘으면 자율고 대비 학원으로 뛰어갈 판이라는 지적이다. 정부가 책상에서 굴리는 머리와 학부모들이 현장에서 뛰는 몸통이 얼마나 정반대로 달려가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입학사정관 확대도 기대와 달리 사교육 시장을 키우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우후죽순 생겨난 논술학원들이 이제는 입학사정관 학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입학사정관 전형에 제출할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를 수십만~수백만원을 받고 대신 써준다는 학원이 등장하는 게 현실이다.
사교육비가 줄어들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자 이명박 정부도 급기야 특목고 입시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외국어고의 경우 변형된 지필고사를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나섰다. 사교육 주범으로 꼽히는 듣기평가는 올해부터 공동출제를 하도록 했다. 과학고에는 올림피아드를 비롯한 특별전형을 없애버리고 입학사정관제를 승부수로 던졌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특목고 입시에 얽힌 문제를 줄일 것이라고 예견하는 이는 거의 없다.
가장 ‘핫(hot)’한 논란이 된 학원 심야교습 제한은 법제화를 하지 않고, 시도별 조례로 제한하는 교과부 측 의견으로 일단락됐다. 최근 시작된 일명 ‘학파라치 제도’(학원이나 개인 교습자의 불법행위를 신고하면 최대 20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는 일단 학원계를 위축시키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벌써부터 단속의 실효성이나 사교육의 음성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신고 건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보상 결정 내역도 학파라치의 성공 여부에 대한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사교육 대책은 우여곡절 끝에 일단 교과부가 공식 통로를 담당하기로 교통정리된 분위기다. 하지만 ‘교과부가 사교육 단속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청와대와 당의 불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학원 심야교습 금지 법제화의 총대를 멘 정두언 의원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교과부 관료들을 비난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최구식 제6정조위원장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의원, 외부 전문가 등으로 ‘사교육 대책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당 차원에서 다시 학원 심야교습 제한, 특목고 입시의 내신 반영 방식 등을 논의하겠다는 구상이다. ‘급격한 변화는 안 된다’는 교과부와 ‘개혁적인 대책이 시급하다’는 정치권 일각의 견해 차이가 언제든 대립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사교육이 더욱 늘어나는 여름방학에 눈에 띄는 사교육 절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또다시 수위를 한껏 높인 대책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