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주유소 50대 아르바이트생 김모 씨.
6월30일 서울 A주유소에서 만난 50대 아르바이트생 김성규(가명·53) 씨는 답답한 듯 현실의 불안정한 고용환경을 꼬집었다.
과거 관리직으로 일하던 직장생활을 접고 A주유소에서 1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해왔다는 김씨는 “아이들이 고3, 중2라 아르바이트 월급 받아서 몽땅 집에 갔다 줘도 학비와 생활비 쓰고 나면 적자가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 들어 40, 50대 중장년층의 아르바이트 구직자가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포털사이트 ‘알바천국’(www.alba.co.kr)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2009년 상반기(3~5월 기준) 40대 아르바이트 구직희망자는 2008년보다 평균 35.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50대 아르바이트 희망자는 53.7%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극심한 취업난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식들의 교육비 등으로 생활비가 크게 느는 40, 50대에게 취업은 생계가 걸린 절박한 문제다.
이런 통계는 또한 40, 50대 아르바이트 구직자의 선호 업종이 젊은이의 선호 업종으로 다양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과거 중장년층 남성은 주로 건설용역 일용직이나 운전직 등을 해왔다. 여성 중장년층은 가사도우미, 미화원 등이 대표적인 아르바이트 업종.
그러나 최근 들어 패스트푸드점, 주유소, PC방, 편의점 등 젊은층이 선호하는 업종에도 중장년층 구직자가 몰리면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노땅 알바생’은 젊은이보다 순발력은 떨어질지 모르나 사회 경험이 풍부하고 이해심, 책임감이 많아 호감이 가는 경우도 많다”며 40, 50대 아르바이트생의 장점을 설명한다.
불안한 고용시장 젊은이들과 경쟁
하지만 중장년층의 다양한 아르바이트 참여는 불안한 경제환경의 방증일 수도 있다. 젊은 학생들의 용돈벌이 수단으로 인식되던 아르바이트가 이제는 중장년층의 ‘생계형 일자리’로 변해가는 것.
알바천국 홍보팀 이승윤 과장은 “현재 취업시장의 경색과 40, 50대의 퇴직압력이 가속화하다 보니 중장년층의 아르바이트 구직이 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고용불안은 올 하반기에도 영향을 미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40, 50대는 당분간 줄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중장년층의 아르바이트는 이처럼 ‘생계비 마련’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자녀의 사교육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 중년층 주부도 많다. 주부는 중장년 남성보다 패스트푸드점, 서점, PC방 등 젊은층 선호 아르바이트 업종에 종사하기가 수월하다. 유명 패스트푸드업체인 L사는 105개 직영점에 모두 80명의 중년 주부사원이 근무하는데, 주부 아르바이트생의 경우 하루 5~6시간 일하고 50만~6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이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사교육비로 사용한다.
이러다 보니 ‘배부른’ 중장년층이 젊은이의 일터를 ‘뺏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에 대해 “현실의 고용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L사의 한 관계자는 “주부 알바생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간대에는 젊은 알바생을 못 구해서 난리다. 오후 3시까지는 학생들 수업이 있기 때문에 어차피 주부 사원밖에 쓸 수 없는 처지”라고 설명했다.
아르바이트 구직자가 느는 문제는 현재 정치권 다툼의 핵으로 떠오른 비정규직법안과 무관하지 않다. 현행법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2년 이상 고용할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하는데 6월30일 여야 간 개정안 협상이 결렬되면서 대량해고 등 후폭풍이 예고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시장이 극도로 불안해지자 이참에 회사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 쪽으로 옮겨오는 비정규직도 적지 않다. A주유소 김씨의 말이다.
“현재 비정규직법안으로는 마땅한 타협점이 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 이상 해고될 위험이 높잖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게 속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에요.”
“색안경 쓰고 보진 말라”
일본의 경우 1990년대 초 ‘잃어버린 10년’에 따른 경기침체로 속칭 ‘프리터’족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 프리터는 ‘Free’와 ‘Arbeiter’의 합성어로 정규 취업을 포기하고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인력시장의 중장년들. 요즘 건설 일용직들의 아르바이트업계 진출이 활발하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일본처럼 화폐가치가 높지 않고 시급이 적은 업종이 많다 보니, 단기 아르바이트만으로 해외여행을 하거나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본 프리터족과 한국 프리터족을 단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특히 중장년층 프리터족은 더욱 그렇다. 사업 실패나 실직으로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아르바이트에 내몰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오정택(가명·56) 씨도 그런 경우다. 지방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하던 오씨는 퇴직 후 벌였던 사업이 외환위기로 부도나면서 이후 생계를 각종 아르바이트로 꾸려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력이 1년 4개월 정도 된다는 오씨는 매일 밤 10시부터 오전 8시까지 편의점 점원으로 일한다.
“나이가 있는데 정규직 취업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다만 시급이 너무 적어 힘들지요. 야간수당 합쳐서 시급 4500원 정도 받는데, 제가 한창 사업을 벌이던 시기에 제 사무실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지급하던 것보다도 적습니다.”
“자식 잘 크는 게 보람”
너털웃음을 짓는 오씨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열심히 생활하는 내 모습을 보며 자식들이 엇나가지 않고 잘 성장해줘 보람이 있다”면서 뿌듯해했다. 오씨는 세 자녀를 뒀는데 군인, 튼실한 회사의 사무원, 유명 청소년 스포츠 선수(오씨는 아들의 신분이 드러날까 걱정했다)로 성장했다고 한다. 오씨는 40, 50대 아르바이트생을 측은하게만 보는 사회풍토가 못마땅한 듯 이렇게 당부했다.
“나이 먹어 아르바이트하는 분들이 꼭 실패자라거나 집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죠. 물론 경제적 상황 때문에 오신 분이 많지만 그중에는 경제사정도 좋고 환경도 좋은 분이 적지 않습니다. 일을 즐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이 먹고 아르바이트하시는 분들을 너무 색다르게 바라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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