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을 겨냥해 랄프로렌이 선보인 복고적인 룩. 각진 어깨는 서구의 경제 불황기였던 1980년대를 연상케 한다. ‘유행을 타지 않아’ 한 벌 사도 될 것 같은 디자인.
지난 몇 년간 럭셔리 패션시장은 아시아 등 신흥국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왔다. ‘리치스탄(richstan)’이라 불리는 전 세계의 젊고 새로운 억만장자들은 뉴욕 파리 같은 대도시에 수십억원짜리 콘도를 지은 뒤 톱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인테리어를 맡기는가 하면, 수천만원짜리 슈트와 예술작품에 가까운 드레스를 사들임으로써 패션의 관대한 후원자가 됐다. 그러나 이들의 세계가 근거하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오일 등 원자재 시장이 신기루처럼 무너지면서 럭셔리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2009년 봄여름 컬렉션 ‘머스트 해브’ 실종
지난해 하반기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과 대기업들의 위기설이 흘러나올 때만 해도 중동 러시아 등 아시아 벼락부자들을 타깃으로 거침없이 마켓을 키우던 럭셔리 명품업체들은 지금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전 세계 자본 및 소비 시장 냉각에 크게 긴장하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럭셔리 그룹들의 주가는 지난 1년 사이 평균 주가하락률을 앞지르며 반 토막나 버렸다.
창의적 아이디어와 기발한 디자인으로 전 세계 패션계에 활력을 불어넣던 디자이너들의 얼굴에서도 미소는 사라졌을까. ‘어두운’ 변화는 9월 말 이탈리아 밀라노 등 세계 4대 도시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이 패션쇼는 2009년 봄여름 패션 경향을 언론과 VIP 등에게 먼저 선보이고 전 세계 바이어들에게 미리 주문받는 패션 ‘마켓’의 기능도 겸한다.
지난 몇 년간 패션쇼를 찾은 바이어들은 빠르게 변하고 세분화하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디자이너들에게 ‘좀더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보니 기발한 것,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디자이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올 여름까지 패션과 미술의 ‘협업’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백화점 세일 모습. ‘맥럭셔리’와 중저가 패션 브랜드의 매출이 급감한 반면, 최상위 ‘위버럭셔리’의 매출은 여전히 두 자릿수로 상승 중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패션 디자이너들은 어떤 옷을 권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유행 따라 한철 입고 마는 하루살이 옷이 아니라 두고두고 입을 수 있을 듯한 ‘지속 가능한 투자형 패션’이다. 즉, 최첨단의 패셔니스타 같은 화려한 옷보다는 10년쯤 입어도 막 사 입은 듯하고, 막 사 입었어도 지난해 산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에 디자인은 진중해지고 소재는 한층 고급스러워졌다. 한 번 세탁하면 너덜너덜해지는 얇고 밝은 옷보다 튼튼하고 어두운 색상의 옷이 더 선호될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새로운 ‘머스트 해브’가 뚜렷하지 않다는 점도 2009년 봄여름 컬렉션의 특징으로 지적된다. 매년 봄여름이면 당연히 등장하는 러플, 스트라이프와 도트 무늬가 겨우 ‘트렌드’로 눈에 띌 정도다. 늘 혁신적인 컬렉션을 선보여 패션기자들의 격찬을 받아온 프라다도 올해에는 유행과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베이식한 디자인을 살짝 변형한 정도의 옷들을 선보였다. 귀족적이고 사치스럽게 보이는 컬렉션들로 인기를 끈 버버리프로섬은 카키색과 황토색에 클래식한 디자인을 매치했다. 줄곧 버버리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던 버버리프로섬으로선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몇몇 럭셔리 업체 한국에서 철수
2009년 봄여름을 겨냥한 디자이너 컬렉션. 다른 해에 비하면 봄여름 옷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라앉은 색과 고전적인 디자인이다(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버버리프로섬, 프라다,프라다,보테가베네타).
한국에서 도나카란, 랄프로렌, 끌로에 등 다수의 럭셔리 브랜드를 홍보하는 인트렌드 측은 “전에는 트렌디한 디자인을 선호하던 럭셔리 소비자들이 이번 겨울엔 유행을 타지 않는 블랙 컬러와 베이식한 아이템 중심으로 구매를 한다. 몇몇 브랜드는 패션쇼를 생략하는 등 마케팅비를 줄이고, 예정에 없던 세일을 통해 현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위버(최상위) 럭셔리 브랜드의 경우 소비 자체가 줄어든 것 같진 않다”고 말한다.
최근 막스마라 등 몇몇 럭셔리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럭셔리 업계도 빙하기에 접어든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럭셔리 브랜드 관계자는 “사업을 접는 이유는 몇 년간 누적된 결과를 보고 한국 소비자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현재의 경제상황 때문이 아니다. 두 자릿수를 이어가는 백화점의 럭셔리 브랜드 매출 증가율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면서 “대중적이라는 ‘맥럭셔리’ 브랜드들이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라고 설명한다. 10월 말 신세계 본점에서 매장을 철수하는 크리스찬디오르의 경우도 매장 위치가 문제가 돼 새로운 초대형 매장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L백화점의 한 MD(상품기획자)는 “일반 남녀 기성복 브랜드의 매출이 지난해부터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데 비해, 명품 브랜드의 매출은 계속 증가해 손실을 상쇄하는 정도다. 앞으로 환율을 반영해 제품 값이 오르더라도 소비가 줄 것 같진 않다”고 전망했다. PPR 회장의 말을 되돌려보면 럭셔리 패션에서 달라진 건 단지 유행과 취향일 뿐이란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인터넷 패션사이트 ‘멘스타일닷컴’(men.style.com)은 클래식한 슈트의 유행을 점치는 ‘신보수주의 패션의 대두’를 알리면서 이렇게 조언한다.
“직장에서 지나치게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으면 감원 시 우선순위에 오를 수 있음에 주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