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6일 서울세민정보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아하! 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피임법을 포함한 성교육을 받았다. 자궁을 형상화한 대형 모형에서 체험하고 있는 학생들.
서울 영등포구에 자리한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ahacenter.kr) 이명화 센터장은 “교육 수혜자인 아이들의 눈높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청소년이 인터넷,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음란물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고 그에 맞는 성교육이 필요한데도 성교육은 늘 입시문제에 밀려 등한시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총 자료에 따르면 연간 10시간 성교육 초교는 30% 이하
“성교육의 중요성은 여중생이 화장실에 갓난아기를 버려 충격을 줬던 10여 년 전부터 숱하게 제기돼왔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성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5월2일 서울시 일부 지역 중·고교 성교육 담당교사를 대상으로 한 ‘학교 성교육 활성화 방안을 위한 교사 간담회’는 일선 학교에서 홀대받는 성교육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20여 명의 교사들은 학교와 교육당국의 성교육에 대한 무관심과 기본인식 부재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구 집단성폭력 사건이 나니까 교감선생님이 대책을 세우라며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방송교육을 하자는데 난감해요.”(서울 M중학교 B교사)
“성교육 시간을 내달라니까 교감선생님이 ‘성교육 시간에 딸딸이 치는 것 알려주느냐’고 되묻더군요.” (서울 S고교 C교사)
현재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육부)는 학교장 재량으로 초·중·고교 모든 학년에 걸쳐 연간 10시간 이상 성교육 시간을 갖도록 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러한 권고가 일선 학교에서 “원활히 시행되고 있다”고 평가하지만 학교 현장의 반응은 다르다. 보고를 위한 ‘허울뿐인 성교육’으로 탈바꿈한다는 게 현장 교사들의 전언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에 따르면, 교과부 지침에 의거해 성교육 시간을 편성 운영하는 학교는 초등학교 28.8%, 중학교 48%, 고등학교 48.3%에 불과하다.
서울 문정고 이혜란 교사는 “10시간 중 성교육만을 위한 온전한 시간을 갖는 학교는 많지 않다. 가정, 생물, 사회교과 중 남녀 성과 관련된 내용이 조금이라도 언급되면 무조건 성교육으로 묶는다”고 비판한다.
“성교육은 성지식뿐 아니라 의식을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정의한 그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되는 것만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성폭력 예방 같은 실질적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데 현재로선 시간조차 주어지지가 않는다”고 말했다.
보건교사를 제외하고 담임교사가 성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초등학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서울 창신초교 서은하 교사는 “학년마다 10시간 이상 성교육을 하라지만, 그 10시간을 누가 어떻게 운영하라는 지침이 없으니 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해 옛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전국 중·고교 재학생 1만3721명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유해환경실태조사보고에 따르면, 음란사이트의 최초 이용 시기는 중학교 1학년이 36.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초등학교 6학년 이하가 31.8%로 뒤를 이었다.
문제는 음란물에 대한 노출 여부와 관계없이 아이들의 실제 성지식 혹은 성의식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데 있다. 더불어 음란물 등에 노출될 위험성은 지역과 소득수준에 따라 편차가 컸다. 서 교사는 “부모가 일터에 간 뒤 하루 종일 방치되는 아이들이 함께 모여 음란물을 보는 경우가 많다”면서 “성지식이 양극화된 아이들을 한데 묶어 가르치는 일도 무리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키스만 해도 임신이 된다고 여기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포르노를 보고 따라하고 싶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음란물을 많이 본 아이라도 실제 성에 대해선 무지한 탓에 음란물이 보여주는 왜곡된 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이명화 센터장)
최근의 성교육은 체험을 중시한다. 피임 교육법을 배우는 학생들.
성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강의 위주로 돼 있어 아이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더불어 학교나 가정뿐 아니라, 전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숙명여대 오재림 교수(교육학)는 “특정 기관이 성교육을 전담하는 게 아니라 가정, 학교, 지역 커뮤니티가 연결돼 사회 전체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 사회적 차원의 지원은 미비하다. 청소년 대상 성교육 기관으로는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가 유일했다가, 지난해 말 16개 시도에 청소년 성교육 기관 20개가 만들어졌지만 예산이나 인력 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아동과 청소년의 성에 대한 전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다. 현재 일부 중·고교에서는 성교육 시간에 피임법으로 콘돔 사용법 등을 실습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한쪽에선 여전히 청소년 성교육으로 ‘순결사탕’ ‘순결서약서’류의 순결 교육만 시행하고 있다.
㈔보건교육포럼 우옥영 이사장은 “아이들의 성(性)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성병 예방과 10대 임신 방지에 (성교육의) 초점을 뒀다. 반면 유럽은 성관계에 대해 긍정적인데, 대신 그에 대한 책임과 성관계가 야기할 이후의 일들에 대해 충분히 학습시킨다”면서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그동안 성에 대한 특정한 입장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을 무성적 존재로만 바라봤다”고 분석한다. 결국 성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말들은 무성하지만 제대로 된 성교육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청소년의 성적 욕구와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많은 전문가들은 책임 있는 성교육을 위해서 정규 교과과정에 성교육 관련 시간이 필수적으로 포함돼 운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11월 보건교과 개설을 골자로 한 학교보건법이 통과된 바 있지만, 선택 교과에 그치는 등 그 비율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의 경우, 성교육을 포괄하는 보건교과는 예체능 과목 이상의 비중으로 필수 과목화한 경우가 많다.
“현재 성교육은 아이들의 눈높이를 따라잡기엔 허술해요. 지금처럼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계속 그럴 수밖에 없죠. 결국 정규 교과과정의 테두리 안에서 제대로 성교육이 시행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떤 토대라도 있어야 더 고민해가면서 발전된 이야기도 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우옥영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