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타 오리자의 ‘도쿄노트’를 각색한 ‘서울노트’는 베르메르의 극사실주의 그림처럼 일상의 모습을 세심하게 묘사한 독특한 연극이다.
이 연극에서는 어떤 드라마틱한 갈등도 일어나지 않으나, 대화의 과정을 통해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상처들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군인의 여자친구는 남자친구를 전선으로 돌려보낼 준비를 하고, 형제자매의 막내 내외는 이혼 소식을 발표한다. 아버지 없는 유년시절을 보낸 젊은 여자는 갑자기 나타났다가 바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그림들을 떠안는다. 선을 본 남자는 그림을 감상하고 오겠다는 여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과거에 가르쳤던 학생과 마주친다. 한때 깊은 관계였던 두 사람은 다소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도 큰 소리를 내거나 울지 않는다. 게다가 연극 전체에 비극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전쟁’에 대해서도 마치 물속에서 물 밖 상황을 추측하듯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전쟁을 환기시키는 것은 군복 입은 남자이며, 유럽의 난민과 피난 온 그림들에 대한 덤덤한 대화다.
‘극사실주의 연극’이라 불리는 ‘서울노트’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박진감 있게 달리는 여타 연극과는 사뭇 다르다. 느슨한 인과관계를 지닌 일상들이 한 장소에서 차분하게 전개된다. ‘조용한 연극’이라고도 불리는 ‘극사실주의 연극’은 17세기 네덜란드의 그림들로 소급된다. 당시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종교화와 역사화였다. 그러나 인본주의가 대두되던 17세기에 네덜란드 화가들은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나아가 인물·정물 등 한 종류의 대상을 줄기차게 그리는 유례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림들을 ‘장르화’라고 부른다. 이들은 상이 맺히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카메라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활용해 사물을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색감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17세기의 네덜란드 화풍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성을 표현한 화가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베르메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에 대해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듯, ‘서울노트’는 베르메르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나아가 아예 큐레이터의 입을 통해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아카데믹한 해설을 들려준다. 이때 큐레이터 말에 처음으로 로비의 인물들이 모두 집중하는 모습은 그의 말이 그만큼 중요한 내용임을 느끼게 한다.
이 연극은 단지 일상을 일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옵스큐라에 맺힌 상을 정밀하게 보여주는 그림처럼 일상의 단면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사진을 가감 없이 모사한 1960년대의 극사실주의 화법에서처럼 어색한 침묵의 순간, 의사소통이 단절된 상태, 관객에게 엉덩이를 보이는 모습 등을 그대로 살려놓는다. 또한 인물들은 동시에 무대에 올라 중구난방 떠들고, 잔가지와 같은 주제들을 툭툭 던진다.
인물 간 치열한 갈등구조보다 작가의 존재감 더 부각
주관을 배제한 어조로 극이 전개되지만,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인물 간의 갈등이 치열한 여타 연극들에 비해 오히려 작가의 존재감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한다. 극중 인물이 “그림을 보고 있는 건지, 그림을 그린 작가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작가의 세계를 보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 것처럼 ‘서울노트’를 통해 관객들은 일상을 보는 듯하면서도 작가의 존재를 느끼고 그 작가의 생각을 읽게 된다.
‘서울노트’는 일본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의 ‘도쿄노트’를 각색한 작품이다. 1962년생인 히라타 오리자는 전쟁 2세대로서 직접적으로 폭격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패전국인 일본이 지닌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접화법을 통해 드러낸다. 한 예로 휴가 나온 군인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이야기한다. “공습이라는 것 아주 무섭다더라. 당하는 쪽은.” 작품 속에서 직접 묘사되지는 않지만, 전쟁은 모든 상처의 근원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한 연극’이 ‘밋밋한 연극’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극중 연거푸 언급되는, 일상을 묘사한 17세기 화가들은 빛의 사용에 민감했다. 또한 그림을 그릴 때는 구도에 대해 치밀한 계산이 선행됐다. 장소의 전환이 없고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장면이 부재하더라도 연출의 묘미를 살려 조용한 가운데 좀더 ‘섬세한’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배우들의 딕션은 훌륭했으나, 대사나 제스처를 통한 강조나 ‘포즈’의 사용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5월12일, 대학로 정보소극장, 문의 02-743-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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