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가로수길에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가로수길은 여름철에 더욱 인기가 높다.
‘가로수길’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J타워에서 현대고등학교를 잇는 길의 이름이다. 이곳은 요새 강남의 대표 명소로 떠오르고 있지만, 대로(大路)가 쭉쭉 뻗은 ‘강의 남쪽’이미지를 계승하지 않고 오히려 강 북쪽의 아날로그 감성이 진하게 묻어난다.
몇 년 전부터 이 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독특한 가게들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여기저기 잡지에 이 길이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여러 영화에 배경으로도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 가로수길에 다녀왔어요”라고 시작하는 인터넷 블로그 글들이 심심찮게 보이며, “가로수길 보러 왔어요”라며 지방에 사는 학생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잡지 주인공으로 등장, 영화 배경으로도 출연(?)
가로수길은 높게 솟은 빌딩보다 주택을 개조한 낡은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주인이 소품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레스토랑 ‘그랜드 마더’(사진 아래).
길이 ‘스타’가 된 예는 꽤 있다. 압구정 로데오길은 한때 오렌지족으로 이름 높았고, 홍대 앞 놀이터 길은 열정적인 클럽문화를 이끌어온 주인공이었다.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소비로 대표되는 청담동은 과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아지트이고 인사동은 외국인들에게 추천할 만한 전통적 공간, 가장 한국적인 길로 변함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 대학로는 이름 그대로 20대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표현의 무한지대다. 좁은 골목길 한옥과 트렌디한 숍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삼청동은 가로수길 이전에 가장 몸값이 높은 길이었다.
그러나 2008년 현재 우리 사회가, 서울에 사는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길은 가로수길이라 하겠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도 아니고, ‘잘나가는’ 레스토랑과 패션숍이 모여 있는 트렌디한 길이어서도 아니다. 가로수길에는 그보다 더 복잡한 매트릭스(matrix)가 존재한다.
과연 그것이 뭘까? 가로수길을 수차례 밟으며 생각을 곱씹은 끝에 나는 그것을 ‘로망’이라고 결론지었다.
로망은 동경이다. 로망은 꿈이라는 단어보다 로맨틱하고 여운이 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로망은 ‘이루고 싶은 마음’이다. 소풍 가기 전날이 소풍 가는 날보다 더 행복하듯, 가로수길에 깔려 있는 정신은 무엇인가를 동경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가로수길에서 숍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가로수길을 즐겨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로망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의 속살을 좀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가로수길을 걷다 보니 그곳은 길이 아니라 열쇠였고,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가로수길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 변화의 조짐들이 집중적으로 목격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여러분의 손에 모두 8개의 열쇠를 드리겠다. 그 열쇠들로 여러분의 모습, 대한민국에서 2008년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눈치채길 바란다.
[1] 士가 아닌 家를 향한다
파티 스타일리스트, 앤티크 수집가, 디자이너, 바리스타, 세계적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 출신 요리사, 일본 라멘 조리사, 플로리스트, 인터넷 쇼핑몰 사장, 소믈리에, 영화감독, 영화배우, 장난감 수집가, 광고 프로듀서, 카피라이터….
가로수길 숍 주인들, 그리고 가로수길 근처에 터전을 두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렇다. 가로수길만큼 이 시대 전문가들이 한데 모인 곳이 또 있을까. 그들은 최고(最高)가 되기보다는 ‘단 한 사람(Only One)’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가령 침체에 빠진 대한민국 만화계를 구하기 위해(!) 대기업에 사표를 던진 사람처럼.
[2] 사람은 편하고, 자동차는 불편하다
이웃한 청담동은 발레파킹의 천국이다. 그러나 가로수길엔 주차장이 턱없이 부족하다. 주차장을 늘릴 움직임도 없다. 찾아오면 불편함투성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가로수길을 좋아한다. 이유가 뭘까? 자동차에 빼앗겼던 주권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이다. 푹신한 폴리우레탄이 깔린 길을 내 발로 걷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자동차의 속도’에서 벗어나 ‘내 발의 속도’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사람들은 가로수길에서 느림과 여유의 우월성을 경험하고 있다.
[3] 헝그리 정신의 종말
“떼돈 벌 생각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엔 장사 안 하고 파티할까봐요”…. 장사에 관심 없다는 듯 말하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로수길에서 숍을 운영하는 주인들이다. 그들의 상당수는 실제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그럼 뭘 먹고살까? 먹고살 만한 재산이 있어서일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 즉 돈을 덜 벌더라도 인생을 더 즐기고 살겠다는 ‘다운시프트’(Downshift·저속)다. 차범근이 ‘헝그리 정신’의 소유자라면 그의 아들 차두리는 ‘다운시프트’의 상징이다. 차범근에게 축구는 ‘전투’였지만 차두리에게 축구는 그저 ‘행복’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그동안 정들었던 헝그리 정신과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4] Be Yourself!
가로수길의 건물 대부분은 작고 낡았다. 높게 솟은 빌딩이기보다는 주택을 개조한 건물이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건물들은 들쭉날쭉하다. 건물 안에는 콘크리트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킨 알몸 천장, 숨어 있어야 할 크고 작은 배선과 배관 파이프가 당당하게 자기 존재를 뽐내고 있다. 오직 자신감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겠다’는 이런 자신감은 가로수길의 건물을 넘어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 것이 멋지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아, 비 등 한류스타의 성공, 한식(韓食)에 자신감을 되찾아준 대한항공 기내식 비빔밥의 인기, 불룩한 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55사이즈의 임부복 등에서!
[5] 경제력으로 무장한 새로운 권력, 여성
과거엔 ‘노처녀’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들의 이름은 ‘골드미스’다. 결혼보다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고, 탄탄한 경제력으로 독립된 삶을 꾸려나간다. 세련된 그들에 의해 가로수길은 이미 점령됐다. 가로수길 숍에는 골드미스들을 위한 ‘꽃미남 마케팅 전략’이 있을 정도니까. 이 여성들의 권력은 장담컨대 하루아침에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6] 아는 자들의 세계, 프로슈머
아는 만큼 보이는 곳이 가로수길이다. 상주하는 자와 찾아오는 자의 경계가 있을 뿐,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 주인이 되기 전 소비자였던 그들은 자신의 마니아적 성향을 발전시켜 가로수길에 유일무이한 상점을 열었다. 프로슈머(Prosumer·생산적 소비자)로 거듭난 그들이 이제 또 다른 프로슈머를 꿈꾸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다. 여느 상점에서는 단돈 1만원도 비싸게 여겨지는 꽃다발이 이곳에서는 몇 배 더 비싼 값에도 쉽게 팔려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로수길은 ‘가치’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의 세계다.
[7] 혼자 밥 먹기
가로수길엔 유독 혼자인 사람들이 많다.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나 홀로 행동하는 사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없다. 그들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팟과 닌텐도DS는 그들 양손의 무기가 되어주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혼자 밥 먹고 영화 보고 여행하는 사람이 늘어나려 한다.
[8] Made ‘By’의 시대가 왔다
39.4%. 해외유학 경험이 있는 가로수길 숍 주인들의 비율이다. 가로수길이 이국적 분위기를 풍기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로수길에 있는 프랑스풍 가게를 보고 ‘메이드 인 프랑스(Made in France)’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가져온 문화는 프랑스 것이지만, 그 주체는 가게 주인이다. 가로수길에서 외국문화는 ‘Made in’이 아니라 ‘Made by’의 개념으로 융합되고 재생산된다. ‘어디서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만들었는가’의 시대가 되고 있다.
글쓴이 이예훈 씨는 광고회사 TBWA KOREA의 카피라이터다. SK텔레콤 ‘현대생활백서’, 현대카드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 LG전자 ‘엑스캔버스하다’ 캠페인 등에서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TBWA KOREA 사람들과 함께 신사동 가로수길에 관한 분석서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알마)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