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를 다니다 보면 자연의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멍한 채 바라보는 곳이 많다. 낙동강의 본류와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있는 의성포(義城浦)가 바로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느닷없이 꺾여 굽이굽이 돌아 제자리로 오는 물도리동으로 이름난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 정여립이 의문사한 전북 진안의 죽도, 무주의 앞섬 등이다. 그중에서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의성포 물도리동은 천하 비경을 자랑한다. 본래 용궁군 구읍면으로 조선시대 유곡 도찰방에 딸린 대은역이 있어 대은역, 또는 역촌·역골이라 불렸으며 대은리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장안사에 이른다.
정감록의 십승지지 … 열한 가구 오순도순 거주
고려 때의 문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고율시(古律詩)에 이곳 용궁현에 와서 원님이 베푸는 잔치가 끝난 뒤 지은 ‘십구일에 장안사에 묵으면서 짓다’라는 시를 남겼다.
산에 이르니 진금(塵襟)을 씻을 수가 없구나. 하물며 고명한 중 진도림(진나라 때의 고승으로, 자는 도림)을 만났음에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도니 외로운 나그네 생각이오. 한 잔 술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집 북쪽에는 시내에 구름이 흩어지고달이 지는 성 서쪽에는 대나무에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잠만 즐기며 옛 동산의 소나무와 국화를 꿈속에서 찾네.
시간이 있으면 며칠 머물고 가라 하시던 주지스님은 봉암사로 공부하러 떠나고, 새로 온 주지스님마저 출타 중인 장안사 뒷길로 300m쯤 오르자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자연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지를 깨닫게 해준다.
의성포는 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흐르면서 섬처럼 되어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였다. 고종 때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 ‘의성포’라 했다고도 하고,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곳으로 와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의 섬처럼 외로이 떠 있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손꼽혔고, 비록 오지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신당에서 회룡으로 건너는 시무나드리(나루)에서 의성포로 들어가려면 새하얀 모래밭에 길게 드리운 다리를 만나는데, 공사장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임시 다리다. 발 아래로 흐르는 내성천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낭창낭창 휘어지는 철판을 걸어가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재미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바퀴가 모래밭에 빠지지 않는 4륜 구동 경운기를 이용, 내성천을 건너기도 한다.
철판다리를 건너면 열한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의성포다.
한때 용궁군은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 다음으로 번화했던 곳으로 알려져, 이름난 사대부들이 즐겨 찾아왔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궁군이 “동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15리, 남으로 동군(同郡) 경계까지 35리, 서로 상주(尙州) 경계까지 12리, 북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9리, 경도와의 거리는 444리”로 “풍속은 화목함을 숭상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장돈의(蔣敦義)는 “일대수는 회계수(會稽水·중국 저장성 사오싱에 있는 강 이름)와 같고, 사위산은 영가산(永嘉山)과 비슷하네”라고 했다.
용궁군은 신라 때 축산현[竺山縣, 원산(園山)이라고도 했다]이었다. 고려 성종 때 용주자사(龍州刺史)로 승격시켰으며, 목종이 자사를 파하고 군으로 강등했다. 현종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상주에 붙였고,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 태종 때 전례를 고쳐 현감으로 했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호수는 396호에 인구는 4545명이었다고 한다.
비룡산 장안사와 석성 과거의 영화 몸으로 증언
임진왜란 때는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이 예천 의병을 이끌고 6월15일 용궁으로 진격해온 적장 요시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를 무찔러 이 지역이 왜구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914년, 용궁군은 예천군에 합병된다.
용궁군의 소재지는 원래 향석리였는데 철종 때인 1856년에 내성천과 낙동강이 범람, 현청이 떠내려가자 다음해 현청을 금산 아래 읍부리로 옮겨 향석리는 구읍이 되고 말았다. 구읍 향석초등학교 자리가 동헌이었는데, 지금은 동헌은커녕 학교마저 폐교되고 동헌 터 북쪽의 객사 터도, 객사 터 동쪽에 있었다는 수월루(水月樓)도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 서거정은 동헌 수월루에 올라 “몸도 한가롭지 못한데, 하물며 마음일쏘냐. 양볼에 수염은 문부 사이에서 다 희어지네. 청산에 돌아가지 못함을 부질없이 말하랴. 남쪽에 오니 청산 아닌 곳이 없다” 했고, 김수온은 “맑은 때 일 없고 몸도 한가로우니, 태수는 백중(伯仲) 사이에서 서로 즐기네. 백 잔 술 실컷 마시고, 누 위에 누워 주렴 걷으니, 남북이 모두 푸른 산일세”라고 수월루를 노래했다.
향석리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보이는 산이 비룡산이다. 그 산에는 장안사와 비룡산성이 있다. 해발 189m인 비룡산은 용이 나는 형국으로, 언제 쌓았는지 모르는 석성이 있다. 둘레가 871척에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3개가 있었고,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예천군 서암산, 남으로 다인현 소이산, 북으로 상주시 산양현의 소산에 응했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궁현의 진산은 축산으로 객관 북쪽에 있었고, 용비산(龍飛山)은 현의 남쪽 2리에 있었다. 하풍진(河豊津)은 아동부의 견항진(犬項津), 예천군의 사천(沙川) 및 화천(火川)의 물이 용비산 아래에서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는 그의 시에서 “푸른 호수엔 가벼운 노 목란주(木蘭舟), 눈에 가득한 연기 파도는 모두 시름뿐일세. 올해는 점점 작년 모습이 아니니, 타향에서 고향에 놀던 것 생각하누나. 용추(龍湫)에 해 저무니 구름 모이고, 만령(蠻嶺)에도 갈 수 없으며, 옥지(신선이 먹는 약)가 창주(滄州)에서 늙는데 어찌할꼬”라고 했다.
용궁군 천덕산에 있던 백화사를 찾아왔던 이제현은 관공루기를 지었는데, “승경(勝景) 노니는 곳에는 붙잡고 오르는 것이 많은데, 이 절은 낮은 산에 머물러 가장 좋구나. 한 물은 비단 펼친 듯 멀리 뻗쳤고, 두 고개는 옷깃처럼 그윽함을 보호한다. 부처 밖과 마음 밖을 구하지 말라. 인간은 곧 꿈속에 있는 것이네. 듣기만 해도 누 이름 얻은 이치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름지기 주인 얼굴 가서 대할 것인가” 했다.
구읍에 남아 있는 용궁향교는 1398년에 창건되었는데 1400년(정조 2년)에 소실된 것을 거듭 중건한 것이다. 용궁향교 터를 두고 풍수지리가들은 ‘옥녀탄금형’이라고 부른다. 산성 북쪽에 있는 바위는 북처럼 생겨 둥둥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하여 둥둥바위라고 부른다. 용궁향교는 멀리 보면 그럴듯하나, 대성전이나 명륜당 앞에 풀섶만 무성하고 향교 옆 서원은 곧 쓰러질 듯 낡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 가볼 만한 곳가까운 곳에 상주의 경천대와 사벌 왕릉, 용문산 자락에 있는 용문사, 그리고 권문해가 지은 아름다운 정자 초간정이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느닷없이 꺾여 굽이굽이 돌아 제자리로 오는 물도리동으로 이름난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 정여립이 의문사한 전북 진안의 죽도, 무주의 앞섬 등이다. 그중에서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의성포 물도리동은 천하 비경을 자랑한다. 본래 용궁군 구읍면으로 조선시대 유곡 도찰방에 딸린 대은역이 있어 대은역, 또는 역촌·역골이라 불렸으며 대은리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장안사에 이른다.
정감록의 십승지지 … 열한 가구 오순도순 거주
고려 때의 문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고율시(古律詩)에 이곳 용궁현에 와서 원님이 베푸는 잔치가 끝난 뒤 지은 ‘십구일에 장안사에 묵으면서 짓다’라는 시를 남겼다.
산에 이르니 진금(塵襟)을 씻을 수가 없구나. 하물며 고명한 중 진도림(진나라 때의 고승으로, 자는 도림)을 만났음에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도니 외로운 나그네 생각이오. 한 잔 술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집 북쪽에는 시내에 구름이 흩어지고달이 지는 성 서쪽에는 대나무에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잠만 즐기며 옛 동산의 소나무와 국화를 꿈속에서 찾네.
시간이 있으면 며칠 머물고 가라 하시던 주지스님은 봉암사로 공부하러 떠나고, 새로 온 주지스님마저 출타 중인 장안사 뒷길로 300m쯤 오르자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자연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지를 깨닫게 해준다.
의성포는 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흐르면서 섬처럼 되어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였다. 고종 때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 ‘의성포’라 했다고도 하고,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곳으로 와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의 섬처럼 외로이 떠 있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정감록’의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손꼽혔고, 비록 오지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신당에서 회룡으로 건너는 시무나드리(나루)에서 의성포로 들어가려면 새하얀 모래밭에 길게 드리운 다리를 만나는데, 공사장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임시 다리다. 발 아래로 흐르는 내성천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낭창낭창 휘어지는 철판을 걸어가는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이 재미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바퀴가 모래밭에 빠지지 않는 4륜 구동 경운기를 이용, 내성천을 건너기도 한다.
장안사, 의성포 들어가는 곳에 놓인 철판다리, 폐교된 향석초교(왼쪽부터).
한때 용궁군은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 다음으로 번화했던 곳으로 알려져, 이름난 사대부들이 즐겨 찾아왔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궁군이 “동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15리, 남으로 동군(同郡) 경계까지 35리, 서로 상주(尙州) 경계까지 12리, 북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9리, 경도와의 거리는 444리”로 “풍속은 화목함을 숭상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장돈의(蔣敦義)는 “일대수는 회계수(會稽水·중국 저장성 사오싱에 있는 강 이름)와 같고, 사위산은 영가산(永嘉山)과 비슷하네”라고 했다.
용궁군은 신라 때 축산현[竺山縣, 원산(園山)이라고도 했다]이었다. 고려 성종 때 용주자사(龍州刺史)로 승격시켰으며, 목종이 자사를 파하고 군으로 강등했다. 현종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상주에 붙였고,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 태종 때 전례를 고쳐 현감으로 했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호수는 396호에 인구는 4545명이었다고 한다.
비룡산 장안사와 석성 과거의 영화 몸으로 증언
임진왜란 때는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이 예천 의병을 이끌고 6월15일 용궁으로 진격해온 적장 요시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를 무찔러 이 지역이 왜구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914년, 용궁군은 예천군에 합병된다.
용궁군의 소재지는 원래 향석리였는데 철종 때인 1856년에 내성천과 낙동강이 범람, 현청이 떠내려가자 다음해 현청을 금산 아래 읍부리로 옮겨 향석리는 구읍이 되고 말았다. 구읍 향석초등학교 자리가 동헌이었는데, 지금은 동헌은커녕 학교마저 폐교되고 동헌 터 북쪽의 객사 터도, 객사 터 동쪽에 있었다는 수월루(水月樓)도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 서거정은 동헌 수월루에 올라 “몸도 한가롭지 못한데, 하물며 마음일쏘냐. 양볼에 수염은 문부 사이에서 다 희어지네. 청산에 돌아가지 못함을 부질없이 말하랴. 남쪽에 오니 청산 아닌 곳이 없다” 했고, 김수온은 “맑은 때 일 없고 몸도 한가로우니, 태수는 백중(伯仲) 사이에서 서로 즐기네. 백 잔 술 실컷 마시고, 누 위에 누워 주렴 걷으니, 남북이 모두 푸른 산일세”라고 수월루를 노래했다.
향석리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보이는 산이 비룡산이다. 그 산에는 장안사와 비룡산성이 있다. 해발 189m인 비룡산은 용이 나는 형국으로, 언제 쌓았는지 모르는 석성이 있다. 둘레가 871척에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3개가 있었고,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예천군 서암산, 남으로 다인현 소이산, 북으로 상주시 산양현의 소산에 응했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궁현의 진산은 축산으로 객관 북쪽에 있었고, 용비산(龍飛山)은 현의 남쪽 2리에 있었다. 하풍진(河豊津)은 아동부의 견항진(犬項津), 예천군의 사천(沙川) 및 화천(火川)의 물이 용비산 아래에서 합쳐져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는 그의 시에서 “푸른 호수엔 가벼운 노 목란주(木蘭舟), 눈에 가득한 연기 파도는 모두 시름뿐일세. 올해는 점점 작년 모습이 아니니, 타향에서 고향에 놀던 것 생각하누나. 용추(龍湫)에 해 저무니 구름 모이고, 만령(蠻嶺)에도 갈 수 없으며, 옥지(신선이 먹는 약)가 창주(滄州)에서 늙는데 어찌할꼬”라고 했다.
용궁군 천덕산에 있던 백화사를 찾아왔던 이제현은 관공루기를 지었는데, “승경(勝景) 노니는 곳에는 붙잡고 오르는 것이 많은데, 이 절은 낮은 산에 머물러 가장 좋구나. 한 물은 비단 펼친 듯 멀리 뻗쳤고, 두 고개는 옷깃처럼 그윽함을 보호한다. 부처 밖과 마음 밖을 구하지 말라. 인간은 곧 꿈속에 있는 것이네. 듣기만 해도 누 이름 얻은 이치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름지기 주인 얼굴 가서 대할 것인가” 했다.
구읍에 남아 있는 용궁향교는 1398년에 창건되었는데 1400년(정조 2년)에 소실된 것을 거듭 중건한 것이다. 용궁향교 터를 두고 풍수지리가들은 ‘옥녀탄금형’이라고 부른다. 산성 북쪽에 있는 바위는 북처럼 생겨 둥둥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하여 둥둥바위라고 부른다. 용궁향교는 멀리 보면 그럴듯하나, 대성전이나 명륜당 앞에 풀섶만 무성하고 향교 옆 서원은 곧 쓰러질 듯 낡아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 가볼 만한 곳가까운 곳에 상주의 경천대와 사벌 왕릉, 용문산 자락에 있는 용문사, 그리고 권문해가 지은 아름다운 정자 초간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