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교정의 나무들 중 한 그루를 골라 그 나무와 3개월 동안 대화를 나눈 소감을 써내는 과제를 내주었다. 그랬더니 세상에 그런 과제가 어디 있느냐, 어떻게 나무하고 얘기를 하느냐고 모두들 볼이 부었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하고는 어떻게 소통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말 못하는 동물일지라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 그들이 표현하는 희로애락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무도 그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학기 말에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을 보곤 깜짝 놀랐다. 나무 앞에서 중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괴롭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등·하굣길에 나무하고 남몰래 나누었던 대화, 별다른 감흥 없이 다니던 학교가 사랑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바뀌었다는 내용까지 갖가지 사연이 있었다. 또 인형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릴 적 기억을 새삼 떠올리며, 왜 진작부터 주변의 생명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지 못했는지 자책하는 소리도 담겨 있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녹색생명체인 나무와의 소통을 통해 자연·생명 친화 본능을 깨치려는 학생들의 노력에 감사했다.
자연과의 교감 마음의 풍요 얻는 지름길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인공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TV와 컴퓨터, 휴대전화처럼 과학과 기술의 산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요구하는 소비문화는 끊임없이 물질의 욕망을 부추기고,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더 빠른 컴퓨터, 더 큰 TV, 더 현란한 휴대전화를 얻으려 한다. 이처럼 우리들이 얻는 즐거움은 대부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 탓에 금전적인 가치를 치르지 않고 얻는 즐거움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데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 물질의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로 얻는 즐거움이기에, 엄격하게 말해서 금전적 가치로는 셈할 수도 없다.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교감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자연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즐거움을 얻는, 이렇게 순수하고 이렇게 평등하며 이렇게 인간적인 일이 오늘날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과학과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천부(天賦)의 능력을 상실했다. 아쉽게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데만 익숙해진 우리들은, 자연이 주는 마음의 풍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는 옳게 헤아리지도 못한다.
직업의식은 속일 수 없는지, 나 역시 학생들과 진배없었다. 산림학 교수답게 나무를 보면 재목 값부터 따졌다. 그러니 나무의 기품과 격을 보는 안목이 생길 리 없었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나 크고 곧은 것이냐지, 얼마나 아름답고 활기찬 것이냐는 아니었다.
나무를 단순하게 금전으로만 셈하던 이런 태도는 한 소나무 애호가를 만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권유로 전국의 명목(名木) 소나무를 순례하면서, 소나무의 씩씩한 기상과 솟구치는 기개가 소나무의 생기(生氣)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 강인한 생명력과 청청(靑靑)한 기상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소나무광(狂)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던가. 소나무광들은 소나무와 소통한다. 시인과 화가는 소나무의 격과 기품을 아름다운 시어로 노래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형미로 형상화한다. 영성스럽고 잘생긴 소나무를 보면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병들고 약해 보이는 명목 소나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소나무한테 ‘막걸리’를 대접하도록 마을 이장에게 남몰래 돈봉투를 건넨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지름길은 소나무(자연)와 소통하면서 얻는 즐거움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이유는 자연과의 교감으로 인해 우리 가슴속에 싹튼 감성이나 미의식은 물질의 풍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풍요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솔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로 세속에 찌든 영혼을 정화하고, 코끝을 스치는 송진 냄새로 잃어버린 영성을 되살리고자 오늘도 나는 소나무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학기 말에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을 보곤 깜짝 놀랐다. 나무 앞에서 중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괴롭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등·하굣길에 나무하고 남몰래 나누었던 대화, 별다른 감흥 없이 다니던 학교가 사랑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바뀌었다는 내용까지 갖가지 사연이 있었다. 또 인형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어릴 적 기억을 새삼 떠올리며, 왜 진작부터 주변의 생명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지 못했는지 자책하는 소리도 담겨 있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녹색생명체인 나무와의 소통을 통해 자연·생명 친화 본능을 깨치려는 학생들의 노력에 감사했다.
자연과의 교감 마음의 풍요 얻는 지름길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인공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TV와 컴퓨터, 휴대전화처럼 과학과 기술의 산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를 요구하는 소비문화는 끊임없이 물질의 욕망을 부추기고,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더 빠른 컴퓨터, 더 큰 TV, 더 현란한 휴대전화를 얻으려 한다. 이처럼 우리들이 얻는 즐거움은 대부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 탓에 금전적인 가치를 치르지 않고 얻는 즐거움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데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 물질의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로 얻는 즐거움이기에, 엄격하게 말해서 금전적 가치로는 셈할 수도 없다.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교감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자연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즐거움을 얻는, 이렇게 순수하고 이렇게 평등하며 이렇게 인간적인 일이 오늘날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과학과 기술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천부(天賦)의 능력을 상실했다. 아쉽게도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데만 익숙해진 우리들은, 자연이 주는 마음의 풍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는 옳게 헤아리지도 못한다.
직업의식은 속일 수 없는지, 나 역시 학생들과 진배없었다. 산림학 교수답게 나무를 보면 재목 값부터 따졌다. 그러니 나무의 기품과 격을 보는 안목이 생길 리 없었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나 크고 곧은 것이냐지, 얼마나 아름답고 활기찬 것이냐는 아니었다.
나무를 단순하게 금전으로만 셈하던 이런 태도는 한 소나무 애호가를 만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권유로 전국의 명목(名木) 소나무를 순례하면서, 소나무의 씩씩한 기상과 솟구치는 기개가 소나무의 생기(生氣)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 강인한 생명력과 청청(靑靑)한 기상도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소나무광(狂)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던가. 소나무광들은 소나무와 소통한다. 시인과 화가는 소나무의 격과 기품을 아름다운 시어로 노래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형미로 형상화한다. 영성스럽고 잘생긴 소나무를 보면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병들고 약해 보이는 명목 소나무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에 소나무한테 ‘막걸리’를 대접하도록 마을 이장에게 남몰래 돈봉투를 건넨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지름길은 소나무(자연)와 소통하면서 얻는 즐거움은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이유는 자연과의 교감으로 인해 우리 가슴속에 싹튼 감성이나 미의식은 물질의 풍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풍요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솔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로 세속에 찌든 영혼을 정화하고, 코끝을 스치는 송진 냄새로 잃어버린 영성을 되살리고자 오늘도 나는 소나무에게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