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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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大!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고려대는 한국 스포츠 불멸의 스타 산실 … 폭발하는 야성과 개척정신 한민족 기상 웅변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입력2005-04-28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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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大!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조오련(수영), 손기정(마라톤), 박주영(축구), 현주엽(농구). (왼쪽부터)

    고려대라는 기표(記表)엔 폭발하는 야성과 개척정신이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고려대 출신 체육인들은 특유의 아우라(Aura)를 갖고 있다. 한민족에게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손기정,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올림픽 메달을 딴 김성집, 한국인 최초로 유럽 축구에 진출한 차범근, 체육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CEO(최고경영자)에 오른 김영기,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한 조오련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한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월계관을 쓴 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지 꼭 56년 후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역시 고려대 출신인 황영조가 태극 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다. 끈질긴 민족성을 상징하는 마라톤의 역사는 고려대에서 시작해 고려대로 끝나는 셈이다.

    수영인 조오련은 고려대가 배출한 체육인 가운데 가장 ‘고려대다운’ 사람이다. 그가 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대표로 선발됐을 때 그를 메달 후보로 꼽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악으로 깡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한산모시로 지은 한복에 태극 마크가 선명한 흰 천을 머리에 두르고 시상대에 올랐다. ‘민족 고대’ 출신답게 민족의 얼을 아시아인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황영조 고 손기정 옹 56년 뛰어넘어 마라톤 제패

    조오련의 ‘한복 패션’은 88년 서울올림픽 남자 유도 60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김재엽이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조오련은 74년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2관왕에 올라 한국 최초로 아시아경기대회 2관왕 2연패에 성공한 뒤 은퇴해서는 패션모델로 주목받았고,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너는가 하면 양쯔강 종단, 한강 종단 등 끊임없이 이벤트를 만들며 뉴스를 제공해 왔다.



    차범근은 한국인 최초로 유럽 축구에 진출한 불세출의 축구 스타. 100m 11초대의 빠른 스피드와 폭발적인 돌파력으로 당시 세계 최고 무대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넣어 외국인 선수로는 가장 많은 골을 터뜨린 선수로 기록되고 있다. 차범근 이후 허정무, 황선홍, 서정원, 송종국, 이천수, 차두리, 박지성, 이영표 등 많은 선수들이 유럽 축구에서 활약했지만 차범근에 범접하는 선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들이자 고려대 후배인 차두리조차 “나는 감히 아버지 기록을 깨뜨릴 엄두도 못 낸다. 흉내라도 냈으면 좋겠다”고 물러설 만큼 차범근의 활약은 대단했다. 요즘 프로축구에서 한창 성가를 높이고 있는 박주영이 고려대 선배 차범근을 뛰어넘어 세계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고려대는 역도에서도 2명의 불세출의 스타를 배출했다. 김성집이 건국 이후 한국에 첫 메달을 바쳤고, 전병관은 역도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김성집은 광복 이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출전한 48년 런던올림픽 역도 75kg급에서 지금은 없어진 추상과 인상, 용상 합계 380kg으로 이집트의 엘 투니와 똑같은 무게를 들었다. 개체량 결과 김성집이 엘 투니보다 1.92kg 가벼워 김성집이 동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역도 시상식은 체육관이 아니라 런던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서 거행됐다. 10만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국 이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하늘 높이 올린 김성집의 쾌거는 갓 건국한 조국을 뜨겁게 달궜다.

    “高大!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차범근 이어 박주영까지 축구 세계 스타 배출

    김성집은 4년 뒤인 52년 헬싱키올림픽에는 감독 겸 선수로 출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행운이 따랐다. 이집트의 이스마일 가랍과 마찬가지로 382.5kg을 들었으나 몸무게가 200g 가벼워 또다시 동메달을 딴 것이다. 김성집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37세 되던 해인 56년 멜버른올림픽에도 출전해 올림픽 3회 연속 출전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5위를 차지하는 끈기를 보였다.

    전병관은 88년 서울올림픽 52kg급에서 260kg을 들어 불가리아의 마리노프에게 10kg 뒤지며 은메달을 차지해 가능성을 보였다. 이후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56kg으로 체급을 올렸다. 56kg급에는 중국 선수들이 2명이나 출전했지만 그들은 전성기를 누리던 전병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병관은 합계 287.5kg을 들어 277.5kg을 든 중국의 류시우빈(은메달)과 뤄장민(동메달)을 제치고 한국 역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고려대 농구인으로는 김영기, 전창진, 현주엽이 한국 농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김영기는 체육인 출신으론 처음으로 신용보증기금 CEO가 되었고, 한국농구연맹 총재를 지냈다. 그는 체육인 출신으로 드물게 전문성과 추진력, 행정력을 고루 갖춘 인물이다. 82년 프로야구, 83년 프로축구가 정권의 필요에 의해 출범한 것과 달리, 프로농구는 순수 농구인 출신인 그가 중심이 돼 팡파르를 울렸다.

    전창진 프로농구 원주TG 감독은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프런트 출신으로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입지전적인 감독이 되었고, 현주엽은 고등학생으론 사상 처음 기자회견을 한 선수로 남아 있다.

    93년 대학농구연맹전 결승전이 끝난 장충체육관은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한 연세대 농구팀을 응원하는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당시 연세대 선수는 문경은, 김재훈, 이상민, 우지원에 화룡점정으로 휘문고를 갓 졸업한 서장훈까지 가세해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문경은 등 ‘베스트 5’는 응원석에까지 뛰어 올라가 ‘아리아리 동동’을 노래하며 고려대를 한번 더 짓밟겠다는 듯 발까지 굴려가며 목이 터져라 승리를 자축했다.

    한편 고려대 응원단은 응원 기구들을 챙겨 들고 도망치듯 체육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시 한 경기 평균 40득점을 올리며 고교 제1의 선수로 군림하던 휘문고 현주엽이었다. 당시 현주엽은 고려대와 연세대의 집요한 스카우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주엽은 이날 경기를 보고 패하는 팀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지는 팀에 가서 이기는 팀으로 만들어야 진정한 스타이고 승부사이며 사나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현주엽은 고교생 신분으론 전무후무하게 기자회견을 자처해 ‘고려대행(行)’을 만천하에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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