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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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회사원 생활 접고 대안학교 교장·공인중개사·역술인 등으로 화려한 변신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5-03-09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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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남아 있으면 도둑), ‘사오정’(45세 정년)에 이어 ‘삼팔선’(38세를 넘지 못함)이라는 신조어까지 유행하는 요즘이다.
    • 고령화사회는 눈앞에 성큼 다가섰는데 거리는 중년의 퇴직자들로 넘쳐난다. ‘준비 안 된 노후는 지옥’이라는 말이 지독한 현실로 다가오는 지금,
    • 우리는 어떤 계획과 실천으로 다가올 앞날을 예비해야 할까. 남다른 발상과
    • 노력으로 ‘제2의 삶’을 성공적으로 열어젖힌 이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비비안 CEO를 그만두고 전원카페 사장으로 변신한 김종헌씨(오른쪽) 부부.

    서울 대치동에서 ‘멤버스공인중개사’를 운영하는 김윤동(58) 사장은 은행원 출신이다. 2001년 국민은행 서울 방배본동 지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김 사장은 이전부터 노후에는 공인중개사로 일하겠다는 결심을 해온 터였다.

    “85년 1회 공인중개사 시험 때 자격증을 따놓았거든요. 부동산 관리과장으로 근무하던 때라 업무에 필요해서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든든한 노후 대책을 세워둔 셈이 됐죠.”

    부동산중개업은 은행 업무와 유사하다. 부동산 거래에는 대부분 금융 거래가 따라가며 권리 분석 등 은행에서 쌓은 전문성을 활용할 여지도 많다. 둘 다 서비스업이라는 점도 같다. 고객들의 신뢰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김 사장은 “경기가 워낙 안 좋으니 큰돈을 벌 순 없지만, 생활하기에는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적성에 맞고 나름의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날마다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라고도 말했다.

    중소기업 사장이던 반영권(56)씨 역시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반 사장은 “85년 1회 시험 때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자격증을 따놓았다”며 “6년 전 사업이 어려워 접으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최소한의 노후 대책은 있는 셈이라 안심이 된다고 했다.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 ‘여명학교’의 우기섭(58) 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1969년 페어차일드 코리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모토로라코리아, 인텔코리아 등 세계 굴지의 IT 기업을 두루 거치며 경력을 쌓았고, 95년 맥스터코리아 사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2003년까지 9년 동안이나 CEO(최고경영자) 자리를 지키며 맥스터 아태지역 본부 가운데 최고 매출 신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완전히 낯선 분야인 교육계에 발을 들인 것은 2003년, 그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 우기섭 교장.

    우 교장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은 맥스터 본사가 그에게 한국지사의 구조조정을 지시했기 때문.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부하들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그는 “내가 그만둘 테니 다른 사람은 그냥 두라”며 스스로 사표를 썼다. 44년간의 직장생활 끝에 ‘광야’로 내몰린 그때, 그에게 다가온 기회가 바로 ‘여명학교’의 교장 직이었다.

    구조조정 아픔 겪고 50대에 재무설계회사 창업

    “처음에는 회사생활 동안 묻어두기만 했던 꿈을 펼치고 싶어 창업을 할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침 개교를 준비하고 있던 ‘여명학교’ 쪽에서 ‘CEO형 교장’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해온 겁니다. 아직 자리를 못 잡은 탈북자 교육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서는 경영능력이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마음이 흔들렸어요. 두 가지 길 사이에서 고민하다 더 늦기 전에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안학교 교장 직을 선택했지요.”

    2004년 6월의 일이다. 이때부터 우 교장은 자신의 모든 경영 노하우를 ‘여명학교’에 쏟아부었고, 같은 해 9월 이 학교는 국내의 5개 탈북자 교육 시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문을 열게 됐다. 올 2월 배출된 첫 졸업생 가운데 7명이 서강대, 성균관대, 외국어대, 중앙대 등에 합격하는 등 성과도 나타났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전국에 교육 적령기인 탈북자 자녀가 600여명이나 되는데, 이중 90%가 교육에서 소외돼 있는 상황이죠. 더 많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CEO 시절 혼자 쓰던 사무실보다 훨씬 작은 교무실에서 8명의 교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원하는 일을 하니 즐겁기만 하다’는 우 교장의 미래 계획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멤버스공인중개사’ 김윤동 사장(왼쪽)과 ‘파이낸피아’ 임계희 사장.

    재무설계회사 ‘파이낸피아’의 임계희(54) 사장은 30대 중반 예기치 않게 시작한 공부로 인해 CEO이자 전문직 종사자로서 ‘화려한’ 노후를 보장받게 된 경우다. 대학 졸업 후 외환은행을 거쳐 JP모건 서울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임 사장은 83년 서른 살의 나이에 과감히 미국행을 택했다. 현지 은행에서 일하며 퇴근 후에는 대학원에 다녔다. 처음 목표는 MBA 학위 취득이었으나 지도교수의 권유로 당시 그로서는 생소하기만 하던 재무설계사(FP, Financial Planner) 자격증을 취득하게 됐다. 이후로도 임 사장은 뉴욕대학(NYU) 금융·보험학 과정을 이수하는 등 전문성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

    전문직 공부·자격증 취득이 ‘밥줄 만들어준 밑천’

    “95년 초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은행에서 연락이 왔어요. 서울지점에서 일할 본부장급 인력을 찾는다더군요. 그때 귀국하면서 FP 자격증을 반납할까도 생각했죠. 자격을 계속 유지하려면 이만저만 공이 드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나 임 사장은 고생하는 쪽을 택했다.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1년에 한 번씩 미국을 드나들며 필요 학점을 이수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재무설계업을 도입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2001년 한국FP협회 창립에 중추적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노후에는 재무설계 일을 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2001년 9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구조조정 대상이 된 거지요. 새 직장을 알아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던 차에 FP협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습니다. 교육분과위원장을 맡아 교재 개발, 자격 인증 등의 업무를 추진했지요.”

    창업을 결심한 것은 2004년 1월이었다. 치밀한 구상 끝에 같은 해 6월 파이낸피아를 설립했다. 임 사장의 삶에서 직업 없는 공백기는 창업 준비를 하던 4개월뿐이었다. 임 사장은 “정년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진 것,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는 것, 후배들을 양성하며 고객들에게 미래의 행복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모두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CEO 출신 역술가 김남용씨.

    김남용(62)씨의 현 직함은 남각철학원 원장. 역학 서적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사주를 풀고 인생 상담을 해주는 그를 보며 과거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김 원장은 2001년 금호그룹 기술고문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접었다. 81년 38세의 나이로 벽산그룹 상무가 된 뒤, 20년 동안 기아그룹, 한진그룹 등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고위직 임원 생활만을 했다. 그러던 그가 50대 후반 어느 날 갑작스레 사표를 던지고 역술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김 원장은 사실 30대 후반부터 남다른 ‘2막 인생’을 준비해왔다. 자신보다 대여섯 살씩 많은 간부 사원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사주를 공부하다 그 쓰임새와 과학성에 경탄하게 된 것.

    “한번은 사주를 참고해 인사 배치를 했는데 결과가 기가 막히게 나오더라고요. 그 뒤부터 계속 사주에 대해 공부하고 실생활에도 응용해보기 시작했죠.”

    94년 기아그룹 계열사인 기산엔지니어링 대표이사를 맡았다가 기아그룹이 부도나기 1년 전인 96년 자신의 운명을 미리 읽고 사표를 낸 일도 있다. 이 사건은 김씨가 사주의 과학성에 대해 확신을 갖고, 이 분야에 대한 공부와 ‘컨설팅’을 제2의 직업으로 선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금 생활에 아주 만족해요. 직장생활을 할 때는 늘 회사 일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요.”

    그는 요즘 역술 초보자들도 사주풀이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중국 고대의 역술 비법을 정리한 ‘십간사주’ 이론서 번역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이어지는 상담과 번역, 공부가 쉽지만은 않지만 늘 보람되고 즐겁다 한다.

    “저는 20년 취미를 새 직업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만족도가 더 높은 듯해요. 제2의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오랜 시간 꾸준히 한 분야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문강사와 컨설턴트’ 노후 직업으로 노려볼 만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는 나름대로 착실한 경력을 쌓은 인사들이 많이 선택하는 노후 직업 중 하나가 바로 전문강사와 컨설턴트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송 출연, 기고, 강의, 각종 프로젝트 진행 등 전방위로 활동하는 일종의 ‘1인 기업’ CEO들이 늘어가는 추세다.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의 구본형(52) 소장, ‘공병호경영연구소’공병호(46) 소장, ‘이내화성공전략연구소’이내화(48) 소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50세 이후’를 고민하며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찾아내 계획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세 사람 다 직장생활 중 자신의 평소 관심 분야와 전문 영역, 삶에 대한 성찰 등을 두루 담은 책으로 대중 앞에 ‘데뷔’했고, 그 여세를 몰아 방송·신문 등 미디어를 통해 이름을 알림으로써 ‘1인 기업’의 기반을 닦았다. 이들이 사표를 던진 것은 이미 일정 수준의 경력과 자신감, 수익을 달성한 다음이었다. ‘장안 최고의 명강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최윤희(58)씨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인생 2막 성공기

    명강의로 유명한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최윤희씨.

    전업주부였던 최씨는 38세 되던 해 현대그룹 주부공개채용에 합격해 금강기획에 입사하면서 늦깎이 카피라이터가 됐다. 이후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성실한 생활로 승진을 거듭해 93년에는 케이블TV 현대방송의 홍보국장 자리에 올랐다. 98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최씨는 회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표를 던졌다. “나 한 사람 몸 털면 젊은 친구 두셋은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무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퇴직 이듬해인 99년 낸 에세이집 ‘행복, 그거 얼마예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덕분이었다.

    “카피라이터 출신이니 당연히 글 쓰는 데 관심이 많았죠.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는 건 천성이고요. 이전에도 책을 낸 적이 있고 해서 글을 쓴다는 건 제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책이 화제가 되자 KBS ‘아침마당’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최씨의 특별한 삶, 남다른 인생관, 탁월한 입담과 유머감각은 시청자들과 방송 관계자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이후 최씨는 일명 ‘행복학 박사’로서 매주 5개 이상의 방송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토요일에도 2~3회의 강의를 소화하는 유명인사가 됐다. ‘어디서 감히 짹짹’ ‘고정관념 와장창 깨뜨리기’ ‘멋진 노후를 예약하라’ 등의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어느 날 누군가 유명세를 타면 ‘저 사람 갑자기 떴다’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는데, 전 일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면 아주 맹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오래가려면 긴 시간 갈고닦은 ‘내공’이 있어야지요.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 콘텐츠 파워, 노하우가 아닌 노후(Know Who), 인간성, 건강, 여기에 남다른 자기개발 노력까지가 더해져야지요.”

    ㈜비비안 CEO를 지낸 김종헌(58)씨는 2004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강원도 홍천 첩첩산중에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라는 북 카페를 열었다. 새벽과 야간으로 어학학원을 다니고, 연이은 야근과 회식 접대에 시달리며 졸도, 호흡장애, 심장질환까지 겪어야 했던 직장생활의 명예로운 은퇴였다.

    “80년대 초 독일에서 근무할 때 포도밭에 둘러싸인 중세 귀족의 성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것을 봤어요. 그때부터 언젠가 나도 은퇴해 전원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살아가겠다는 소망을 품게 됐죠.”

    이 꿈을 위해 아내 이형숙(53)씨는 독일의 제빵 장인에게서 빵 굽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씨도 ‘북 카페’에 진열할 책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고서(古書)를 사 모았다. 2001년 CEO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에도 1년 9개월 동안 한 완구회사의 홍콩 본사 등에 근무하며 완벽하게 구상을 다듬은 뒤에야 비로소 카페 문을 열었다.

    “아침이면 카페 앞 계단을 빗질하고, 시장에서 채소를 사와요. 통밀에 포도주를 섞어 빵을 만들고, 이웃 주민들과 따뜻한 허브 티를 나누며 함께 어울립니다. 이 이상 행복한 삶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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