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아산이나 북한측은 삼성의 대북 투자 확대를 희망해 잇따른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삼성측은 요지부동이다. 지난해 북한경제시찰단이 삼성전자 공장을 둘러보는 장면.
그러나 김사장의 이러한 언급은 하루도 못 가 별다른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측이 현재로서는 개성공단 사업에 투자할 의사가 없다고 선을 긋고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아산 역시 김사장의 ‘삼성 참여’ 발언 이후 이렇다 할 구체적 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무게가 실린 발언이 아니었다는 점을 자인한 바 있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연초부터 각 기업이나 관계기관에 대북사업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주문해온 과정의 일환으로 김사장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라며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대북 이야기 나오면 민감한 반응
그러나 삼성측이 대북사업을 확대할 의사가 없다고 거듭 부인했는데도 현대아산측이 삼성을 상대로 사업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설득한 흔적은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7월 초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주관해 열린 남북경협 참여 기업들의 비공개 간담회. NSC가 경협에 참여하는 기업들을 불러모은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인 데다 이날 비공개 간담회에는 현재 대북사업에 참여하는 주요 기업들이 모두 참여해 관심을 모을 만했다. 이 자리에는 현대아산의 김사장뿐만 아니라 삼성그룹의 대북사업을 총괄 지휘하는 삼성전자 박영화 고문, 북한에서 임가공 사업을 하고 있는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 엘칸토 김용운 회장 등이 참석했고 북한에서 임가공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중소기업인 몇 사람도 참석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김사장이 삼성측의 박영화 고문에게 개성공단 입주를 제안하며 삼성이 원하는 지역이나 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점까지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날 간담회를 주관한 NSC측이 삼성측에 대북 투자 확대를 권유했는지, 현대아산측의 제의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회장의 자살로 인해 현대의 대북사업이 암초를 만나기 전인 7월 초 이미 현대가 삼성을 상대로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현대측이 적어도 삼성을 대북사업의 중요한 참여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진작부터 공을 들여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양 시내에 정주영체육관을 건립중인 현대측의 김사장이 평양 출장기간 동안 삼성 관계자들을 접촉한 정황도 감지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평양 근처에 텔레비전과 전화기, 카세트 등을 임가공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경협 사업 담당자들이 수시로 방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입장에서 삼성과의 물밑논의가 필요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접촉 기회는 없는 셈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지난 3월경에도 김사장이 평양에서 삼성측 관계자들과 접촉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아산측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삼성측은 일절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현대아산 김윤규 사장은 삼성전자측에 개성공단에 입주할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으나 정작 삼성측은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현대측은 끊임없이 삼성 참여설을 직·간접적으로 흘리고 있는 데 비해 삼성측은 현대측의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물귀신 작전’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삼성 관계자들은 대북사업 이야기만 나오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경협사업 부서에서 기초적인 현황조차도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언론의 확인 요청이 들어와도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대북사업과 관련해 지나치리만큼 신중한 삼성의 태도에 대해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연철 연구교수는 “삼성의 대북사업 확대 소식은 당장 시장에서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등 직접적인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삼성 입장에서는 설령 대북 투자를 확대한다고 하더라도 쉬쉬하면서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직접 삼성의 대북사업 전반을 다뤄본 바 있다.
‘떡 줄 사람’ 찾아 나선 상황
따라서 삼성은 앞으로도 획기적인 상황 변화가 없는 한 현재 수준의 대북사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삼성은 현재 평양 근처에 연간 2만대 정도의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임가공 공장을 운영하고 중국에서 조선컴퓨터센터와 공동으로 소프트웨어 개발사업을 벌이는 등 최소한의 대북 투자에 국한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대규모 장치산업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전에는 삼성전자가 대규모 경협사업에 뛰어들기는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똑같은 경공업이라고 하더라도 봉제 신발 등 단순 제조업은 땅값과 임금 등의 조건만을 보고 개성공단 입주 등 대북 투자를 결정할 수 있지만 복합전자단지를 구상하고 있는 삼성이 대북 투자를 결정하는 데는 정치적 위험요인 제거를 포함해 보다 근본적인 투자조건이 갖춰져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한편 이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삼성이 당장 대북 투자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시각도 있다. 삼성이 현대가 주도하는 투자사업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대북사업에 적극 뛰어들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여태까지 삼성이 벌여놓은 사업 중에 ‘넘버 투’를 자처하고 뛰어든 사업이 몇 개나 있겠는가. 현대가 북한과의 계약을 통해 앞으로 수십년간 독점권을 보장받아 놓은 사업에 삼성이 한 다리 걸치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삼성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현대아산 김사장이 ‘삼성 참여’라는 애드벌룬만 띄우고 있을 뿐 현대가 보장받은 독점권을 어떤 형태로든 양보하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삼성 참여설’의 단초가 됐던 MBC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사장은 ‘현대 혼자서 다 한다’는 데 대해 부정적 시각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 뿌려놓은 것도 있고 법적으로 보장돼 있기 때문에 결국은 현대아산이 앞장서서 해야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남북경협의 한 당사자인 북한측이 삼성의 참여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과 삼성이 노무현 정부 들어 재계에서 정권핵심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삼성의 대북사업 참여 확대를 점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떤 변수도 현대가 벌여놓은 판에 숟가락을 올려놓으라는 식으로 삼성에게 ‘넘버 투’를 강요하는 요인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회장 사후 현대의 대북사업이 좌초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여기저기서 대두되자 고 정회장의 계승자인 김사장이 일단 김칫국부터 준비해놓고 ‘떡 줄 사람’을 찾아 나섰다고 보는 게 정확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