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경축식장에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부부.
하지만 노대통령의 경축사에는 정치현안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대신 ‘한미동맹’을 근거로 한 자주국방 역량 강화라는 메시지가 광복절 경축사의 주제로 등장했다. 외교안보 분야 종사자들에겐 귀가 번쩍 뜨일 소리지만 정치인들로선 맥이 빠질 노릇이었다.
결국 ‘별것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지난 7월 중순 이후 청와대 주변에서는 “광복절을 계기로 국정 운영에 관한 대통령의 획기적 구상이 공개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대통령 측근들이 잇따라 청와대를 찾아 노대통령에게 지지율 상승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같은 시기, 청와대의 한 고위인사도 기자들과 만나 “8월15일이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부추겼다. 이 인사는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정 운영의 총론 및 구체적 방향까지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대통령이 아젠다로 던진 ‘2만 달러 시대’ 발언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8·15에도 대통령은 그런 기조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만 달러 시대론’이 단순한 슬로건 차원의 주장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정책실을 중심으로 2만 달러 시대라는 비전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사가 소개한 2만 달러 시대라는 ‘경제 아젠다’ 역시 이번 광복절 경축사의 키워드는 아니었다. 연설 말미에 2만 달러 시대의 비전을 잠시 언급하기는 했지만 구체적 실행방안으로 평가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정치적 비전도, 경제적 청사진도 내놓지 않은 8·15 기념식, 노대통령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광복절 직후, 청와대는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광복절 경축사 준비과정을 공개하면서 취임 후 처음으로 발표한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노대통령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통령 본인이 연설문을 직접 집필하는 등 취임 이후 깊이 고심하고 준비해온 국가전략과 국정방향을 경축사에 담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
8·15 경축사를 하고 있는 노대통령.
당초 초안에는 외교·안보 문제를 비롯해 사회·경제 분야 등 국정 전반이 언급됐다고 한다. 정치개혁에 관한 소신도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하지만 막판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의 폭과 수위가 대폭 조절됐다. 노대통령이 “광복절 취지에 걸맞게 이번에는 대미관계, 남북문제 등 민족문제에 주력하고 나머지는 국회연설 등 다른 기회에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서 외교·안보 분야가 경축사의 중심 테마로 부상했다. 주한미군 재조정 문제 등 민감한 부분이 포함된 탓에 노대통령은 관련 비서관들에게 철저한 보안 유지를 주문하기도 했다.
결국 대통령은 턱밑의 현안에 대해서는 철저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8·15 중대발표설’에 대한 세간의 기대를 외면했다. 왜 그랬을까.
노대통령의 한 386 측근은 “대통령은 아직 정치개혁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공개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상처 부위가 덧나서 심하게 곪고 있는데 여기에 섣불리 메스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도 말했다. 곪고 있을 때는 오히려 곪게 놔두는 것이 현명한 처방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인사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의 정치에 대한 생각”이라며 “침묵으로 지켜보되 스스로 변할 때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겠다는 게 대통령의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스스로 변할 때 비로소 속내를 드러낼 것”
이처럼 공개석상에서 신당문제나 정치개혁문제 등 정치현안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지만 노대통령의 정치권 개혁작업은 물밑에서 끈질기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주목해볼 대목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의 최근 발언이다.
김장관은 8월 초 ‘주간동아’와의 인터뷰(398호)에서 “현재 중앙정부 75억원, 지방자치단체 75억원, 도합 150억원 정도를 시민단체 및 NGO(비정부기구)에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지원금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관계법령을 고쳐서라도 300억, 500억원으로 지원금을 올려 그들이 실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장관이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을 늘리겠다고 한 이유는 “과거에 비해 그 수가 크게 늘어나 사업비가 턱없이 부족해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정가에서는 김장관의 발언을 액면대로만 해석하지 않는 분위기다. 시민단체를 활성화해 이를 통해 뭔가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시민단체의 전국적 연대기구를 발족해 대대적인 총선 감시 및 정치개혁운동을 벌이자는 논의가 한창인 것으로 전해졌다. 구체적으로 9월 정기국회를 전후해 노무현 정권에 우호적인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된 ‘범시민단체 연대기구’를 만들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여야 정치권에 대한 대선자금을 비롯한 정치자금 공개 압력을 강화하는 한편 투명한 정치자금 수수를 위한 정치자금법 개정, 정치 신인에 대한 과도한 규제 해소를 위한 제도 마련 등 현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정치권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일각에서는 최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정윤재 부산사상구 지구당위원장의 움직임도 노대통령의 정치개혁 구상과 관련,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신당파의 한 핵심인사는 “정위원장은 노대통령의 20년 측근이다. 따라서 본인은 부인하지만 정위원장의 탈당 선언은 노대통령과의 교감을 전제로 나온 발언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정치권이 권노갑 비자금 사건으로 쑥대밭이다. 당장은 민주당이 타깃이지만 한나라당이라고 정치자금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기성 정치권’으로 싸잡아 비판하면서 다음 총선을 기성 정치권 대 새 정치세력 간의 대결국면으로 몰아가지 않겠느냐. 정위원장 등의 탈당은 바로 이런 구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내년 총선 출마를 선언한 이해성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의 행보도 정위원장의 탈당 선언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노무현 개혁’을 현장에서 실천할 부산 출신 인맥에 대한 노대통령의 총동원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없지는 않다. 최근 내년 총선 출마 선언을 한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백원우 행정관은 “정위원장의 탈당 선언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에 대한 노대통령의 평가는 아직 드러난 것이 없다. 어느 정치세력과 손잡을지에 대해서도 정해진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민주당에 입당해서 정치를 시작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아무튼 노대통령의 정치개혁에 대한 구상은 은근하고 우회적이다. 정치권에 영향을 끼칠 만한 발언을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일견, 모든 선택을 정치권에 맡겨둔 듯 보인다.
하지만 정치개혁에 대한 소신이 분명한 만큼 노대통령이 언제까지나 침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어쩌면 ‘노무현식 정치개혁 작업’은 진행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느닷없다는 느낌마저 드는 김장관의 시민단체 지원론도 그렇고 측근들의 민주당 탈당 선언이나 출마 선언도 그렇고, 꿈틀꿈틀 ‘변화’를 향한 움직임이 도처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올가을 국민들이 그 실체를 볼 수 있을지, 볼 수 있다면 그 모양이 어떨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