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동 전 안기부장.
서울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지대운)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홍콩에서 살해당한 수지 김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과 관련, 김씨를 살해한 전 남편 윤태식씨(패스21 설립자·복역중)와 국가가 김씨 유족에게 42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사건 관련자 처벌’ 문제가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있다.
법무부 법무실 유동규 법무관은 “이번 판결은 1심에 불과하며, 국가가 항소할 가능성도 높아 누가 어떤 방식으로 42억원을 지불하게 될지 단언하기 어렵다”고 전제, “다만 배상액에 대한 확정판결이 나면 논의를 거쳐 국가가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사건 조작에 관련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당시 안기부 국장급 간부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김씨 유족의 변호를 담당한 이덕우 변호사는 “국가가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한다면 우스운 일이 될 것”이라며 “보상금은 ‘국민의 세금’이 아니라 사건의 은폐와 조작에 가담한 장 전 안기부장 등 당시 안기부 간부들이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 관련자 처벌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윤태식씨는 김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장 전 안기부장은 공소시효(범인 도피 혐의 3년)가 지났다는 이유로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 이 때문에 대한변호사협회 등의 주도로 반사회적·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의 제한을 없애는 ‘공소시효특별법’이 국회에 상정된 상태.
수지 김 유족들은 “1987년 1월 수지 김씨가 살해된 당시, 안기부가 윤씨가 살해한 사실을 알면서도 김씨를 간첩으로 몰아서 가족들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줬다”며 국가와 윤씨 등을 상대로 지난해 108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수지 김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된 계기는 2000년 1월20일자 ‘주간동아’ 기사다. 그 후 일부 언론에서 잇따라 의혹을 제기하자 당시 서울지검 외사부(박영렬 부장검사)가 수지 김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 결국 안기부가 사건을 조작했음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