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원에 대한 TK 지역의 평가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TK 출신 남성 의원들이 곧잘 수난을 당한다. 박의원이 이회창 총재와 대립각을 세우며 자기 주장을 펼쳐 나가던 지난해 연말 TK 한 초선 의원은 지역모임에 참석했다가 여성 유지로부터 “여자 혼자 저렇게 목소리를 내는데 도대체 남자(의원)들은 어디서 무얼 하나”라는 힐난을 들었다.
배포 큰 박근혜 의원의 진면목은 탈당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탈당 기자회견을 갖던 2월28일 전날까지만 해도 언론과 정치권은 박의원이 경선 불참을 선언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았다. 조직과 자금, 스케줄 등 무엇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 그러나 박의원은 허를 찌르며 탈당을 결행해 “역시 박근혜답다”는 말을 들었다.
박의원이 애당초 한나라당 경선에 나설 생각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이회창 총재 측근 인사들은 박의원이 처음부터 경선 참여 의사가 없었다고 비난한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총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며 박의원의 밀어붙이기에 숨은 배경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지난 2월19일 이총재가 의원회관으로 박의원을 찾아가 마지막 협상을 벌일 때도 박의원은 당초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재 거론되는 신당설은 크게 영남(보수) 신당설과 거대 신당설로 압축된다. 이 가운데 민국당 김대표가 2년 전부터 꾸준히 입에 올린 영남신당이 먼저 모양새를 잡아가는 듯하다. ‘허주(김대표 아호) 구상’에는 이수성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등의 동참설에 이어 박태준 전 총리,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역할론도 묻어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자민련 김종필(JP) 총재의 막후 지원 또한 전제돼 있다.
이 구상이 좀더 구체화할 경우 김혁규 경남지사를 비롯해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한 지방단체장과 한나라당 내 일부 구(舊)민주계 세력의 이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나라당으로서는 ‘영남 석권’이란 지방선거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다.
영남권을 뛰어넘는 ‘동-서 연대’의 대규모 정계개편 가능성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남신당 세력과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고문이 승리했을 경우 이탈 인사들이 하나로 결집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성하는 것이다. 거대 신당설은 민주당의 사실상 ‘와해’까지 상정한다. 동서화합, 정치개혁, 세대교체라는 구호로 무장한 연대세력이 미는 후보는 여야 기존 후보를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한화갑 고문,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 무소속 정몽준 의원 등 개혁세력이 가세하면 여야에서 수십명씩 빠져나갈 것이란 성급한 분석까지 뒤따른다.
범여권을 포괄하는 거대 신당의 경우 반드시 박근혜 의원을 중심에 두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그를 조연으로 돌리고 새로운 주인공을 찾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수성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등도 훌륭한 잠재적 후보군이다. 여권에선 정계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한화갑 정균환 정동영 정대철 김원기 의원 등을 잠재적 정계개편 주ㆍ조역들로 지목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 인사는 박의원 탈당을 전후해 ‘움직임’을 노출하고 있다.
지난 2월27일 정몽준 의원은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축구처럼 논스톱 슛을 쏠 수도 있다”며 대선 도전 의사를 피력했다. 지각변동의 한 축으로 인식되는 그의 발언이고 보면 행간에 숨은 의미는 각별해 보인다. 정의원의 이 같은 발언은 곧바로 박근혜`-`정몽준 연합을 통한 신당 창당의 시나리오로 이어진다. 경우에 따라 정동영 의원이 가세, ‘소장파 트리오’를 형성함으로써 최대의 ‘흥행 카드’로 부상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덕룡 의원을 중심으로 그와 친분이 있는 이성헌 김영춘 의원, YS의 대변인 격인 박종웅 의원의 움직임도 눈 여겨 봐야 한다. 특히 박종웅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은 상도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상태. 따라서 그가 다른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YS가 동참한다는 얘기로 해석할 수 있다. 관망적 자세로 일관하고 있지만, 여건만 성숙하면 곧바로 치고 나가 대세를 장악했던 YS의 특장은 아직 죽지 않은 듯하다. 박근혜 의원은 조만간 상도동을 방문해 YS를 만날 계획이다. 박의원 측근에 따르면 ‘민주화 세력과 근대화 세력의 화합’이라는 대(對)YS 접근 논리도 이미 점검했다. YS 역시 “아버지(박정희)는 (나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지만 아버지와 딸은 다르다”며 박의원에 대한 호감을 표시한 바 있다.
근대화 세력의 동참은 정치 외곽을 돌고 있는 박태준 전 총리를 견인할 수 있는 명분도 가져다 준다. 박근혜 의원측은 박 전 총리와 이미 직간접적으로 접촉해 호의적인 반응을 받아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복당 예정인 김상현 전 의원도 이런 흐름을 염두에 두고 밑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판의 탁월한 코디네이터 김윤환 민국당 대표 역시 주시 대상이다. 그는 지난 3월초 고교(경북고) 동창들과 골프모임을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전히 영남후보에 기대를 걸고 있는 눈치였다고 한다. 박의원이 영남후보 0순위고, 민주당 노무현 김중권 고문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김대표는 민주당 일부 세력이 결국 정계개편에 동참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구도로 가면 이인제 고문이 당내 경선에서 1위를 하겠지만 그를 통한 정권재창출은 불가능하다는 것. 당장 지방선거 참패가 눈에 보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난 2월 초 민주당과 자민련 및 민국당을 아우르는 신당 창당을 추진한 것도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자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창당 작업은 실패로 끝났고 김대표는 한동안 칩거 아닌 칩거에 들어갔다.
2월 말부터 다시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김대표 주변에는 변화의 기운이 감지된다. 우선 자신이 전면에 나서 정계개편을 추진했던 과거의 방법에서 탈피, 철저하게 뒤로 빠지는 모양새를 취한다. 당시 “허주 얼굴로는 안 된다”는 통렬한 비판이 터져 나왔고 허주가 이를 전격 수용한 것. 지난 2월 말 이수성 전 총리에게 “민국당 대표 자리를 맡아 달라”고 요청한 것 역시 이 같은 기류에 따라 새로운 정계개편 바람을 몰고 가려는 허주의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의원 탈당을 계기로 불거진 신당 창당설은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계개편의 각종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어느 것 하나 여의치 않다. 우선 백화점식으로 늘어선 인사들의 이념과 노선을 하나로 엮을 수단이 마땅치 않다. 자칫 잘못하면 ‘잡탕’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높다. ‘영남 신당론’은 당장 신당 창당의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역당이라는 비난과 정치개혁에 역행하는 처사란 따가운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탈당을 결행한 박의원의 정교한 후속 플랜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계개편론의 최대 약점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신당은 ‘도상(圖上) 정당’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나온다. 호사가들이 입에 올리는 ‘정몽준`-`박근혜 연대설’도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흔든다. 두 사람이 초등학교 동창생 이상의 정치적 주파수를 맞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의원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한때 연대를 위해 뛰었지만 두 인사의 개성이 강해 누가 누구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고 말한다. 김덕룡 의원은 정치적 위상에 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거의 없다.
박의원은 지금까지 비주류라는 울타리 안에서 비판만 해왔다. 그러나 이제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할 입장으로 바뀌었다. 자질을 검증하려는 언론과 국민의 요구는 점점 커질 것이 자명하다. 야당은 언제든 박의원을 ‘여자 이인제’로 몰아붙여 거품빼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16쪽 기사 참조). 이 모든 것이 박의원의 발목을 잡는 악재들이다. 문제는 박의원이 어느 정도의 정치 역량을 보이느냐는 점이다. 그의 활동과 역량에 따라 정치권의 폭발음은 크기가 달라질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지방선거가 치러진 후 그 결과에 따라 정치권의 지형 변화가 시작될 전망이다. 그러나 지방선거 이전부터 지각 변동이 시작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