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은 미국에 ‘제2의 베트남’은 아니었다. 10·7 공습 초기만 해도 잦은 오폭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미국이었다. 많은 분석가들은 미군이 진흙탕에 빠져 장기간 고전할 것이라 전망했다.
그러나 전망은 틀렸다. 탈레반 정권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험난한 지형도 지형이지만, 이슬람원리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정신력과 20년 내전을 거치며 단련된 무자헤딘들이 변변한 전투 한번 못하고 항복했다. 미국이 9·11 테러 배후자로 꼽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 카에다 조직 궤멸을 내걸고 아프간 공습을 시작한 지 두 달, 수도 카불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이다.
‘침략자의 무덤’으로 불린 아프가니스탄. 1980년대 10년간 막강한 옛소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으로 버티다 마침내 승리, 아프간 불패신화를 더했던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이다. 그런데 ‘상황 끝’이다. 91년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44일, 99년 코소보 전쟁에서 78일 만에 미국이 항복을 받아낸 전력에 비추어 아프간전이 그저 평균 정도라면 할말은 없다.
탈레반 정권 몰락에는 △강력한 미국의 공습 △탈레반의 전술 실패 △북부동맹의 반격 △외교적 고립 △민심 이반 △미 CIA의 집요한 매수분열공작 등 여섯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탈레반 정권 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는 12월 초만 해도 “최후의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며 탈레반군을 독려했다. 그러나 12월6일 그는 마지막 거점도시 칸다하르를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96년 이슬람근본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수도 카불을 비롯한 아프간의 대부분을 지배해 온 탈레반은 5년 만에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동부 산악지대 동굴을 배경 삼아 탈레반 잔존 강경파와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세력이 마지막 저항을 펼치겠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탈레반이 손님으로 받아들였던 빈 라덴의 죽음(사살 또는 공습에 따른 폭사) 소식만 들려오면, 아프간전은 확실히 막을 내린다.
탈레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뭐니뭐니 해도 미국의 강력한 해군력과 공군력에 바탕한 공습이다. 아프간 공습은 흐린 날씨 탓에 지장을 받았던 99년의 코소보 공습에 비해 훨씬 강력했다. 폭 500m 이내를 초토화하는 꼬마 핵무기급 폭탄 ‘데이지 커터’(Daisy Cutter)와 집속탄(Cluster Bomb), 열화우라늄탄(DU)과 같은 참호 파괴탄(Bunker Buster) 공격은 탈레반군을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공습 테러전술’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국제인권단체들이 “전쟁의 일반적 규범을 벗어난 무차별 살상행위”라 비난한 것도 공습의 파괴력이 워낙 엄청나 주변 민간인들까지 죽고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미국의 첨단 전투과학은 대량 살상력에 관한 한 역사상 어느 국가보다 앞선다. 아마도 지금 베트남전의 미군 개입이 재연된다면 1975년의 참담한 사이공 철수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탈레반 세력의 전술 실패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군사전문가들은 탈레반이 일찌감치 정규전을 포기하고 산악지대로 들어가 장기 게릴라전을 펴는 쪽으로 전술전략을 세워야 했다고 본다. 그러나 마자르 이 샤리프, 쿤두즈 등 거점도시에 주력군을 배치함으로써 미군의 집중공습에 앉아서 당했다. 특히 통신망이 공습으로 파괴돼 탈레반의 지휘통제 체계가 마비된 것도 치명타였다. 탈레반군은 더 이상의 병력 손실이 나기에 앞서 전술적으로 군을 뒤로 물려 구소련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폈던 것처럼 장기적 국면전환을 노리는 전술을 썼어야 마땅했다. 그렇지 못하고 칸다하르에 남아 포위된 채 군수물자가 바닥을 보이자 저항의지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북부동맹도 아프간전의 주요 변수다. 9·11 테러사태 전만 해도 북부동맹은 아프간 영토의 5% 남짓한 북쪽 산악지대 모퉁이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미국의 엄청난 물량지원, 미 특수부대원들의 유도, 영ㆍ미군의 합동 공습에 힘입어 파죽지세로 탈레반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북부동맹은 “우리가 없었다면 미국은 이렇게 빨리 탈레반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고 주장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프간 같은 산악지대에 본격적인 미 지상군 투입 없이 전쟁을 치르려면 해를 넘기고도 오래 끌었을 것이다.
외교적 고립도 탈레반 몰락을 부채질했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지구상에서 탈레반 정권을 인정해 온 3개국(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내 편 아니면 테러편’이란 줄 세우기 압력에 밀려 3개국은 탈레반을 외면했다. 소련군과 싸우던 시절과는 주변 상황이 너무 달랐다. 당시 사우디는 풍부한 물자와 자금을 대주었고, 무자헤딘 지원자들을 파키스탄을 통해 보내주었다. 파키스탄은 이들을 훈련시켜 게릴라전에 내보내는 중간다리 역할을 맡았다. 이번엔 특히 파키스탄이 등 돌린 게 탈레반으로선 뼈아픈 손실이다.
아프간의 민심이 탈레반을 떠난 점도 변수였다. 탈레반은 처음에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바탕으로 부패하고 기강이 서지 않은 군벌 세력과 강도 떼를 제압, 전쟁의 공포와 약탈에 시달려온 아프간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풍속을 해친다며 TV와 음악을 금지했고, 여성들이 길을 나설 땐 ‘부르카’란 긴 옷을 입게 하는 등 이슬람 율법을 극단적으로 해석한 강압통치로 민심을 잃었다. 카불의 민심이 총을 드는 쪽보다 반군 입성을 반기는 쪽으로 흘러간 것은 탈레반 정권의 독불장군식 정책 실패 탓이다.
마지막 변수는 미 CIA의 집요한 매수 분열공작. CIA는 10·7 공습 뒤 탈레반 거점인 남부 파슈툰 지역을 주 대상으로 종족간 갈등을 부추겨 탈레반 세력을 갉아먹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그 힘의 원천은 달러였다. 9·11 테러사태 직후 부시 미 대통령은 CIA 조지 테닛 국장에게 “아프간전에서 CIA가 수행할 작전을 위해 10억 달러를 써도 좋다”고 결재했다. 현지에 파견된 CIA 요원과 고용원들은 달러 뭉치를 내보이며 매수분열 공작을 활발히 펼쳤다. 아프간과 탈레반의 복잡한 인맥구조에 대한 상세 정보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통해 얻었을 것이다. 아프간은 이해관계에 따라 종족끼리 이합집산을 거듭, 달러를 앞세운 CIA의 매수공작이 군벌이나 토착세력에 먹혀들 소지가 큰 나라다. 아프간전 후반에 탈레반 지지기반인 남부 파슈툰족의 일부가 반 탈레반 봉기로 돌아선 것도 CIA의 작품이다.
결국 겉으로는 엄청난 공습, 물밑으론 달러 뭉치의 공세 앞에 탈레반 체제가 무너졌다고 보면 틀림없다. 따지고 보면 모두 달러의 힘이다. 전쟁이 싱겁게(?) 끝났다고 아쉬워하는 집단이 있다. 전쟁특수를 노린 미 군수산업체들이다. 미 의회는 9·11 테러사태 뒤 대 테러 전쟁 비용으로 400억 달러를 승인한 바 있다. 아프간전이 장기화되면 이 돈은 고스란히 무기구입에 쓰이고, 추가지원 예산도 나올 것이다. 토마호크 미사일 하나만 해도 110만 달러다. 그런데 두 달 만에 끝나다니…. 군수산업체들은 부시 독트린의 깃발 아래 이라크든 소말리아든 ‘테러와의 전쟁’ 확전의 포문이 열리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 세력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며 제2차 세계대전 뒤 제3세계에서 관철해 온 미국의 패권을 확실히 자리매김하자는 미국 내 강경파의 목소리는 미사일방어계획(MD)의 강행 방침과 더불어 군수산업체들엔 복음(福音)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틀렸다. 탈레반 정권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험난한 지형도 지형이지만, 이슬람원리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정신력과 20년 내전을 거치며 단련된 무자헤딘들이 변변한 전투 한번 못하고 항복했다. 미국이 9·11 테러 배후자로 꼽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 카에다 조직 궤멸을 내걸고 아프간 공습을 시작한 지 두 달, 수도 카불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이다.
‘침략자의 무덤’으로 불린 아프가니스탄. 1980년대 10년간 막강한 옛소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으로 버티다 마침내 승리, 아프간 불패신화를 더했던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이다. 그런데 ‘상황 끝’이다. 91년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44일, 99년 코소보 전쟁에서 78일 만에 미국이 항복을 받아낸 전력에 비추어 아프간전이 그저 평균 정도라면 할말은 없다.
탈레반 정권 몰락에는 △강력한 미국의 공습 △탈레반의 전술 실패 △북부동맹의 반격 △외교적 고립 △민심 이반 △미 CIA의 집요한 매수분열공작 등 여섯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탈레반 정권 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는 12월 초만 해도 “최후의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며 탈레반군을 독려했다. 그러나 12월6일 그는 마지막 거점도시 칸다하르를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96년 이슬람근본주의의 깃발을 내걸고 수도 카불을 비롯한 아프간의 대부분을 지배해 온 탈레반은 5년 만에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동부 산악지대 동굴을 배경 삼아 탈레반 잔존 강경파와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세력이 마지막 저항을 펼치겠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탈레반이 손님으로 받아들였던 빈 라덴의 죽음(사살 또는 공습에 따른 폭사) 소식만 들려오면, 아프간전은 확실히 막을 내린다.
탈레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뭐니뭐니 해도 미국의 강력한 해군력과 공군력에 바탕한 공습이다. 아프간 공습은 흐린 날씨 탓에 지장을 받았던 99년의 코소보 공습에 비해 훨씬 강력했다. 폭 500m 이내를 초토화하는 꼬마 핵무기급 폭탄 ‘데이지 커터’(Daisy Cutter)와 집속탄(Cluster Bomb), 열화우라늄탄(DU)과 같은 참호 파괴탄(Bunker Buster) 공격은 탈레반군을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공습 테러전술’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국제인권단체들이 “전쟁의 일반적 규범을 벗어난 무차별 살상행위”라 비난한 것도 공습의 파괴력이 워낙 엄청나 주변 민간인들까지 죽고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미국의 첨단 전투과학은 대량 살상력에 관한 한 역사상 어느 국가보다 앞선다. 아마도 지금 베트남전의 미군 개입이 재연된다면 1975년의 참담한 사이공 철수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탈레반 세력의 전술 실패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군사전문가들은 탈레반이 일찌감치 정규전을 포기하고 산악지대로 들어가 장기 게릴라전을 펴는 쪽으로 전술전략을 세워야 했다고 본다. 그러나 마자르 이 샤리프, 쿤두즈 등 거점도시에 주력군을 배치함으로써 미군의 집중공습에 앉아서 당했다. 특히 통신망이 공습으로 파괴돼 탈레반의 지휘통제 체계가 마비된 것도 치명타였다. 탈레반군은 더 이상의 병력 손실이 나기에 앞서 전술적으로 군을 뒤로 물려 구소련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폈던 것처럼 장기적 국면전환을 노리는 전술을 썼어야 마땅했다. 그렇지 못하고 칸다하르에 남아 포위된 채 군수물자가 바닥을 보이자 저항의지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북부동맹도 아프간전의 주요 변수다. 9·11 테러사태 전만 해도 북부동맹은 아프간 영토의 5% 남짓한 북쪽 산악지대 모퉁이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미국의 엄청난 물량지원, 미 특수부대원들의 유도, 영ㆍ미군의 합동 공습에 힘입어 파죽지세로 탈레반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북부동맹은 “우리가 없었다면 미국은 이렇게 빨리 탈레반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고 주장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프간 같은 산악지대에 본격적인 미 지상군 투입 없이 전쟁을 치르려면 해를 넘기고도 오래 끌었을 것이다.
외교적 고립도 탈레반 몰락을 부채질했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지구상에서 탈레반 정권을 인정해 온 3개국(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내 편 아니면 테러편’이란 줄 세우기 압력에 밀려 3개국은 탈레반을 외면했다. 소련군과 싸우던 시절과는 주변 상황이 너무 달랐다. 당시 사우디는 풍부한 물자와 자금을 대주었고, 무자헤딘 지원자들을 파키스탄을 통해 보내주었다. 파키스탄은 이들을 훈련시켜 게릴라전에 내보내는 중간다리 역할을 맡았다. 이번엔 특히 파키스탄이 등 돌린 게 탈레반으로선 뼈아픈 손실이다.
아프간의 민심이 탈레반을 떠난 점도 변수였다. 탈레반은 처음에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바탕으로 부패하고 기강이 서지 않은 군벌 세력과 강도 떼를 제압, 전쟁의 공포와 약탈에 시달려온 아프간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풍속을 해친다며 TV와 음악을 금지했고, 여성들이 길을 나설 땐 ‘부르카’란 긴 옷을 입게 하는 등 이슬람 율법을 극단적으로 해석한 강압통치로 민심을 잃었다. 카불의 민심이 총을 드는 쪽보다 반군 입성을 반기는 쪽으로 흘러간 것은 탈레반 정권의 독불장군식 정책 실패 탓이다.
마지막 변수는 미 CIA의 집요한 매수 분열공작. CIA는 10·7 공습 뒤 탈레반 거점인 남부 파슈툰 지역을 주 대상으로 종족간 갈등을 부추겨 탈레반 세력을 갉아먹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다. 그 힘의 원천은 달러였다. 9·11 테러사태 직후 부시 미 대통령은 CIA 조지 테닛 국장에게 “아프간전에서 CIA가 수행할 작전을 위해 10억 달러를 써도 좋다”고 결재했다. 현지에 파견된 CIA 요원과 고용원들은 달러 뭉치를 내보이며 매수분열 공작을 활발히 펼쳤다. 아프간과 탈레반의 복잡한 인맥구조에 대한 상세 정보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를 통해 얻었을 것이다. 아프간은 이해관계에 따라 종족끼리 이합집산을 거듭, 달러를 앞세운 CIA의 매수공작이 군벌이나 토착세력에 먹혀들 소지가 큰 나라다. 아프간전 후반에 탈레반 지지기반인 남부 파슈툰족의 일부가 반 탈레반 봉기로 돌아선 것도 CIA의 작품이다.
결국 겉으로는 엄청난 공습, 물밑으론 달러 뭉치의 공세 앞에 탈레반 체제가 무너졌다고 보면 틀림없다. 따지고 보면 모두 달러의 힘이다. 전쟁이 싱겁게(?) 끝났다고 아쉬워하는 집단이 있다. 전쟁특수를 노린 미 군수산업체들이다. 미 의회는 9·11 테러사태 뒤 대 테러 전쟁 비용으로 400억 달러를 승인한 바 있다. 아프간전이 장기화되면 이 돈은 고스란히 무기구입에 쓰이고, 추가지원 예산도 나올 것이다. 토마호크 미사일 하나만 해도 110만 달러다. 그런데 두 달 만에 끝나다니…. 군수산업체들은 부시 독트린의 깃발 아래 이라크든 소말리아든 ‘테러와의 전쟁’ 확전의 포문이 열리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 세력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며 제2차 세계대전 뒤 제3세계에서 관철해 온 미국의 패권을 확실히 자리매김하자는 미국 내 강경파의 목소리는 미사일방어계획(MD)의 강행 방침과 더불어 군수산업체들엔 복음(福音)처럼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