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겨운 잔치판이라도 벌어진 듯 했다. 30년 만에 내린 폭설은 눈앞의 북한산 자락을 온통 하얗게 칠해놓았고, 언덕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그림 같은 집 가나아트센터(서울 평창동)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초로의 화가들과 젊은 관객들이 속속 모여들어 북적대고 있었다.
이날은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리는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전(2월16일∼4월1일)의 개막식이 있는 날이었다. 21세기가 열린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아보는 우리의 8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흔히들 ‘격변기’라고 뭉뚱그려 얘기하는 그 시절에 미술계에는 밤을 새며 등사판을 밀고 시위현장에 내걸 그림을 그리던 젊은 화가들이 있었다. 전시회가 봉쇄되고 작가가 구속되거나 그림이 압수당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별 얘깃거리도 안 되는 흔한 일이었다. ‘미술’이라고 하면 그저 부잣집 거실에 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때에 그들은 미술로 현실을 발언하고, 저항하고, 변화시키고자 했다.
예술-작품성 재평가 작업 신호탄
리얼리즘이란 표현방식으로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구실을 묻고 답했던 당시의 미술 사조에 사람들은 ‘민중미술’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과거 속에 묻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민중미술이 저벅저벅 걸어나와 커다란 전시장을 가득 메우며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고, 또 한편으론 한물간 노배우가 펼치는 희극처럼 묘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참 이상해요. 예전엔 이런 그림들 보면 왠지 무섭고 꺼려졌는데, 지금 보니 참 재밌어요. 작품마다 유머가 넘치고…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전시장에서 만난 한 여성 관객은 이렇게 관람소감을 밝혔다. 시대가 변해서일까. 또는 인터넷이니 뭐니 해서 눈만 뜨면 현란하고 자극적인 정보가 폭포같이 쏟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일까. 이곳의 그림들은 오히려 얌전해(?) 보이기까지 한다.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비판 의식과 현장성 때문에 정부당국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뒷전에 내밀려왔던 민중미술에 대해 이제 그 예술성을 인정하고 미술작품으로서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나아트센터의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도 그런 것이다.
“80년대 리얼리즘 작품들은 작품 자체가 아닌 작가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및 정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던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당시 미술의 조형적인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과 미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 한국화단의 주류적인 흐름이었음을 확인하고 미술사적인 가치를 검증하는 데 이번 전시의 목적이 있습니다.”(김민성 큐레이터)
이번 전시회에는 가나아트가 소장한 리얼리즘 계열 작가 45명의 작품 200여점 중 대표작 100여점이 선보이게 된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실적인 묘사와 표현적인 상징성, 그리고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효과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엿볼 수 있고 사용된 매체와 주제가 실로 방대하다. 70년대 말부터 84년까지의 평면작품은 제1, 2전시장에 분산 전시되며 85년부터 90년대 초까지의 회화는 제3전시장에 걸린다. 입체작품은 세 전시장에 나뉘어 소개되고 10m가 넘는 대형 걸개그림(‘80년대 그림판 이야기’)도 볼 수 있다. 출품작가는 강요배 김호석 박불똥 민정기 손장섭 손상기 신학철 안창홍 오경환 오윤 이종구 이청운 임옥상 전수천 정복수 홍성담 이응노 박생광 등이다.
개막식에는 10여 명의 출품 작가들이 함께했다. “허, 이 사람 정말 오랜만이군. 한 10년 됐나….” 얼싸안거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눈 작가들은 자신과 동료들의 그림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림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언어지요. 80년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은 시대에 민감한 더듬이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임옥상) 87년 ‘카페’라는 작품을 통해 정권교체와 관련된 정치권 인사들을 풍자적으로 그렸던 이흥덕씨는 “이 그림을 그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작가의 관심이나 작품의 주제도 함께 변해간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성(性)과 사회의 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을 그리면서 ‘관음증’을 주제로 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민중미술 태동의 계기가 된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79년 결성)에 당시 미술기자의 신분으로 참여했던 윤범모 교수(경원대)는 “그땐 다들 감옥 갈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면서 “당시의 미술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며, 민중미술이 추구했던 인간의 가치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양비론이나 이분법적으로 바라봤던 민중미술에 대한 재평가가 미술계 내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길 바랍니다”고 말했다.
이곳에 출품된 작품들은 전시 후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그동안 수집한 80년대 리얼리즘 작품 200여 점을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무상 기증하기로 한 것. 서울 서소문 옛 대법원 자리에 2002년 개관할 예정인 서울시립박물관은 독립 전시실을 따로 마련해 이 작품들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개막식에 참석한 강홍빈 서울시 행정 부시장은 “80년대, 그림이 현실에 대해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지나간 시대의 귀중한 발언인 이 작품들을 새로 생길 미술관에서 소중하게 보존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가나아트측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날은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리는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전(2월16일∼4월1일)의 개막식이 있는 날이었다. 21세기가 열린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아보는 우리의 8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흔히들 ‘격변기’라고 뭉뚱그려 얘기하는 그 시절에 미술계에는 밤을 새며 등사판을 밀고 시위현장에 내걸 그림을 그리던 젊은 화가들이 있었다. 전시회가 봉쇄되고 작가가 구속되거나 그림이 압수당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별 얘깃거리도 안 되는 흔한 일이었다. ‘미술’이라고 하면 그저 부잣집 거실에 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던 때에 그들은 미술로 현실을 발언하고, 저항하고, 변화시키고자 했다.
예술-작품성 재평가 작업 신호탄
리얼리즘이란 표현방식으로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구실을 묻고 답했던 당시의 미술 사조에 사람들은 ‘민중미술’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과거 속에 묻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민중미술이 저벅저벅 걸어나와 커다란 전시장을 가득 메우며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고, 또 한편으론 한물간 노배우가 펼치는 희극처럼 묘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참 이상해요. 예전엔 이런 그림들 보면 왠지 무섭고 꺼려졌는데, 지금 보니 참 재밌어요. 작품마다 유머가 넘치고…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전시장에서 만난 한 여성 관객은 이렇게 관람소감을 밝혔다. 시대가 변해서일까. 또는 인터넷이니 뭐니 해서 눈만 뜨면 현란하고 자극적인 정보가 폭포같이 쏟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일까. 이곳의 그림들은 오히려 얌전해(?) 보이기까지 한다.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비판 의식과 현장성 때문에 정부당국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뒷전에 내밀려왔던 민중미술에 대해 이제 그 예술성을 인정하고 미술작품으로서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나아트센터의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도 그런 것이다.
“80년대 리얼리즘 작품들은 작품 자체가 아닌 작가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및 정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던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당시 미술의 조형적인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과 미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 한국화단의 주류적인 흐름이었음을 확인하고 미술사적인 가치를 검증하는 데 이번 전시의 목적이 있습니다.”(김민성 큐레이터)
이번 전시회에는 가나아트가 소장한 리얼리즘 계열 작가 45명의 작품 200여점 중 대표작 100여점이 선보이게 된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실적인 묘사와 표현적인 상징성, 그리고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효과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엿볼 수 있고 사용된 매체와 주제가 실로 방대하다. 70년대 말부터 84년까지의 평면작품은 제1, 2전시장에 분산 전시되며 85년부터 90년대 초까지의 회화는 제3전시장에 걸린다. 입체작품은 세 전시장에 나뉘어 소개되고 10m가 넘는 대형 걸개그림(‘80년대 그림판 이야기’)도 볼 수 있다. 출품작가는 강요배 김호석 박불똥 민정기 손장섭 손상기 신학철 안창홍 오경환 오윤 이종구 이청운 임옥상 전수천 정복수 홍성담 이응노 박생광 등이다.
개막식에는 10여 명의 출품 작가들이 함께했다. “허, 이 사람 정말 오랜만이군. 한 10년 됐나….” 얼싸안거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반가운 인사를 나눈 작가들은 자신과 동료들의 그림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림은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언어지요. 80년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은 시대에 민감한 더듬이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임옥상) 87년 ‘카페’라는 작품을 통해 정권교체와 관련된 정치권 인사들을 풍자적으로 그렸던 이흥덕씨는 “이 그림을 그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다”면서 “시대가 변하면서 작가의 관심이나 작품의 주제도 함께 변해간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성(性)과 사회의 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을 그리면서 ‘관음증’을 주제로 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민중미술 태동의 계기가 된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79년 결성)에 당시 미술기자의 신분으로 참여했던 윤범모 교수(경원대)는 “그땐 다들 감옥 갈 각오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면서 “당시의 미술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며, 민중미술이 추구했던 인간의 가치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양비론이나 이분법적으로 바라봤던 민중미술에 대한 재평가가 미술계 내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길 바랍니다”고 말했다.
이곳에 출품된 작품들은 전시 후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될 예정이다.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그동안 수집한 80년대 리얼리즘 작품 200여 점을 모두 서울시립미술관에 무상 기증하기로 한 것. 서울 서소문 옛 대법원 자리에 2002년 개관할 예정인 서울시립박물관은 독립 전시실을 따로 마련해 이 작품들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개막식에 참석한 강홍빈 서울시 행정 부시장은 “80년대, 그림이 현실에 대해 강력하게 발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지나간 시대의 귀중한 발언인 이 작품들을 새로 생길 미술관에서 소중하게 보존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가나아트측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