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이 처음으로 언급된 문헌은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인데 부빔밥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보다는 주로 골동반(汨董飯)이라 표기하는데 골동(汨董)의 골(汨)은 ‘어지러울 골’자며 동(董)은 ‘다스릴 동’자이므로 골동이란 여러 가지 물건을 한데 섞는 것을 말한다. 결국 골동이란 이미 지어놓은 밥에다 여러 가지 찬을 섞어서 한데 비빈 것을 말한다.
비빔밥은 여러 면에서 우리 정서와 잘 부합되는 음식이다. 사람 사이의 정분을 확인하는 한솥밥 문화인 신인공식(神人供食)의 대표적인 음식이며 큰 바가지에 비벼 한 식구(食口)가 함께 어울려 나누어 먹는 음식이다. 이는 곧 두레정신을 대표한다. 또 섣달 그믐날에 남은 음식이 해를 넘기지 않게 남은 밥과 반찬을 그릇에 모두 얹어서 밤참으로 먹었다 하여 12월의 절식으로 유래되어 오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음식이 전주비빔밥이기도 한데 이는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로 그 전통성을 갈무리해 왔다.
여기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진주비빔밥’이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고 쇠머리곰국이 아닌 선지국과 함께 먹는 것이 특징이다. 오색나물과 고명을 화려하게 얹어 화반(花飯)이라고도 하며, 내장류와 나물이 든 선지국, 속대기(해초) 등을 내는 것이 다르다.
진주비빔밥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부녀자들이 군관을 위해 밥을 지어 나르면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밥에 각종나물을 얹었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설(說)도 있고,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자손들이 음복을 할 때 차렸다는 음복설, 또는 헛제삿밥(안동-진주)설도 있다.
진주에서는 중앙시장 안통의 먹자골목에 있는 제일식당(055-41-5591)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집주인 윤소연씨(78)에 따르면 밥물은 곰국을 사용하고 나물은 뽀얀 물이 나오도록 무친다. 비빔밥에 곁들이는 탕에는 건지가 많고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양지머리, 허파, 양, 선지, 콩나물, 고사리, 토란대, 무, 정장 등에 바지락을 볶아 만든 자작한 국(일명 보탕국)을 한 수저씩 올려 비빔밥의 맛을 돋운다. 쇠고기는 반드시 육회를 쓰고, 엿고록장을 사용하며, 마른북어 무침과 오징어채 볶음을 찬으로 곁들여 2대에 걸쳐 40년의 전통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예로부터 진주음식은 권번(券番) 음식이 발전하여 화려하기로 이름나 있다. 안동선비들의 음식이었던 헛제삿밥이 있는가 하면 전복김치가 유명했고 방짜유기만을 사용한 한정식, 진주냉면, 은어밥 등이 유명했다. 비빔밥을 화반(花飯)이라 불렀던 것도 감사또가 부임해 소리판이 열리면 한밤중에 이 화반을 먹는 습속에서 유래한다.
진주냉면 또한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루었던 것인데 이 또한 기생(妓生) 문화와 연관이 깊다. 동편제 창시자인 송흥록의 더늠은 귀곡성을 들기도 하지만, 감사또와의 소리내기에서 이겨 맹월을 얻었고, 그 맹월과 마지막 이별장면인 진양조가락도 판소리에선 처음 도입된 가락이다. 그런가 하면 최경회의 애기(愛妓)인 논개의 촉석루 순절도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이 비빔밥 한 그릇을 통해서 깨달을 수도 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인들이 진주에 와서 비빔밥이 동이 났는데 퇴폐문화로 내몰려 그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윤소연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 밖에도 비빔밥은 산채비빔밥 콩나물비빔밥 열무비빔밥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특히 산중(지리산) 사람들이 남강 나루터를 건너와 소싸움 소리판 내기, 씨름 등 야시장이 들썩일 땐 이 진주비빔밥과 헛제삿밥이 동이 났다는 일화도 이 비빔밥 한 그릇에 담긴 토박이들의 오붓한 정이다.
촉석루에 올라 의연한 남강을 굽어보며 ‘강나무 건너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밀주 한 잔으로 때움도 그날의 격세지감을 말해 주는 멋이 아닐까 싶다.
비빔밥은 여러 면에서 우리 정서와 잘 부합되는 음식이다. 사람 사이의 정분을 확인하는 한솥밥 문화인 신인공식(神人供食)의 대표적인 음식이며 큰 바가지에 비벼 한 식구(食口)가 함께 어울려 나누어 먹는 음식이다. 이는 곧 두레정신을 대표한다. 또 섣달 그믐날에 남은 음식이 해를 넘기지 않게 남은 밥과 반찬을 그릇에 모두 얹어서 밤참으로 먹었다 하여 12월의 절식으로 유래되어 오기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음식이 전주비빔밥이기도 한데 이는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로 그 전통성을 갈무리해 왔다.
여기에 버금가는 것이 바로 ‘진주비빔밥’이다. 콩나물 대신 숙주나물을 쓰고 쇠머리곰국이 아닌 선지국과 함께 먹는 것이 특징이다. 오색나물과 고명을 화려하게 얹어 화반(花飯)이라고도 하며, 내장류와 나물이 든 선지국, 속대기(해초) 등을 내는 것이 다르다.
진주비빔밥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부녀자들이 군관을 위해 밥을 지어 나르면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밥에 각종나물을 얹었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설(說)도 있고,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자손들이 음복을 할 때 차렸다는 음복설, 또는 헛제삿밥(안동-진주)설도 있다.
진주에서는 중앙시장 안통의 먹자골목에 있는 제일식당(055-41-5591)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집주인 윤소연씨(78)에 따르면 밥물은 곰국을 사용하고 나물은 뽀얀 물이 나오도록 무친다. 비빔밥에 곁들이는 탕에는 건지가 많고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양지머리, 허파, 양, 선지, 콩나물, 고사리, 토란대, 무, 정장 등에 바지락을 볶아 만든 자작한 국(일명 보탕국)을 한 수저씩 올려 비빔밥의 맛을 돋운다. 쇠고기는 반드시 육회를 쓰고, 엿고록장을 사용하며, 마른북어 무침과 오징어채 볶음을 찬으로 곁들여 2대에 걸쳐 40년의 전통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예로부터 진주음식은 권번(券番) 음식이 발전하여 화려하기로 이름나 있다. 안동선비들의 음식이었던 헛제삿밥이 있는가 하면 전복김치가 유명했고 방짜유기만을 사용한 한정식, 진주냉면, 은어밥 등이 유명했다. 비빔밥을 화반(花飯)이라 불렀던 것도 감사또가 부임해 소리판이 열리면 한밤중에 이 화반을 먹는 습속에서 유래한다.
진주냉면 또한 평양냉면과 쌍벽을 이루었던 것인데 이 또한 기생(妓生) 문화와 연관이 깊다. 동편제 창시자인 송흥록의 더늠은 귀곡성을 들기도 하지만, 감사또와의 소리내기에서 이겨 맹월을 얻었고, 그 맹월과 마지막 이별장면인 진양조가락도 판소리에선 처음 도입된 가락이다. 그런가 하면 최경회의 애기(愛妓)인 논개의 촉석루 순절도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이 비빔밥 한 그릇을 통해서 깨달을 수도 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인들이 진주에 와서 비빔밥이 동이 났는데 퇴폐문화로 내몰려 그 이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윤소연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 밖에도 비빔밥은 산채비빔밥 콩나물비빔밥 열무비빔밥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특히 산중(지리산) 사람들이 남강 나루터를 건너와 소싸움 소리판 내기, 씨름 등 야시장이 들썩일 땐 이 진주비빔밥과 헛제삿밥이 동이 났다는 일화도 이 비빔밥 한 그릇에 담긴 토박이들의 오붓한 정이다.
촉석루에 올라 의연한 남강을 굽어보며 ‘강나무 건너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밀주 한 잔으로 때움도 그날의 격세지감을 말해 주는 멋이 아닐까 싶다.